241. 원념의 괴물 (1)
“숨겨진…… 힘이라고……?”
“나와, 카스피의 몸을 통해 그것을 밝혀낼 것이다.”
살라딘은 왼손에 쥔 사타나일을 셰이카에게 겨눴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타나일만 셰이카의 심장에 꽂을 수 있다면.
그래서 셰이카의 몸으로 전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몸뚱이가 망가진 건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포기하지 않은 건가. 살라딘.”
셰이카가 살라딘의 손목을 쥐었다.
“그래. 그 검을 내 심장에 꽂고 싶다는 거로군.”
셰이카의 붉은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렇게 해 보아라.”
그 말과 동시에 셰이카가 사타나일을 당겼다.
콰드득, 사타나일의 검날이 셰이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셰이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라딘은 놀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살라딘은 걷잡을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크하하하하! 어리석은 자 같으니!”
살라딘은 벨리알의 권능, ‘흡혈’을 시전했다.
이제 자신은 셰이카의 육체로 전생한다.
그렇게 작금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귀살자의 힘마저 흡수한 최강의 존재가 된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게…… 무슨……!”
흡혈의 권능이 발현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제야 깨달았느냐.”
셰이카는 심장을 관통 당했다.
그러나 셰이카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했다.
“너와 나의 ‘격’의 차이를.”
셰이카의 어깨가 번득였다.
파앙!
살라딘의 눈앞이 고속으로 회전했다.
잔상처럼 스치는 풍경.
살라딘은 머리를 잃은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봤다.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의 힘이라.”
셰이카는 사타나일을 바라봤다.
“재미있군.”
* * *
“살라딘 쿠르드가 죽은 것 같구나.”
아틸라 일행이 슈시아, 샤를, 키릴과 헤어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수오미 왕국의 어느 여관 식당에서 바토리가 한 말이었다.
아틸라가 되물었다.
“뭐라고?”
“데비쉬의 단주, 살라딘이 죽은 것 같다는 말이다.”
바토리는 줄곧 일행을 추격하는 살라딘의 기척을 느꼈었다.
그것을 일행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카스피가 알게 된다면, 분명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할 테니까.
“며칠 전부터 살라딘은 우릴 추격했었다.”
바토리가 살라딘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바토리는 카르타고를 만났었고, 그를 통해 벨리알의 마기를 감각했다.
그리고 살라딘이 발하는 마기의 근원이 바로 벨리알이다.
물론 얼마 전.
그러니까 데비쉬 살수들이 버서커 후유증으로 쓰러진 아틸라를 습격했을 때의 바토리는 살라딘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의 바토리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또한 그날 이후 벨리알의 마기는 더욱 강해졌다.
“바토리 할망구도 느끼고 있었군.”
도롱뇽도 벨리알의 마기를 감지했다.
다만 도롱뇽은 바토리만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기에, 바토리보다 늦게 알아챘다.
오토가 물었다.
“아틸라 님. 그 살라딘인가 뭔가 하는 놈, 엄청난 강자라 하지 않았수?”
“그래.”
“근데 그런 놈을 대체 누가 쓰러뜨린 거요?”
“그야 뻔하지.”
이번의 대답은 카스피가 했다.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 라딤.”
아틸라의 생각도 같았다.
살라딘을 죽일 수 있을만한 강자 중에서, 살라딘을 죽일 동기가 있는 자는 셰이카뿐이다.
바토리가 말했다.
“어찌 됐든 위협 요소 하나는 제거된 셈이구나. 카스피.”
하싸씬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암살 교단 데비쉬.
그곳의 단주가 죽었다.
게다가 데비쉬는 아틸라 일행과 하싸씬에게 상당한 전력을 잃었다.
“데비쉬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공산이 클 듯하구나.”
카스피도 그것을 알았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어두웠다.
셰이카가 살라딘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단주는 알고 있는 거야. 내가 귀살자라는걸.’
오토가 화제를 돌렸다.
