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물의 정령왕 (4)
나이아드가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군요. 바토리 에르제베트.
“오랜만이구나.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야.”
둘의 인사에 라쿠나는 놀랐다.
‘바토리와 나이아드가 서로 아는 사이라고?’
나이아드의 눈이 라쿠나를 향했다.
- 그대는 청색 마탑의 수련자, 야르미로군요. 쿨리가 직접 찾아오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죽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탑주께서는 중앙 마탑의 소환을 받으셨습니다.”
- 그렇군요.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들의 구심점인 중앙 마탑의 소환이라.
나이아드가 고개 돌려 아틸라를 바라봤다.
- 당신은.
나이아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 당신이 바로,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함께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를 물리친 인간 전사로군요.
아틸라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아틸라.”
- 반갑습니다. 인간 전사 아틸라.
“나도 있다!”
도롱뇽이 펀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외쳤다.
나이아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처음으로 일행 앞에 고개를 숙였다.
- 용중용이라 불리는 ‘드라코니안(Drakonian)’을 직접 마주할 날이 올 줄이야.
나이아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드라코니안이시여. 그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끄러! 먼저 명계의 보석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나 해 봐!”
직립한 도롱뇽이 양 허리에 앞발을 얹으며 으름장을 놨다.
한편 라쿠나의 눈은 거의 뽑아질 것처럼 커져 있었다.
저 위대한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를 고개 숙이게 하는 존재.
게다가 나이아드는 도마뱀을 이렇게 불렀다.
‘드라코니안이라고?’
그제서야 라쿠나는 떠올렸다.
아틸라와 바토리의 협공에 하늘로 도망친 블루 드래곤.
그 블루 드래곤을 추격하는 아틸라의 발아래로 펼쳐졌던 검은 날개.
‘서, 설마!’
분명했다.
저 도마뱀이.
‘그때의 그 드래곤이다!’
게다가 나이아드는 저 드래곤을 용중용(龍中龍), 드라코니안이라 불렀다.
나이아드가 말했다.
- 얼마 전 대호수에 검은 기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명계의 힘을 사용해 물의 기운을 오염시키기 시작했지요. 많은 물정령들이 그들에게 대항했지만 부상만을 입은 채 수면 아래로 도망쳤습니다. 개중엔 도주에 성공하지 못한 작은 정령들도 있었죠.
“운디네.”
아틸라의 말에 나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신과의 계약에 의해 이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계에 직접적인 실력을 행사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가 나선 것인가.”
- 그렇습니다.
아에스투스는 나이아드와 물의 힘으로 연결된 사이.
나이아드는 정신의 언어를 발해 아에스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아에스투스를 부르는 것엔 대가가 필요했고.
그래서 나이아드는 자신의 힘이 강력하게 새겨긴 ‘어떤 물건’을 이용했다.
아에스투스는 나이아드의 부름에 답했다.
오랜 시간 용계(龍界)에 머물러 있던 아에스투스는 중간계로 진입했고, 대호수로 날아왔다.
키랴랴랴랴랴랴!
아에스투스는 검은 기사들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검은 기사들은 힘을 모아 아에스투스에게 대적했다.
그러나 아에스투스는 강력한 드래곤이었고, 검은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자’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기사들보다 커다란 군마.
검붉은 갑주.
같은 빛의 투구 뒤로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사내.
아틸라가 부드득, 이를 악물었다.
“버서커 카르타고.”
아에스투스는 놀랐다.
새로이 나타난 검은 기사는 무시무시한 강자였다.
- 너는.
‘나의 이름은 버서커 카르타고.’
- 명계로 추락한 망자가 어찌하여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너 역시 용계에서 하릴없이 뒹굴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 중간계는 신들께서 안배하신 낙원. 명계의 힘에 물든 너희가 머무를 곳이 아니다.
‘나이아드가 네게 도움을 청한 것인가.’
- 그렇다.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군 나이아드. 그리고 아에스투스.’
- 뭐라고?
그 순간 카르타고의 몸에서 강력한 마기가 발산했다.
위험을 직감한 아에스투스가 대호수 위로 몸을 띄웠다.
그러나 그것 또한 카르타고의 노림수였다.
촤르르! 촤륵! 촤르르르륵!
수면에서 시커먼 마기의 사슬이 쏘아졌다.
그것이 아에스투스의 몸을 포박했다.
- 너는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
‘그렇다.’
카르타고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검은 기사들에게 덤볐던 물정령들.
그들은 단순히 검은 기사들에게 밀려 대호수로 도주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몸엔 명계의 사악한 마력이 심어졌다.
그것이 타락한 물정령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바로 지금, 주인의 명에 따라 아에스투스를 속박했다.
- 고작 이 정도 힘으로 날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는가!
분노한 아에스투스가 날개를 휘둘렀다.
검은 기사들의 손에서도 속박의 사슬이 쏘아졌다.
그것이 아에스투스의 해방을 지연시켰다.
- 벌레 같은 놈들!
