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포이베의 신력 (5)
하림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날의 전투 후 하싸씬과 데비쉬 간의 힘의 저울은 급격히 기울었다.
때마침 후마이야와 노르드를 차례로 집어삼킨 샤를이 발루아 왕국 침공을 시작했다.
발루아의 대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내전을 종식시켰다.
교단으로 돌아온 하림은 단주에게 자신이 만난 정체불명의 살수에 대해 보고했다.
단주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렸지만, 하림의 보고에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는 듯했다.
그즈음 단주는 새로운 힘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하림은.
데비쉬의 여섯 마스터를 쓰러뜨린 ‘그자’에게서 봤던 것을, 카스피에게서 봤다.
“네, 네놈들의 정체가 뭐냐!”
카스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하림의 말속에 무언가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물을 시간은 없었다.
카스피는 사슬낫을 운용해 아메드를 처리해야 했고, 눈앞으로 쇄도한 하림도 차단해야 했으니까.
카스피는 하림이 아메드를 돕는 것을 막았다.
아니, 카스피의 귀기를 보고 놀란 하림이 아메드를 돕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스컹!
벼락처럼 떨어진 사슬낫이 아메드의 목을 잘랐다.
“이제 너 하나 남았네?”
카스피의 입술이 사나운 미소를 그렸다.
“데비쉬의 마스터.”
* * *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육안으로 전투를 관전하지 않았다.
남자는 두 눈을 감은 채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어느 고위악마의 힘은 그 상태에서도 그들이 어떤 전투를 펼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이런, 아메드마저 죽어 버렸군.”
남자의 이름은 ‘살라딘 쿠르드’.
데비쉬의 단주였다.
“다음은 하림의 차례인가.”
하림은 고전하고 있다.
비록 하림이 먼저 죽은 두 마스터보다 강자라고는 하나.
“상대는 하림보다 더욱 강하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저쪽엔 샹크리스 왕국 최강의 성기사, 키릴 크레센시아가 있다.
그럼에도 살라딘은 두 마스터의 죽음과 하림의 고전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설 경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살라딘은 대단한 강자였다.
하림이 상대 중인 살수와, 키릴 크레센시아를 동시에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게다가 그는 최근 더욱 강해졌다.
‘대륙을 감싼 마(魔)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고 있다.’
살라딘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이시여.’
살라딘은 카르타고에게 ‘벨리알의 눈’을 건넸던 고위악마, 벨리알의 화신이었다.
‘벨리알의 힘이 내게 가까워지고 있다.’
살라딘이 최근 빠져든 새로운 힘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살라딘은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의 권능으로 벼려진 특별한 무기.
‘사타나일(Satanail).’
살라딘은 벨리알의 화신이 되며, 사타나일을 손에 넣었다.
현재 데비쉬 살수들이 쓰는 파형 단검은 사타나일의 형태를 모방해 만든 것.
그 사타나일이 최근, 생명을 지닌 것처럼 박동했다.
모양도 더욱 길어졌다.
사타나일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만지며, 살라딘은 하림과 카스피의 대결을 관전했다.
그러면서 하림의 보고를 떠올렸다.
하림의 생각과 달리, 살라딘은 하림의 보고에 촉각을 곤두세웠었고, 심지어 희열마저 느꼈다.
“그래. 그자가 나타났다, 이 말이로군.”
살라딘은 하림이 말한 정체불명의 살수를 만난 일이 있었다.
그의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하림과 대결 중인 여자 살수를 바라봤다.
“사슬낫의 사바흐. 놈의 제자가 귀살의 일족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녀석이 그리 애지중지 키웠던 건가.”
* * *
카스피는 하림에게 맹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차앙! 팡! 촤르르륵!
한 손엔 단검, 다른 손엔 사슬낫을 든 카스피는 숨 쉴 틈 없이 무기를 뻗었다.
그러나 하림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데비쉬의 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카스피도 그것을 직감했다.
하림과 처음 조우했을 때, 그림자마술을 시전하던 그의 어깨에 표창을 적중시킨 그녀였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엔 운도 따랐다.
그때의 하림은 카스피를 내심 무시했고, 그래서 방심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림은 카스피를 통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정체불명의 살수를 느꼈다.
하림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의 몸에서 강력한 생존 본능이 발동했다.
그것이 하림을 이전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의 살수로 만들었다.
“이번엔 지지 않는다!”
하림의 단검이 반격의 곡선을 그었다.
각성한 하림의 공격은 매서웠다.
하싸씬의 어느 마스터라도 저 정도의 공격을 피해 없이 막긴 어려울 정도로.
그러나 카스피에겐 ‘귀안(鬼眼)’이 있다.
귀안은 전투 중 짧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술.
그래서 지금 카스피의 눈엔 하림의 공격 예상 경로가 잔상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슈우욱.
귀안 발동으로 극한의 민첩성을 획득한 카스피는 하림의 일격을 완벽하게 피했다.
하림은 경악했다.
“네, 네놈들은……!”
하림은 ‘그자’에게서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감각을 다시금 선명하게 느꼈다.
‘그자’ 역시도, 자신뿐 아니라 데비쉬 마스터들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했었다.
“네놈들은 정녕 귀신인가!”
이쯤 되자 카스피가 물었다.
“아까부터 무슨 말이지? 난 너를 만난 적이 없어.”
카스피는 무언갈 직감했다.
“혹시 넌, 나와 같은 자를 만난 적이 있는 건가?”
하림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하싸씬의 마스터어어어!”
하림의 공격이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카스피의 방어는 수월해졌다.