“어, 어쨌든 샤를 그 친구와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어 다행이우. 이제 나바라와 샹크리스는 아인하르트의 먹잇감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오토는 불가침 조약에 관한 서류를 미리 챙겨 왔었다.
오른팔이 완전히 회복된 샤를은 약속대로 서류에 서명했다.
이후 샤를은 키릴과 함께 샹크리스 왕국으로 떠났다.
나바라에 이어 샹크리스와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건 그렇고 샤를과 키릴, 두 사람 눈빛이 아주 뜨거워 보이던데 이참에 확 혼인했으면 좋겠수. 그렇게 되면 아인하르트 왕국은 우리와 진정한 동맹이 되는 것 아니요.”
히죽대는 오토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샤를과 키릴이 혼인하는 거랑 나바라 왕국이 무슨 상관이 있냐.”
“엥?”
“둘이 혼인해 봐야 아인하르트와 샹크리스의 동맹이 돈독해지는 것뿐이다. 심지어 그것도 완전하다 볼 수는 없지. 키릴은 샹크리스의 공주가 아니니까.”
아틸라의 말대로다.
키릴은 샹크리스 왕국의 성기사일 뿐이다.
물론 크레센시아 성기사단과, 그곳의 단장인 키릴의 위세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키릴은 왕족이 아니다.’
아인하르트 왕국과 샹크리스 왕국이 진정한 동맹국이 되려면.
샤를은 키릴이 아닌, 샹크리스의 세 공주 중 한 명과 혼인해야 한다.
아틸라는 불안한 눈을 굴리는 오토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눈에 장난기가 맺혔다.
“조심해라 오토.”
“뭐, 뭘 말이우?”
“만약 아인하르트와 샹크리스가 혈연으로 이어진 동맹국이 되면,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은 독 안에 갇힌 쥐 신세로 전락할 테니까.”
“흐응. 정말 그리될 수도 있겠구나. 샹크리스의 프리실라 공주는 이웃 왕국까지 소문이 자자한 미인이니 말이다. 이번에 샤를, 그 아이가 샹크리스 왕성에 도착하면 왕은 일부러라도 프리실라 공주와의 만남을 주선하겠지.”
그렇게 말하던 바토리가 아틸라를 흘겨보며 첨언했다.
“물론 아틸라는 프리실라 공주에게 눈곱만치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틸라는 대답 없이 술병을 들이켰다.
오토는 샹크리스 왕국의 연회에서 봤던 프리실라 공주의 미모를 떠올렸다.
별안간 꽥, 하고 소리쳤다.
“히익! 그,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당장 샹크리스로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니요!”
“우리가 왜.”
“아틸라 님이 방금 말하지 않았소! 아인하르트와 샹크리스가 혈연관계가 되면 나바라 왕국이 위험하다고!”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이대로 샤를이 프리실라 공주와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러고 그러요!”
“어쩌긴 뭘 어째. 나바라 왕국이 멸망 수순을 밟는 거지.”
“뭐가 그리 걱정인 것이냐 철혈귀검아. 어차피 넌 나바라 왕국에 별달리 정도 없지 않더냐.”
“히이익!”
기겁하는 오토에게 아틸라와 바토리는 추가로 무서운 농담을 던졌다.
오토는 두 사람에게 항변하는 한편, 카스피에게 제 편을 들어 달라며 매달렸다.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요! 나바라 왕국엔 라시드도 있단 말이요! 사, 살쾡이 암살자의 부친 말이오!”
그러자 카스피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것에 아랑곳없이 아틸라와 바토리는 오토를 놀려 댔고, 자연스레 일행의 대화는 평소처럼 왁자지껄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바라 왕국이 위험에 처하면 꼭 도와줘야 하오! 아틸라 님! 바토리 아가씨!”
“너 하는 거 봐서.”
“나도 철혈귀검이 하는 거 보고 결정해야겠구나.”
“사, 살쾡이 암살자……!”
