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달빛우물 엘프 (1)
샤를은 오래전, 크라켄의 흑편(黑鞭)에 오른팔을 잃은 적이 있다.
‘도살자!’
그때의 샤를은 아틸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샤를은 그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결과적으로 샤를은 아틸라를 구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샤를!’
오른팔의 절단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맞았다.
그로부터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의 어린 용병단장은 4개 왕국을 통합한 불세출의 패왕이 됐고.
그날, 그가 지키려 했던 호적수와 함께.
자신의 오른팔을 치유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다그닥. 다그닥.
여섯 마리 말이 들판 위를 걸었다.
각각의 말 위엔 아틸라, 바토리, 오토, 카스피, 키릴, 그리고 샤를이 타고 있었다.
키릴이 물었다.
“반드시 나를 대동해야만 한다니. 이유를 듣고 싶군요 샤를 아인하르트 왕.”
“그냥 샤를이라 불러 줬으면 좋겠군.”
“그러죠. 샤를.”
즉답하는 키릴을 보며 샤를이 미소했다.
그러고는 답했다.
“샹크리스 왕국은 강하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이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대는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의 단장. 내가 없는 사이 아인하르트 왕국에 가장 거대한 위협이 될 자를 적진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샤를의 의견은 타당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것이 아니더라도 키릴을 이번 여정에 동행시키고 싶었다.
‘키릴과 샤를을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어 놓으면, 분명 도움이 된다.’
오토가 끼어들었다.
“호오 그렇군. 그래서 나도 일행에 합류시킨 거였소? 샤를.”
“오토마이어 왕과 함께해야 한다는 조건을 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에엥?”
“오토마이어 왕은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가도 좋소.”
“이, 이유는?”
“아인하르트 왕국에 조금도 위협이 될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니까.”
오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뭐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요! 이보쇼 아틸라 님!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오!”
“왜 나한테 난리야. 직접 증명하든가.”
아틸라의 말에 오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샤를을 돌아봤다.
샤를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지금 붙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내가 이 자리에서 오토마이어 왕을 제거한다면, 나바라 왕국은 저절로 내 손에 굴러들어올 테니까.”
샤를이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자 오토가 기겁했다.
“히익! 아, 아틸라 님!”
“왜 자꾸 날 불러.”
아틸라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오토는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바토리를 돌아봤지만.
“한번 겨뤄 보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이전엔 아틸라와도 결투한 적이 있지 않았더냐 철혈귀검아.”
그 말에 샤를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겨루고 싶어지는군.”
“히익! 그, 그런 소리 마쇼 바토리 아가씨!”
오토의 태세 전환은 빨랐다.
껄껄,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으하하하! 샤를 저 친구. 농담이 심하구려. 으하! 으하하하하!”
샤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토마이어 왕. 언제부터 우리가 편히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워진 거요. 불쾌한 언사는 그만뒀으면 좋겠군.”
“아, 아니. 저 성기사 아가씨한텐 그냥 이름을 부르라 했으면서.”
“그대에겐 말하지 않았지.”
듣다 못한 아틸라가 나섰다.
“샤를.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좀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뭐라고?”
“4개 왕국을 통합한 왕이면 넉넉하게 마음을 가지라는 거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나이나 신분 같은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우린 네 오른팔을 치유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거다. 함께하기로 한 이상, 그동안만이라도 우리 룰을 따라 주면 좋겠는데.”
이렇게 말하며 아틸라는 내심 마음의 불편함을 느꼈다.
샤를이 오른팔을 다치게 된 원인은 사실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그러나 샤를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쪽의 룰이라.”
샤를은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소년처럼 미소 지었다.
“재밌군. 그러도록 하지.”
본래 샤를의 성정은 보수적이지 않다.
그는 왕좌에 앉으며 어쩔 수 없이 위계질서를 세웠다.
결국 샤를에게 허물없이 대하는 이는 피핀밖에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공석에서는 샤를을 폐하라 부르며 존대했다.
샤를은 그런 부분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틸라도 그것을 알았다.
‘새끼. 웃기는.’
그런 샤를을 보며 아틸라도 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오토가 나섰다.
“지금까지 이런 강력한 파티는 없었소! 불패의 야만전사 아틸라!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최강의 마법사 바토리! 살쾡이 귀살자 카스피!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장 키릴! 남쪽의 패왕 샤를! 그리고 전 오동나무 용병단의 단장이자, 전 철혈귀검성의 성주! 야만전사 아틸라의 가장 절친한 동료! 지금은 나바라 왕국의 왕이자……!”
“왜 니 설명만 그리 기냐.”
“아, 아틸라 님! 말하고 있는데 말 끊기요!”
“영겁의 세월이라니. 굳이 나이가 느껴질 법한 그런 표현은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철혈귀검아.”
“아니 그건……!”
“왜 난 살쾡이 귀살자야! 왜 맨날 살쾡이라고 하는데!”
“그야 살쾡이를 닮았으니까……!”
“전 마음에 들어요. 오토.”
“크흑! 역시 성기사 아가씨밖에 없소!”
“남쪽의 패왕 샤를이라. 내 소개가 가장 짧은 걸 보니 역시 사사로운 감정이 섞인 것 같군.”
“그런 거 없소!”
