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240화 (240/425)

240. 귀살자의 힘

데비쉬의 단주, 살라딘 쿠르드는 카스피가 ‘귀수’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이시여.’

그것을 알려 준 건 그가 섬기는 고위악마, 벨리알의 힘.

살라딘은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카스피가 귀수의 힘을 얻었다 한들,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 라딤’보다 강하지 않다는걸.

‘그러나 내겐, 또 다른 힘이 있다.’

살라딘의 육체는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벌써 십여 차례나 타인의 몸으로 전생했고, 힘을 삼켰다.

그러면서 이전에 지니고 있던 힘을 더욱 발전시켰다.

‘지금의 날 쓰러뜨릴 수 있는 자는 셰이카 라딤뿐이다.’

그러나 자신이 카스피의 몸으로 전생을 성공한다면.

‘그 셰이카도, 날 쓰러뜨릴 수 없다.’

살라딘의 최종 목표는 카스피가 아닌 셰이카였다.

카스피의 몸을 취하는 것은 셰이카의 몸을 얻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살라딘은 자신의 힘을 믿었다.

점점 강력해지는 벨리알의 마력을 똑똑히 감각했다.

그는 대격변의 전조를 느꼈다.

‘벨리알께서는 말씀하셨다. 머지않아 대격변이 불어닥칠 것이라고.’

살라딘은 다짐했다.

카스피의 몸을 취할 것이다.

이후 귀살의 힘을 다듬어 셰이카의 몸으로 전생할 것이다.

그러고 난 뒤.

‘데비쉬와 하싸씬을 통합해, 다가올 대격변의 새로운 강자로 거듭날 것이다.’

살라딘은 카스피 일행이 칼날 산맥으로 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스피가 귀수의 경지에 오른 것을 감지했다.

‘드디어.’

살라딘은 칼날 산맥에 올라 기습을 가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버렸다.

칼날 산맥의 괴수는 강하다.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서두를 것 없다. 놈들이 산맥에서 내려온 뒤 공략해도 늦지 않다.’

게다가 카스피 일행엔 카자르가 있다.

‘아니지. 놈의 본래 이름은 아틸라.’

검은늑대의 아틸라는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행 안엔 남쪽의 패왕이라 불리는 샤를 아인하르트가 있고.

샹크리스 왕국 최강의 성기사인 키릴 크레센시아가 있으며.

서리나무 일족의 수장, 슈시아 세이나자르도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살라딘을 주저하게 만든 건.

‘바토리 에르제베트.’

살라딘은 바토리를 알고 있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위험하다. 벨리알께서도 그녀만은 조심해야 한다 말씀하셨지.’

비록 관조자의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동귀어진(同歸於盡)의 각오로 덤빈다면, 반신을 비롯한 여러 초월자들마저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바로, 바토리 에르제베트다.

살라딘은 때를 기다렸다.

자신을 탐지하기 힘든 먼 거리에서 카스피 일행을 추격하며, 그들의 행동을 엿보았다.

그가 지닌 벨리알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벨리알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시야도 점점 넓어지는군.’

그러나 그 힘엔 단점도 있었다.

눈을 감아야만 상대를 엿볼 수 있었기에, 표적을 관찰하는 동안엔 어느 정도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살라딘 정도 되는 실력자가 눈을 감았다 해서 주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는 없다.

그러나 살라딘은 만전을 기해야 했고, 그래서 가장 뛰어난 실력의 마스터 다섯을 그림자처럼 대동시켰다.

데비쉬의 마스터들은 살라딘과 ‘피의 계약’으로 이어져 있다.

절대로 살라딘을 배신할 수 없다.

그러던 중이었다.

‘드디어 달빛우물숲을 빠져나온 건가.’

살라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날 산맥을 내려와, 달빛우물숲으로 사라졌던 카스피 일행이 수 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울창한 숲을 걸으며 키릴이 물었다.

“오른팔은 좀 어떤가요. 샤를.”

“아주 좋군. 며칠 사이 더욱 편안해졌다.”

그렇게 답한 샤를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머지않아 너와 제대로 승부할 수 있겠군. 아틸라.”

“새로운 팔에 완전히 적응이나 하고 그런 소릴 해라.”

아틸라의 말대로였다.

샤를은 원래대로 돌아온 자신의 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적응도 뭐 순식간에 마치겠지만.’

샤를의 오른팔에 이어, 넬다의 희귀병도 완전히 치유됐다.

요르그 문샤인웰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넬다를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덕분에 일행은 달빛우물숲의 귀빈 대접을 받으며 편안히 쉴 수 있었다.

서리나무숲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기운이 강한 그곳은 일행에게 훌륭한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쉬는 동안 샤를은 틈틈이 오른팔을 풀었다.

그의 오른팔은 이전보다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키릴이 가벼운 대련 상대를 맡았고, 그녀는 샤를의 무위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분명해. 아틸라에게 밀리는 실력이 아니다.’

키릴은 아틸라와 샤를이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샤를은 아틸라보다 약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틸라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긴 어렵군.’

숲을 벗어난 일행은 동쪽으로 움직였다.

며칠 이동한 뒤에, 동료들은 각자의 길을 떠날 것이다.

목적을 이루고, 충분한 휴식까지 취한 일행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직 바토리만이, 먼 곳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마기를 감지했다.

그녀는 그 마기가 일행의 뒤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 *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군.’

살라딘은 카스피 일행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카스피 일행은 한동안 동쪽으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일행을 떠난 건 슈시아 세이나자르였다.