“뭐야 영주 나리! 또 내 엉덩이 봤지!”
“무, 무슨! 아아안 봤소!”
“보더구나. 카스피.”
“그럴 줄 알았어! 이 변태 영주 나리!”
“억울하오!”
일행의 웃음소리가 여관 식당을 울렸다.
시끌벅적한 밤이 깊어갔다.
* * *
이른 새벽.
카스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운 바토리를 바라봤다.
잠시 후, 바토리가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카스피는 미끄러지듯 창밖으로 나갔다.
세상은 고요하고 어둑했다.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낯익은 네 마리의 말이 나란히 묶여 있었다.
“쉬이. 쉬이이.”
카스피는 동료들의 말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갈색마를 매만졌다.
푸르르, 말이 투레질을 했다.
“쉿. 조용히.”
카스피는 말고삐를 쥐었다.
기척을 죽이며 발을 움직였다.
지난밤 술자리는 평소보다 과했다.
오토는 말할 것도 없고, 바토리마저 상당히 취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흐트러진 바토리는 처음 봤어.’
아틸라에게 주정을 부리던 바토리를 떠올리며 카스피는 미소했다.
그러다 무언갈 떠올리고는 웃음기를 지웠다.
‘바토리는 아틸라를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어찌 됐든 바토리가 취한 건 카스피에게 잘 된 일이었다.
카스피는 오늘, 일행을 떠날 생각이니까.
‘살라딘 쿠르드가 죽었어.’
그를 죽인 것으로 확실시되는 인물은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 라딤.
카스피는 단주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바흐의 입을 통해 들은 단주는 비밀스럽고, 또 끝을 알 수 없는 강자였다.
하싸씬의 모든 마스터들이 단주를 두려워했다.
거기에 더해 카스피는 알고 있었다.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이는 아틸라와 바토리마저도 하싸씬의 단주만은 크게 경계한다는 것을.
‘단주는 위험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스승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어쩌면 살라딘이 사라진 지금, 단주는 카스피를 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다.
카스피는 하싸씬의 파문 살수.
하싸씬은 여전히 카스피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그들은 파문 살수인 내 목숨을 취해야 할 의무가 있어.’
카스피 제거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단주인 셰이카 역시 하싸씬의 살수다.
그는 실제로 발루아의 내전에서 활약한 전적이 있고, 추가로 살라딘마저 죽였다.
셰이카가 직접 카스피를 제거하러 온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바토리와 도롱뇽의 감지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바토리와 도롱뇽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틀렸을 가능성은 적다.
‘그래. 이 선택이 최선이야.’
카스피는 갈색마와 함께 마구간 바깥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여관을 돌아본 카스피는 다시 뒤돌아, 발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도보로 이동할 생각이다.
아틸라는 잠귀가 밝다.
‘아틸라.’
카스피의 발이 멈춰 섰다.
아틸라를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카스피는 혼란스러웠다.
아틸라라는 존재는 늘,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동료들을 떠나면.’
미래의 일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동료들과 헤어지게 된다면.
아틸라도.
바토리도.
펀치도.
도롱뇽도.
그리고 영주 나리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카스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떨려 왔다.
그러나 그녀는 공포와 슬픔이란 감정에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억지로 입가를 들며 웃었다.
‘내 문제로 동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아틸라는 ‘지구’라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목적이 있다.
바토리도 고대 왕국을 부활시킨다는 목적이 있다.
오토의 목적이 무언지는 몰랐다.
어쩌면 오토는 그저, 아틸라를 따라다니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주 나리에겐 영주 나리의 삶이 있는 거야. 삶에 반드시 목적이란 게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마을 입구에 다다른 카스피는 말 등에 올라탔다.
넓어진 시야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벌써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주민들.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어. 이 세상과 몸을 부딪치며, 힘껏 살아가고 있어.’
카스피는 말고삐를 당겼다.
마을 입구를 나서는 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른 새벽부터 산보라도 갈 셈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