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동맹의 조건
샤를은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아스투리아, 후마이야, 노르드를 차례로 집어삼킨 그는 얼마 전 발루아 왕국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피핀이 다가와 속삭였다.
“샤를.”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치형 문을 열고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라진 그의 모습에 샤를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긴 시간은 아니었고, 그의 눈은 오토마이어 왕의 옆을 걸어오는 거구의 사내에게 닿았다.
“아틸라.”
“오랜만이군. 샤를.”
왕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는 야만전사에게 금사자 기사단이 검을 뽑았다.
그러나 샤를의 손짓 한 번에 검을 갈무리했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샤를은 왕좌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오토마이어 왕과 형식적인 악수를 나눈 뒤, 아틸라 앞에 섰다.
“키가 더 자란 것 같군. 아틸라.”
“너도 그런 것 같은데.”
샤를이 피식 웃자 아틸라도 웃었다.
샤를은 피핀과 제롬을 제외한 모든 기사와 병사를 물러나게 했다.
피핀은 그래선 안 된다며 반대했지만 샤를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기사와 병사들이 나가자 피핀은 한층 흉흉해진 눈으로 아틸라를 노려봤다.
저만치에서는 제롬이 바토리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흐응. 스승의 배에 칼을 꽂는 제자, 제롬이로구나.”
“……그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샤를은 아틸라의 동료들을 둘러봤다.
바토리, 오토, 카스피, 그리고.
“그새 동료가 늘었군.”
백금빛 갑주를 입은 성기사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샹크리스 왕국,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장 키릴 크레센시아입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키릴 크레센시아라. 얼마 전 성기사단장이 되었다 들었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 모르겠군.”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다리우스 명예 단장께서 허하신 일이지요.”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 지금이라도 검을 겨루고 싶어지는군.”
“언제든 좋습니다.”
샤를의 도발을 키릴은 부드럽게 받아쳤다.
키릴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또한 아틸라가 인정한 샤를이라는 사내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샤를은 키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기한 감각이군.’
샤를은 키릴을 보며 어떤 신비로운 감정을 느꼈다.
물론 키릴 크레센시아는 대륙 최강의 전사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다.
샤를도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것을 감각했다.
그러나 지금 샤를이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묘한 끌림이었다.
그동안 만나온 수많은 적들, 동료들, 이제는 형제와도 같아진 피핀과 제롬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건 마치.
‘그래. 아틸라를 처음 봤을 때와 같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패영전에서 샤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피핀도, 제롬도 아닌 키릴이니까.
그녀는 샤를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이후 가장 믿음직한 동료가 되어 함께 전장을 누빈다.
그뿐만이 아니다.
키릴은 샤를이 ‘악마의 힘’에 삼켜지려 할 때마다 그를 위기에서 구해 내는 존재.
소설 패영전에서, 키릴이 지닌 포이베의 신력은 샤를의 흑화를 견제하고 방지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그러나 지금의 아틸라는 그것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상태였다.
이유는 버서커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중에 경험했던 꿈 때문이다.
아버지가 등장했던.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기억하게 될 거야. 네가 진짜 세상으로 오게 되면. 그래서 너 자신을 조금씩 되찾게 되면.’
그 꿈은 아틸라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고, 다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오늘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아니면 버서커의 후유증이 만들어 낸 환각에 불과한 것인지.
아틸라는 알 수 없었다.
“너 역시 카르타고와 결투했다고 들었다. 아틸라.”
샤를의 목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걸 결투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호되게 당했다고 하던데.”
샤를이 아틸라의 몸을 훑어봤다.
이곳에 오기 전 아틸라는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황금바위산에 들러 무기와 방어구도 골든핑거에게 수리받았다.
‘아니 또 이렇게 걸레짝을 만들어서 찾아온 겐가! 누음핫핫핫핫하!’
즉, 아틸라의 겉모습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심 찔린 것인지,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댔다.
“너야말로 카르타고에게 형편없이 당했다지. 샤를.”
샤를의 눈썹도 꿈틀거렸다.
“글쎄. 난 카르타고를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말까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솔직히 녀석은 내 검술에 감탄하더군.”
“그저 네 망상인 건 아닌가.”
“천만에. 난 카르타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고, 반격했다. 놈에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내 검에 쓰러졌을 지도 모르지.”
“호오. 카르타고가 널 이긴 게 운이라고?”
“네 말은 정정할 필요가 있군. 카르타고는 날 이기지 못했다. 승부 도중 드래곤을 타고 도망쳤지.”
“네가 전투 불능 상태라 돌아간 거겠지.”
“사실이 아니다. 난 녀석과 싸울 여력이 남아 있었다. 달아난 건 카르타고 쪽이다.”
“너 진짜 정신 승리 죽인다.”
“승리는 아니고, 무승부였다.”
“내가 카르타고에게 직접 듣기론 너보다 내가 더 강하다고 하던데.”
“뭐라고?”
샤를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입술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뭣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승부를 내줄 수 있다.”
“바라던 바군.”
아틸라가 흑철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샤를도 듀란달의 손잡이를 쥐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아틸라. 한 번 뽑은 검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신중히 생각하고 뽑는 것이 좋아.”
“너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군.”
그렇게 말하며 아틸라는 샤를의 검, 듀란달을 바라봤다.