이후엔 샤를 아인하르트와 키릴 크레센시아가 일행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했다.

‘남은 것 넷인가.’

검은늑대의 아틸라.

바토리 에르제베트.

오토마이어 나바라.

그리고 카스피.

‘저 넷은 역시 한 팀이로군.’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후, 살라딘은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위험인물인 검은늑대의 아틸라와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건재하다.

그러나 살라딘은 그들을 카스피와 떨어뜨려 놓을 비책이 마련돼 있었다.

살라딘이 지닌 벨리알의 마력과, 마스터들의 마술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시작이로군.’

살라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이게 무슨……!”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다섯 마스터.

그들이 잘린 고깃 조각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살라딘이 크게 놀란 이유는 마스터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죽는 동안,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그런 신기를 가능하게 할 만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살라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음성.

마찬가지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호리호리한 체격.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 라딤.

“너는…… 대체 언제 이곳에……!”

셰이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살라딘을 응시하던 셰이카가 검은 복면을 벗었다.

그러나 그 안엔 망사 재질의 또 다른 복면이 있었고, 그래서 살라딘은 셰이카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셰이카의 입술이 아주 진한 붉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

붉은 입술이 말했다.

“기다리느라 지루했다. 잠든 건 아닌가 걱정도 했지.”

셰이카의 눈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두 눈은 똑바로 보면서 죽이고 싶었으니까.”

카앙!

먼저 공격한 건 살라딘이었다.

그의 검 ‘사타나일’이 셰이카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셰이카는 무심하게 왼팔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귀살자만의 특별한 무기.

귀수였다.

“네놈이 상대라면, 이 정도는 꺼내 줘야겠지.”

셰이카는 발루아 왕국의 내전에서도.

조금 전 데비쉬의 다섯 마스터를 상대할 때도.

귀수를 쓰지 않았다.

“그러니 감사히 생각하도록. 살라딘.”

살라딘이 재차 사타나일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셰이카는 어렵지 않게 막았다.

셰이카가 속삭였다.

“경고는 보냈을 텐데.”

발루아 왕국에서 데비쉬 마스터들을 도륙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주위엔 데비쉬 살수의 특기인 검은 연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아무리 셰이카 라딤이라 해도, 연막 속에 숨은 날 찾을 순 없다.’

다섯 마스터가 죽긴 했지만, 살라딘에겐 아직 연막의 힘이 남아 있었다.

살라딘은 자신했다.

‘벨리알의 힘이 강해지며, 데비쉬의 연막 또한 강해졌다.’

오랜만에 조우한 셰이카의 얼굴에 살라딘은 당황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살라딘은 냉정을 찾았다.

이참에 셰이카의 힘을 흡수해 버릴 생각이었다.

‘카스피를 관측하는 동안 날 쓰러뜨리지 않은 것이 네 실수다. 셰이카.’

살라딘은 그림자마술을 통해 완전히 모습을 지웠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감았고, 벨리알의 힘을 통해 셰이카를 발견했다.

‘거기 있군. 셰이카.’

살라딘은 마치 형태를 지니지 않은 그림자처럼 셰이카의 뒤로 접근했다.

스스스스슷.

사타나일을 들었다.

이것이 셰이카의 심장에 꽂히면, 셰이카의 힘을 흡혈할 수 있다.

그때 셰이카가 빙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귀안이 살라딘을 보며 초승달처럼 좁혀졌다.

살라딘의 눈엔 셰이카의 눈이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퍼엉.

세이카의 몸이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스슷. 프스스스스슷.

주위를 감쌌던 흑색 연막이 모습을 바꿨다.

하싸씬 살수의 특기인, 백색의 연막으로.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살라딘.”

살라딘은 경악했다.

셰이카의 음성은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커다랬다.

하지만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거리도 알 수 없었다.

“셰이카아아!”

살라딘이 소리쳤다.

백색의 가없는 세계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검은 별처럼 빛났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았다.

‘셰이카는 어디에……!’

찾을 수 없었다.

셰이카는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췄다.

그제서야 살라딘은 다섯 마스터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살해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셰이카는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카스피가 귀살의 일족이란 것을 알고 난 뒤, 카스피를 제거할까 생각했었다.”

셰이카의 목소리를 가늠하며 살라딘은 사타나일을 휘둘렀다.

그러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꿨다. 그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말이야.”

살라딘은 계속해서 사타나일을 휘둘렀다.

여전히 그의 검은 허공만을 갈랐다.

“그러던 중 생각이 미치더군. 살라딘 쿠르드. 너 역시도 카스피를 추적할 것이라는걸.”

파앙!

살라딘의 오른팔이 절단됐다.

살라딘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왼손으로 사타나일을 들었다.

“그리고 네가 이렇게 직접 움직인다는 건 역시, 카스피가 귀수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이겠지.”

파캉! 살라딘의 한쪽 종아리가 잘렸다.

“난 이제 단주의 눈을 운용하고 있지 않으니까.”

이어 살라딘의 반대쪽 허벅지가 몸에서 분리됐다.

두 다리를 잃은 살라딘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크헉……! 컥……!”

살라딘은 더 이상 비명을 삼킬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격통이 그의 몸을 잠식했다.

셰이카의 귀수가 지닌 특별한 힘이었다.

“셰이카…… 넌……!”

“난 카스피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셰이카의 붉은 눈이 허공에 드러났다.

“귀살의 일족에겐, 아직 숨겨진 힘이 있다는 걸 발견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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