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밤의 숲 (4)
반응할 틈도 없었다.
카르타고는 자신의 몸을 가르는 날붙이를 느꼈고, 오른팔이 절단됐다.
고개 돌린 그의 앞에 우툴두툴 혈관을 드러낸 두 개의 눈동자가 보였다.
야수처럼 찡그린 콧등과, 맹수의 울음소리를 내며 악다물어진 어금니가 보였다.
- 버서커 아틸라!
아틸라는 도약 스킬로 카르타고를 추격한 것이다.
본래 아틸라는 광폭의 권능을 발현하면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아틸라는 달랐다.
그것이 나이아드의 눈물로 인해 상승한 정신력 때문인지.
아니면 카르타고의 오러에 직격당할 위기에 처했던 바토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틸라는 자신에게 쏘아지던 아에스투스의 브레스를 바토리의 마력 장막이 가로막았을 때.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그만 틈이 생긴 것을 알았다.
이성적인 감지는 아니다.
본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의 세계’를 연결하는 자그만 틈을 통해.
아틸라는 카르타고의 오러가 바토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막아 보거라. 바토리 에르제베트.
지금의 바토리는 카르타고의 공격을 막아 낼 힘이 없다.
그래서 아틸라는 시전했다.
[ 해방(解放) ]
[ 해방의 권능이 ‘2레벨’로 진화합니다. ]
[ 환수, 도롱뇽의 봉인된 힘이 ‘2레벨’만큼 해방됩니다. ]
아틸라는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읽을 수 없었다.
글자는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흔들렸고, 생명을 지닌 것처럼 시야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미 아틸라는 도롱뇽의 해방이 한 단계 진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키랴랴랴랴랴랴!
도롱뇽이 브레스를 뿜어 바토리를 보호했다.
그 순간 ‘의식의 세계’에 한 발을 디디고 있던 정신이 완전한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갔다.
투툭, 툭, 아틸라의 의식이 끊겼다.
다시금 찾아든 광폭의 쾌감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카르타고를 등에 태운 아에스투스가 하늘 위로 솟았다.
아틸라는 손안에서 강대한 마력을 감지했다.
드라칼리온이었다.
진화한 해방 스킬에 맞춰, 드라칼리온도 한 단계 강력해진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놓치기 아까운 기회다.
아틸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한 순간 정신의 일부가 다시 ‘의식의 세계’로 넘어왔다.
[ 도약(跳躍) ]
주위 풍경이 길게 세로로 늘어졌다.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아틸라는 드라칼리온을 양손으로 쥐었다.
광활한 검은 날개가 시야를 스쳤고, 이어 검붉은 갑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푸른 안광이 이쪽을 향한 것과 드라칼리온이 휘둘러진 것은 동시였다.
스컹!
카르타고의 오른팔이 잘렸다.
아틸라의 몸이 조금 더 높은 위치로 상승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 타점을 특정합니다. ]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검붉은 갑주로 시선을 고정하며 타점을 맞췄다.
머리 위로 솟은 드라칼리온을 역수로 쥐었다.
힘껏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귀를 울리는 충격음 속에서 아틸라는 드라칼리온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닥친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낙하를 시작했다.
카르타고와 아에스투스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 버서커…… 아틸라……!
카르타고의 목소리.
그의 음성에서 이 정도의 격정(激情)이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더욱 그렇게 들리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에스투스의 머리가 지면에 꽂혔다.
카르타고도 바닥에 처박히며 검은 마기를 흩뿌렸다.
그러나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아틸라였다.
그의 체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고, 지금도 유지 중인 출혈독과 광폭의 권능은 바닥난 체력을 착실히 앗아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런 상황을 알지 못했다.
다시금 무의식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몸에서 주룩주룩 핏물이 흘렀다.
“야만전사야!”
달려가려는 바토리를 오토와 카스피가 막았다.
그들은 아틸라의 상태를 짐작했다.
아틸라는 버서커의 힘에 지배당했다.
도우려 나서 봐야 긍정적인 변화는 일지 않는다.
바토리는 환술을 사용해 아틸라의 정신에 개입하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바토리의 마력은 완전한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었고, 그런 그녀가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틸라는 동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저만치 쓰러진 카르타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밑에 피웅덩이가 생겼다.
인간의 몸에 저렇게 많은 피가 있었던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틸라의 출혈량은 엄청났다.
- 버서커…… 아틸라.
카르타고가 그것을 봤다.
그는 자신보다 아틸라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또 자신을 향해 여전히 공격성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느꼈다.
아틸라가 걸음을 멈췄다.
이가 갈리는 소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고, 이내 그의 몸이 지푸라기처럼 허물어졌다.
쿠웅.
아틸라가 쓰러졌다.