요정들의 신기로 벼려진 특별한 검.
주인과 함께 성장하며 본래의 힘을 되찾는 중인 그 검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욱 사나운 예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틸라는 샤를이 강해졌다는 걸 알았다.
‘그래. 이번엔 정말로 재밌겠군. 샤를.’
한편 키릴과 바토리는.
‘바토리. 아틸라 말투가 원래 저랬나요? 샤를 아인하르트 왕도 듣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흐응. 무릇 사내들이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와 다를 게 없단다. 보거라. 서로 자기 장난감이 좋다고 우기며 떼쓰는 어린아이들 같지 않느냐.’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아틸라와 샤를의 대결은 성사되지 못했다.
오토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우린 사사로운 감정싸움을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게 아니오. 샤를 아인하르트 왕.”
샤를이 오토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잠시 후, 검에서 손을 떼었다.
샤를은 물론 아틸라와 겨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특히 카르타고와 결투한 이후 자신의 오른팔이 지닌 불완전함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그래서 그는 보다 완전한 상태로 아틸라와 겨루고 싶었다.
아틸라도 흑철검에서 손을 떼었다.
“운 좋았군. 샤를.”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아틸라.”
그러면서 둘은 계속 으르렁댔고, 키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카르타고, 세계선의 붕괴, 그리고 대격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바토리, 오토, 카스피와 달리 샤를, 피핀, 제롬, 그리고 키릴은 놀란 눈을 떴다.
샤를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 대격변을 대비하기 위해 카르타고는 군대를 소집하고 있고, 우리가 그걸 막아야 한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대격변은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건가.”
대답은 바토리가 했다.
“대격변의 전조로 중간계에 다른 세계의 것들이 침입하고 있다.”
“알고 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마계, 명계, 정령계, 용계 등 많은 세계가 중간계로 더욱 큰 영향력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신계까지도.”
정적이 일었다.
신계(神界).
말 그대로 신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중간계와 합쳐질 수도 있다니.
바토리가 이어 말했다.
“카르타고는 아에스투스를 타고 떠나기 전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다가올 승천의 전장은 신계가 아닐 것이라고.”
“승천의 전장?”
샤를의 물음에 바토리는 승천자에 대해 설명했다.
생전의 버서커 카르타고가 승천자에 가장 근접한 존재였고.
자신이 리베르와 함께 그를 관조했으며.
메피스토펠레스를 추종하는 흑마술사 집단 ‘파우스트’가 카르타고를 제거했다고.
또 바토리는 말했다.
현재 승천자에 가장 근접한 존재는 아틸라와 샤를이라고.
샤를의 눈빛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놀란 건 키릴이었다.
키릴은 비로소 바토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렇다면 설마 당신은……!”
“그렇단다. 내가 바로 먼 옛날 샹크리스 왕국의 궁정 마법사를 지냈던, 바토리 에르제베트다.”
키릴은 멍한 얼굴로 바토리를 바라봤다.
샤를이 말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네 말대로라면 승천의 경지에 다다른 자는 신과 대등한 존재가 된다는 건가.”
“그렇단다.”
“또한 그렇게 신이 된 승천자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다른 신들과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거군.”
“그래. 그것이 바로 승천의 전장이다. 그리고 승천의 전장에서 승리한 승천자는.”
“새로운 주신(主神)이 될 수 있다.”
마지막 말은 아틸라가 했다.
샤를은 엷게 입가를 올렸다.
“그러나 난, 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샤를의 말에 아틸라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샤를의 목표는 전쟁이 없는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그의 어머니는 샤를이 인간의 삶을 살길 바랐다.
샤를의 몸에 흐르는 ‘요정의 피’는 어머니의 의지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샤를의 몸에 흐르는 ‘또 다른 피’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바토리가 말했다.
“샤를. 네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올 전쟁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유를 듣고 싶군.”
“머지않아 도래할 승천의 전장이 중간계가 될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샤를도 예감하고 있었다.
세계선의 붕괴는 갈라졌던 세상을 하나로 합치고 있다.
그렇다면 승천자가 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가올 대격변을 대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는지도 모른다.
오토가 말했다.
“그래서 우린 오늘 이 자리에 모였소. 샤를 아인하르트 왕. 지금은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오. 힘을 합쳐 미지의 존재들을 물리칠 생각을 해야 하오.”
오토는 아틸라의 동료다.
그러나 또한 그는 나바라 왕국의 왕이었고, 그래서 아인하르트의 왕인 샤를과 전략적 동맹을 맺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샤를이 의미심장하게 입가를 올렸다.
“나바라 왕국에 대한 침공을 유보시켜 달라, 그 말인가.”
“나바라와 샹크리스를 영원히 침공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일시적인 동맹 관계도 좋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대격변을 대비하는 일이니까.”
“나로서는 남부 대륙을 통일한 뒤 그 대격변이라는 것을 대비하는 편이 더욱 효율적인 것 같은데.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요.”
“이유는?”
대답은 아틸라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널 막을 테니까.”
샤를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는 일이 되겠군.”
“그러나 넌 우리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거다.”
“왜지?”
아틸라의 입술도 길게 찢어졌다.
“동맹의 조건으로, 네 오른팔을 원래대로 되돌려줄 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