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밤의 숲 (2)
아틸라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부드득, 어금니가 맞부딪쳤다.
흐르던 땀이 기화하며 체온을 앗아갔다.
아틸라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려워하는 건가. 단지 흥분했을 뿐인가.’
정답은 그도 몰랐다.
카르타고와의 첫 대결 당시, 아틸라의 의식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틸라의 정신은 카르타고와의 대결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육체는 그날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신의 근육이 예민해졌다.
발달된 감각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아틸라는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마음속 무언가가 그것을 막았다.
지금 무기를 꺼내려 하면 상대의 검이 쏘아질 것이다.
자신의 움직임보다, 더욱 빠르게.
- 강해졌군. 버서커 아틸라.
카르타고의 손엔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틸라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시체의 산 위에서 수십 자루의 무기를 쥐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역시 그런 것 같군.”
아틸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카르타고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강해졌다.
- 그래서 아에스투스를 환수로 길들일 수 있었지.
카르타고가 타고 온 드래곤은 아에스투스였다.
아에스투스는 블루 드래곤이었을 때의 모습을 대부분 잃었다.
표정 없는 눈동자.
원래보다 작아진 몸체.
온몸에서 뿜어내는 짙은 마기.
- 너는 물의 정령왕을 만난 모양이군.
“받아 낼 물건이 있었으니까.”
- ‘나이아드의 눈물’ 말인가.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카르타고의 안광이 엷게 진동했다.
아틸라의 눈엔 그 모습이 웃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너를 만나고 싶었다. 넌 나의 대적자이자 나의 옛 모습을 반추하고 있으니까.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 버서커 아틸라. 너와 샤를 아인하르트는 나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는 존재다.
아틸라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생전의 카르타고는 버서커였다.
광폭의 권능을 일깨운 자신처럼.
‘또한 지금의 카르타고는.’
데스나이트로 부활해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
요정의 피에 억눌려 있던 악마의 피를 서서히 개화 중인 샤를처럼.
- 샤를 아인하르트는 강해졌다.
“샤를을 만난 건가.”
- 남쪽의 패왕 샤를 아인하르트는 발루아 왕국 흡수에 성공했다. 그는 발루아, 노르드, 후마이야, 아스투리아의 4개 왕국을 통합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디일 것 같은가.
“나바라 왕국이겠군.”
- 샤를 아인하르트는 힘을 모으고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는 남부 왕국을 통일하는 것에 성공할 것이다. 이후 그는 북쪽의 대제국을 노릴 것이다.
아틸라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원작에서의 샤를은 남부 왕국을 통일하고,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 너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버서커 아틸라.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카르타고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이 달라졌다는 건가.”
- 너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다. 대륙엔 대격변의 전조가 일어나고 있다.
“명계의 보석으로 나바라 왕국을 혼란에 빠뜨린 건 네 짓인가.”
카르타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 그때의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난 드라코니안의 힘을 경험할 수 있었고, 아에스투스의 속박에 성공했으니까.
“뭐라고?”
- 나의 ‘일부’에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브레스를 선사하지 않았는가. 버서커 아틸라.
아틸라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아틸라는 나바라 왕국에 등장했던 키메라를 기억했다.
그 키메라를 추격하며 등장했던 데스나이트를 기억했다.
“역시 그 데스나이트는.”
- 그렇다. 그것은 나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명계의 보석은.”
- 나의 일부의 ‘그림자’다.
아틸라가 입술을 이죽댔다.
“바토리가 말하더군. 나바라 왕국에 등장했던 검은 보석은 ‘그림자’라고. 또한 그것은 원래 마계에 있었던 물건이라고도 했지.”
- 그렇다. 검은 보석은 원래 마계의 물건으로, 정확한 이름은 ‘벨리알의 눈’. 무가치(無價値)의 악마 벨리알의 작품이다.
벨리알(Belial).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고위악마로.
원래는 주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다섯 신 중 하나였으나, 주신 전쟁 때 반기를 들며 악마가 된 존재다.
“넌 그 보석을 어떻게 손에 넣었지?”
- 벨리알이 직접 건네주었다. 그는 내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난 그것을 행해 주는 대가로 ‘벨리알의 눈’을 손에 넣었다.
“벨리알이 원하는 것이라.”
- 그는 다가올 대격변을 대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초월적 존재들이 대격변의 전조를 자각하고 있다.
“대격변이란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거지?”
- 그것에 답하기 전에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군.
“무엇을 말인가.”
- 너와 샤를 아인하르트 중 누가 더 나의 대적자에 어울리는 존재인지에 대한.
아틸라의 눈보다 빠르게 변화를 감지한 건 그의 날카롭게 곤두선 촉각이었다.
등줄기로 차가운 소름이 돋아나는 순간 아틸라는 흑철검을 들었다.
그것이 카르타고의 검과 부닥쳤다.
파캉!
아틸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틸라는 방금 전에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위험을 감지한 촉각이 흑철검을 들게 했고, 그와 동시에 아에스투스의 몸 위에서 카르타고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벼락이 쳤다.
“크으윽……!”
악다문 잇새로 신음성이 터졌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아틸라는 어깨가 빠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 대단하군 버서커 아틸라. 샤를 아인하르트는 지금의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했었다.
카르타고는 지면에 서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등에 올라 있을 때보다 오히려 커다랗게 보였다.
입가의 핏물을 닦으며 아틸라가 웃었다.
“샤를과 한바탕 날뛰고 온 모양이군. 카르타고.”