“난 하싸씬의 마스터가 아니야.”
“뭐라고?”
“다시 묻지. 넌 나와 같은 자를 만난 적이 있어?”
카스피가 사슬낫을 휘둘러 하림을 밀쳐 냈다.
둘은 잠시 대치 상태를 가졌다.
하림의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그는 카스피의 사슬낫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사슬낫.
사슬낫이라면.
“……네놈. 사슬낫의 사바흐와 관련이 있는가.”
“그래. 난 그분의 제자니까.”
“사바흐의 제자라고?”
하림이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네가 바로 하싸씬의 파문 살수, 사슬낫의 카스피인가.”
“사슬낫의 카스피라는 말은 처음 듣지만, 아무튼 맞아. 내 이름은 카스피다.”
“네가 지닌 힘의 정체가 뭐지?”
그렇게 묻는 하림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하림이 ‘그자’에게서 받은 공포감은 엄청났다.
카스피도 그것을 느꼈다.
“반대로 내가 묻겠어. 넌 나와 같은 자를 언제, 어디서 만났지? 그자는 살아 있는 건가? 아니면 벌써 죽었…….”
“죽어? 그자가 죽는다고?”
하림이 크게 웃었다.
“그자는……, 그자는 설령 고위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난대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뭐?”
“난 그자와 직접 겨뤄 봤다. 그자는 단신으로 데비쉬 마스터 여섯 명을 도륙했지. 너와 같은 붉은 눈을 뜨고, 붉은 기운을 발하는 검을 사용해서.”
카스피는 놀랐다.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 외에 또 다른 귀살자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꿀꺽, 침을 삼키며 카스피가 말했다.
“하지만 넌 살아남았군.”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자는 내가 살아남아 데비쉬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길 원했다. 그 이유 하나로 난 살아 있는 거다.”
“그자를 어디서 만났지?”
“넌 정말 모르는 건가.”
“뭐라고?”
“나와 마스터들은 발루아 왕국의 내전에 참여했었다. 그곳에서 만난 적이라면 뻔하지 않은가.”
카스피의 눈이 커졌다.
“설마…… 하싸씬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그자는 단신으로 전장에 나타났고, 유령처럼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그 상황에서 데비쉬 마스터들을 죽이러 온 적이라면, 하싸씬이라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겠지.”
하림이 이어 말했다.
“그자가 등장한 후 데비쉬는 급속도로 무너졌다. 게다가 하싸씬의 마스터들은 그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략적인 공격을 펼쳤다.”
카스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싸씬에 귀살자가 존재한다니.
‘그렇다면 왜 스승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지?’
사바흐는 카스피가 귀살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카스피가 직접 밝혔으니까.
심지어 발루아 왕국의 내전이 종료됐다는 것을 카스피에게 알린 것도 사바흐였다.
오토가 나바라 왕국에서 룽겔 공작측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사바흐가 카스피를 찾아왔었다.
‘아앗! 스승님!’
‘카스피! 하하하하하!’
그는 발루아 내전이 종료됐다는 것과.
‘오오오! 결국 하싸씬이 이긴 거로군요 스승님!’
‘당연하지 카스피! 난 사슬낫의 사바흐다!’
‘역시 스승님이세요!’
샤를이 발루아 침공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다.
‘샤를 아인하르트가 발루아 왕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서 카스피는 오토의 부탁을 받아, 그의 측근인 세 기사와 라시드를 발루아에서 나바라로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다.
‘좋아! 맡겨 달라고 영주 나리!’
그 여정에 사바흐도 동참했다.
그러나 사바흐는 여행 내내 카스피에게 하싸씬의 귀살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스승님도 몰랐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스승님은 하싸씬의 마스터야. 하싸씬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다면 모를 리가 없어.’
카스피는 하싸씬의 마스터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나 특정할 수 없었다.
데비쉬의 마스터를 여섯 명이나 쓰러뜨릴 수 있는 마스터에, 심지어 귀살자라니.
그러던 중 카스피의 생각이 무언가에 닿았다.
하싸씬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살수이자, 카스피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존재.
카스피의 눈이 커졌다.
‘단주!’
그 순간 하림이 폭풍처럼 단검을 뻗었다.
‘그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공포가 그를 지배한 것인지.
아니면 상념에 빠진 카스피를 보며, 쓰러뜨리려면 지금뿐이라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림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각오로 카스피에게 덤벼들었고, 카스피 역시 이번만은 회피로 끝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카스피는 마주 단검을 뻗었다.
카앙!
단검과 단검이 부닥쳤다.
이번엔 카스피의 몸이 주르르 밀려났다.
하림의 단검이 카스피의 팔에 박혔다.
콰드득! 그녀의 팔 근육이 파열되며 섬뜩한 소음을 울렸다.
그러나 이내, 더욱 커다란 소음에 잡아먹혔다.
파아앙!
하림의 목이 몸에서 분리됐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카스피의 사슬낫이었다.
오히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건 카스피 쪽이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하림의 잘린 머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희미하게 미소했고, 바닥을 굴렀다.
카스피는 멍한 얼굴로 하림의 잘린 머리와 몸뚱이를 바라봤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뒤돌아 마차를 향해 달렸다.
마차 근처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녹초가 되어 주저앉은 용병들도 보였다.
오토와 키릴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카스피는 달리는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던 중 마차문을 열고 나오는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했다.
바토리, 오토, 키릴, 그리고.
카스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카스피는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를 들은 사내의 눈이 카스피를 봤다.
미소하는 그의 입가로 송곳니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