솟구치던 핏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시체처럼 널브러진 그의 주변으로 커다란 피웅덩이가 생겼다.
카르타고가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고, 아틸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을 도롱뇽이 막아섰다.
크르르르르르르……!
자세를 낮춘 도롱뇽이 사나운 울음소리를 냈다.
도롱뇽의 곁으로 바토리가 달려왔다.
오토도, 카스피도, 라쿠나도, 그리고 펀치도 달려왔다.
그들 모두는 아틸라를 보호하기 위해 강대한 적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카르타고의 눈이 도롱뇽을 바라봤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도롱뇽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도롱뇽은 자신의 몸에 지속 중인 해방의 권능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다.
권능의 주인인 아틸라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롱뇽은 성체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도롱뇽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카르타고를 막을 이는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최대한의 정신을 집중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 다가오지 마라. 카르타고.
도롱뇽을 보던 카르타고의 안광이 아틸라를 향했다.
드라칼리온을 향했다.
-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겠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리고.
카르타고의 투구가 바토리를 바라봤다.
- 바토리 에르제베트.
“카르타고. 그 팔은.”
바토리는 카르타고의 오른팔을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틸라에 의해 절단된 이후 돋아난 시커먼 형상을 봤다.
“벨리알의 마력이더냐.”
카르타고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에스투스에게 의지를 발현했다.
머리를 흔들며 아에스투스가 몸을 일으켰다.
도롱뇽이 더욱 강하게 위협의 목소리를 냈다.
오토 역시 검과 방패를 강하게 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땀이 흘렀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핏물마저 배어 나왔다.
아에스투스가 상체를 세우며 날개를 폈다.
낮게 으르렁대는 아에스투스의 입안엔 제 주인의 잘린 오른팔이 물려 있었다.
카르타고가 아에스투스의 등에 올라탔다.
- 대격변이 가까워지고 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런 것 같구나. 카르타고.”
- 갈라진 세계는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갈라진 세계란 무얼 말하는 것이더냐.”
- 알고 있지 않은가. 승천(昇天)의 전장을 고대하는 자여.
바토리의 눈빛이 꿈틀댔다.
카르타고의 안광이 아틸라를 향했다가, 다시 바토리에게 돌아왔다.
- 다가올 승천의 전장은 신계(神界)가 아닐 것이다.
아에스투스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 * *
아틸라는 꿈을 꾸었다.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그를 둘러싼 세계는 변함이 없었다.
밤처럼 어두운 세상.
아니, 밤과는 다르다.
분명 자신은 어딘가에 발을 디디며 서있건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
아틸라는 자신의 발을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자그만 운동화.
그러고 보니 손도 작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야만전사는 이곳에 없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아.’
고개를 돌렸다.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사내.
김도현은 그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를 향해 달렸다.
그러자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빛의 점이 사방으로 떠올랐다.
그것이 김도현의 머리칼과, 자그만 코와,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을 스치며 제 위치를 찾아갔다.
김도현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의 손은 크고 단단하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봤다.
그러나 어떻게 시선을 돌려도,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도현아. 저것 보여?’
아버지의 손가락은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빛의 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건 모두 별이야.’
‘별이요?’
‘응. 세상엔 정말로 많고 많은 별이 존재해. 우리 같은 존재는 감히 헤아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우와…….’
‘우리가 머무르는 지구 역시도 저 많은 별 중 하나에 불과하지. 어때. 이렇게 보니 정말로 작지 않아?’
‘우리가 이렇게 작은 세계 속에서 산다고요? 정말요?’
‘응. 그렇지만 조금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별은 작지만 작지 않은 세계야. 공간의 크기라는 건 그렇게 구상(具象)적인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김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는 웃었다.
‘도현아.’
‘네?’
‘아버지는 머지않아 도현이의 곁을 떠나야 해.’
‘네? 왜요?’
‘이곳은, 이 지구는 아버지가 살아갈 곳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그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김도현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었다.
‘그리고 너 역시도, 머지않아 너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그럼 엄마는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엄마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을 거야.’
‘왜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김도현은 아버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김도현은 불안해졌다.
‘그런 거 싫어요. 아버지도, 엄마도 계속 여기서 함께 살면 안 돼요?’
‘언젠가 너도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아버지는 헝클었던 김도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김도현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오늘의 아버지는 이상했다.
김도현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억하게 될 거야. 네가 진짜 세상으로 오게 되면. 그래서 너 자신을 조금씩 되찾게 되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동굴 안의 울림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김도현은 눈꺼풀을 깜빡여 눈의 초점을 잡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제서야 볼 수 있었다.
길게 자란 흑발.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 아래 드러난 강인한 입매.
김도현은 그 얼굴이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땐 반드시.’
미소하는 그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바토리를 지켜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