- 그 탓에 그는 나바라 왕국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있다.
아틸라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샤를이 부상당한 건가.”
- 회복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테지.
[ 돌진(突進) ]
아틸라는 카르타고에게 돌진을 시전했다.
어느새 그의 손엔 무휼이 쥐여 있었다.
‘흑철검과 흑철방패는 카르타고에게 통하지 않는다.’
카르타고와의 첫 대결에서, 흑철검과 흑철방패는 완전히 망가졌었다.
카앙!
내뻗은 무휼과 카르타고의 검이 충돌했다.
이번에도 아틸라의 몸이 밀렸다.
아틸라는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 방어 태세 ]
[ 방어력이 20% 증가하고, 공격력이 20% 감소합니다. ]
[ 모든 마법과 독,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10% 증가합니다. ]
다른 손에 드라칼리온을 쥐었다.
방어 능력을 향상시키고, 보조 무기 숙련도를 이용해 공격에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 보조무기 숙련도가 20% 증가합니다. ]
- 드라칼리온.
카르타고의 검에서 흑빛 오러가 타올랐다.
지금까지 카르타고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무휼과 드라칼리온, 카르타고의 흑빛 오러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카르타고의 오러는 강력했다.
그러나 무휼과 드라칼리온 또한 평범한 무기는 아니었다.
- 버서커 아틸라. 너는 샤를 아인하르트보다 강하다.
카르타고의 안광이 뜨겁게 타올랐다.
- 그러나 그건 샤를 아인하르트가 망가진 오른팔을 지니고 있는 탓이지.
카르타고는 샤를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 카르타고는 샤를을 찾았고, 그와 대결했다.
승부는 길지 않았다.
샤를은 강했지만 카르타고는 더욱 강했다.
카르타고는 샤를의 오른팔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
평범한 검사라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샤를에겐 더없이 커다란 문제다.
- 그는 망가진 오른팔을 복구할 필요가 있다.
카르타고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카르타고와 검을 맞대며.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첫 전투 때도 그랬다.
카르타고는 자신과 샤를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광폭의 권능에 사로잡힌 자신의 의식을 원래대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자신과 샤를이 그의 대적자이기 때문인가.
그가 말한 대로, 자신과 샤를이 그의 과거와 현재를 반추하게 만들기 때문인가.
정답은 모른다.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카르타고가 눈앞에 나타났고, 여전히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
그렇다면 그것을 이용할 뿐이다.
아틸라는 즉흥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에 새로운 스킬 ‘위치 전환’이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아틸라는 카르타고에게 접근하며 무휼을 뻗었다.
그리고 시전했다.
[ 위치 교환 ]
눈앞이 일순 흐려지는가 싶더니 주위 풍경이 180도 회전했다.
아틸라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카르타고가 서 있던 위치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카르타고는 아틸라가 있던 위치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아틸라는 방어 태세를 해제하고 검투 태세로 전환했다.
[ 검투 태세 ]
그 순간 밀려든 카르타고의 일격이 아틸라를 크게 밀려나게 만들었다.
방어 태세로 증가했던 방어력 20퍼센트와 마법 저항력 10퍼센트.
그것이 사라진 차이는 컸다.
그러나 아틸라가 노린 상황이었다.
카르타고와 간격이 벌어지자마자 아틸라는 뒤돌아 아에스투스를 향해 달렸다.
순식간에 카르타고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쿨타임이 돌아온 돌진 스킬이 있었다.
[ 돌진(突進) ]
파아앙!
아틸라의 신형이 아에스투스의 턱 앞에 다다랐다.
아틸라는 나이아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나이아드의 눈물은 아에스투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 물건을 대가로, 아에스투스를 중간계로 소환했던 거니까요.
또한 아틸라는 기억했다.
이무기를 쓰러뜨리고, 야영지로 향하는 길에 라쿠나가 했던 말을.
‘아에스투스가 절 습격했을 때, 그의 입안에서 새까만 보석을 봤었습니다. 처음엔 명계의 검은 보석일 거라 생각했지만, 혹시 어쩌면 그건…….’
확실하진 않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것에 가능성을 걸었고, 아에스투스의 앞에 도달했다.
무언갈 느낀 카르타고가 아에스투스를 허공으로 띄웠다.
그 간발의 차로 아틸라는 아에스투스에게 닿지 못했다.
- 무얼 하려는 속셈인가. 버서커 아틸라.
아에스투스는 이미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그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뭐긴. 이런 거지.”
[ 도약(跳躍) ]
아틸라의 신형이 하늘로 솟았다.
순식간에 아에스투스의 코앞에 오른 아틸라는 녀석의 이빨 사이에 무휼을 박고 아가리를 벌렸다.
지상에 있는 카르타고는 그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었다.
아에스투스가 하늘 위로 오른 건 오히려 아틸라를 돕는 것이었다.
부드드드득!
벌어진 아에스투스의 아가리 사이로 검은 보석이 보였다.
완전한 검은 보석은 아니다.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아틸라는 손을 뻗어 보석을 쥐었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 나이아드의 눈물 ]
한편 카르타고는 의지를 발현해 아에스투스를 하강시키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도약의 상승을 지속 중인 아틸라의 몸은 아에스투스를 강제로 하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아틸라는 해야 할 일을 마쳤다.
고개를 돌렸다.
아에스투스의 아가리 사이로 보이는 지면과, 이쪽을 주시하는 카르타고를 봤다.
“이제 내려가 볼까.”
아틸라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 타점을 특정합니다. ]
타점은 카르타고의 투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