“카아앗! 내 소개는 빼먹는 거냐! 건방진 종복 미물 새끼!”
끼아옹!
“시, 시부럴 무슨 짐승새끼들까지……!”
항변하는 오토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키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도 웃음을 보였다.
샤를도 오랜만에 느껴지는 편안함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틸라. 넌 항상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일행의 최종 목적지는 달빛우물숲.
달빛우물 엘프의 은신처였다.
아틸라가 말했다.
“달빛우물 엘프의 치유술은 뛰어나지. 그곳의 수장이자 대(大)드루이드인 ‘요르그 문샤인웰’라면 네 오른팔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을 거다.”
드루이드(Druid)
오직 달빛우물 엘프 중에서만 극소수로 존재하는 치유사들의 이름.
그들은 빛의 신 포이베의 축복을 받은 샹크리스의 사제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환자를 치유한다.
그중에서도 대드루이드인 ‘요르그 문샤인웰’은 엄청난 치유술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샤를의 오른팔을 완벽하게 치유할 수는 없다.
‘두 가지 재료가 추가로 필요하지.’
하나는 현자의 돌.
그중에서도 달빛우물 드루이드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현자의 돌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틸라는 아인하르트 왕국을 향하기 전, 나바라 왕국의 ‘은밀한 숲’에 들러 알키미야를 만났다.
‘뭐, 뭐야! 너 또 왜 왔는데!’
아틸라는 히죽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알키미야의 불을 더욱 강력하게 해 줄 비법을 알려 주러 왔지.’
‘뭐, 뭐라고? 그게 가능해? 그게 뭔데! 헉헉!’
‘방법을 알려 주는 대신 현자의 돌을 하나 더 만드는 거다. 아, 그리고 지난번 현자의 돌에 쓸데없는 기능을 추가했더군. 그것도 원래대로 되돌리도록 해.’
그 말에 바토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림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틸라는 알키미야에게 달빛우물 드루이드용 현자의 돌을 얻었다.
나머지 하나의 재료는 달빛우물숲 근처에서 찾을 생각이다.
문제는 달빛우물 엘프들이 과연 일행을 만나줄까 하는 것인데.
‘방법은 있지.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그 위험한 방법을 위해 일행은 구(舊) 아스투리아 왕국 서쪽 끝단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곳에 아틸라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
“이렇게 내 나라를 둘러보게 되는군.”
샤를은 편안히 자신의 왕국을 바라봤다.
오랜 전쟁으로, 그리고 카르타고와의 대결에서 입은 부상으로 지쳐있던 그에게 이번 여행은 새로운 활력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아틸라 일행은 생각보다 빠르게 샤를과 가까워졌다.
그동안 일행이 봐왔던 샤를은 언제나 어떤 무리의 장(將)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샤를은 달랐다.
그는 그저 ‘샤를 아인하르트’라는 한 명의 전사였고.
우두머리의 감투를 벗어던진 그는 밝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아, 아틸라! 샤를이 또 피식피식 웃고 있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가요? 샤를.”
특히 카스피와 키릴은 금세 샤를과 친해졌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카스피와 키릴은 원작에서 샤를의 편에 서는 인물들이니까.
‘그러고 보니 바토리도 샤를 편이었지.’
아틸라는 바토리를 돌아봤다.
아틸라와 눈이 마주친 바토리가 생긋 웃었다.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을 가장하며, 샤를과 대화하는 키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틸라는 두 사람을 보며 이제서야 원작의 내용대로 흘러가려 하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버지가 등장했던 꿈은 그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이즈음 아틸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원작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아틸라는 카스피를 바라봤다.
아틸라가 카스피와 사바흐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카스피는 사바흐를 찾으러 떠나려 했었다.
카스피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었다.
그것을 확인한 뒤엔, 자신의 평범치 않은 뿌리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그 시작점이 사바흐를 만나는 것이라고, 카스피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틸라는 카스피를 보내지 않았다.
‘혼자 떠나는 건 위험하다. 데비쉬의 단주, 살라딘 쿠르드가 널 노리고 있을 테니까.’
사실 아틸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카스피를 노리는 건 오히려 하싸씬일 가능성이 크다.
‘살라딘은 귀살의 힘을 완벽하게 개화한 카스피를 원할 테니까.’
그러나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는 다르다.
셰이카의 목적은 살라딘에게 귀살의 힘이 넘어가는 일을 방지하는 것.
만약 셰이카가 카스피의 힘을 눈치챘다면.
‘카스피를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아틸라는 한편으로 의구심을 가졌다.
셰이카가 아직까지 카스피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셰이카는 ‘단주의 눈’을 통해 카스피를 관찰할 수 있다.
‘셰이카는 카스피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카스피를 습격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반대로 어쩌면, 셰이카는 카스피의 정체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카스피의 정체를 어떻게든 숨기려는 자가 하싸씬에 있다는 의미.
그것도 상당한 힘을 가진 자가.
정체는 뻔했다.
‘그 제자바보 새끼인가.’
* * *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날이 흘러갔다.
아틸라 일행은 중간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치 아틸라가 이곳을 찾을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십수 명의 그림자가 아틸라를 반겼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여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날, 갑자기 사라진 이후로 처음이로군. 아틸라.”
그녀를 보며 아틸라도 웃었다.
“그래. 그날 이후 처음이군. 슈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