그러나 아에스투스는 위대한 블루 드래곤.
태풍 같은 날갯짓이 속박의 사슬 모두를 끊어 냈다.
그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력한 속박의 힘이 아에스투스의 목을 휘어감았다.
카르타고였다.
- 네 이놈 사악한 힘에 물든 망자야!
아에스투스가 브레스를 뿜었다.
카르타고는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사슬을 당기며 그것을 회피했고.
휘리리릭.
눈 깜짝할 사이에 아에스투스의 등에 내려앉았다.
‘이것으로 끝이다. 아에스투스.’
카르타고의 검이 아에스투스의 심장에 박혔다.
키랴랴랴랴랴랴!
아에스투스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브레스를 뿜었다.
그것이 몇 명의 검은 기사를 불태웠다.
카르타고는 아에스투스의 심장에 박힌 검을 놓지 않았다.
괴롭게 몸을 뒤틀던 아에스투스가 지면으로 추락했다.
- 너는. 너는 대체 무슨…….
배를 드러내며 누운 아에스투스를 내려보며 카르타고는 웃었다.
투구 속에 드러난 푸른 안광이 예기를 뿜었다.
카르타고의 몸에서 발하는 가공할 마기가 그의 검을 타고 아에스투스의 심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아에스투스의 시야가 검게 변했다.
‘아에스투스. 이제부터 너는.’
카르타고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나의 환수다.’
* * *
믿을 수 없다는 듯 라쿠나가 외쳤다.
“그, 그런! 정말로 아에스투스와 검은 기사가 그런 전투를 벌였다면 흔적이 남았을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몇 차례에 걸친 조사에서도 그런 흔적은……!”
- 대호수는 넓습니다. 아마도 그대는 청색 마탑에서 가까운 쪽의 호수를 조사했을 테지요.
“그, 그건……!”
- 검은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청마탑과 반대편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버서커 카르타고의 노림수였겠지요.
“버서커…… 카르타고…….”
라쿠나가 중얼거렸다.
버서커 카르타고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크리엘도라 남부 대륙 역사상 최강의 전사라 불렸던 사내.
“그자가 어떻게…….”
“우린 이미 버서커 카르타고와 전투를 치른 적이 있다.”
바토리의 목소리였다.
그 이야기는 라쿠나보다 나이아드를 더욱 놀라게 했다.
- 그것이 사실입니까.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렇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 라쿠나를 제외한, 이곳에 있는 모든 이와 남부의 패왕이라 불리는 샤를 아인하르트까지 힘을 합쳐 카르타고를 상대했다. 그럼에도 그를 완전히 소멸시킬 순 없었지.”
- 버서커 카르타고는 이미 반신의 경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를 막으려면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할 테지요.
나이아드의 눈이 도롱뇽을 바라봤다.
- 용중용. 드라코니안이시여.
도롱뇽이 나이아드의 시선을 피했다.
“난 힘을 잃었다. 바토리 할망구보다 더욱더.”
-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대는 ‘그분’의 핏줄이시지 않습니까. 그분께 도움을 청한다면.
도롱뇽이 버럭 성을 냈다.
“그 입 닥쳐라 하등한 콧물 새끼! 이프리트 그 촛불 새끼처럼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기 전에!”
작은 덩치였지만 순간적으로 발하는 기운은 매서웠다.
나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틸라가 말했다.
“난 원하는 게 있어 이곳에 왔소.”
- 말해 보십시오. 인간 전사 아틸라.
“나이아드의 눈물이 필요하오.”
나이아드의 표정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그러나 금세 처음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버서커 카르타고를 쓰러뜨릴 생각이오. 아니, 그것을 넘어 훗날 닥쳐올 대격변을 대비할 계획이지.”
- 대격변이라고요.
“버서커 카르타고와 싸웠던 날, 그가 내게 말했소. 머지않아 거대한 변화가 현세를 덮칠 거라고. 돌이킬 수 없는 대격변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고.”
아틸라의 눈이 라쿠나를 향했다가, 다시 나이아드에게로 돌아갔다.
“이곳 대호수에서 벌어진 사건 이전에, 샹크리스 왕국의 바라키엘 신전에선 마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생성됐었소. 또한 나바라 왕국에선 명계의 보석에 지배 당한 궁정 마법사 리샤르 세바스찬이 적마탑을 무너뜨린 사건이 벌어졌지. 이것들은 모두 카르타고가 예언했던 대격변의 전조일 가능성이 높소.”
아틸라의 눈빛이 깊어졌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 난 다가올 대격변을 대비할 생각이오. 그러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 그중 하나가 바로.”
- ‘나이아드의 눈물’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소.”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나이아드가 입을 떼었다.
- 아쉽지만 나이아드의 눈물을 그대에게 넘길 순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에 아틸라가 무휼과 드라칼리온을 뽑아들었다.
“난 힘으로라도 빼앗을 생각이오.”
“그, 그게 무슨!”
라쿠나가 경악해 소리쳤다.
아틸라 일행이 이곳을 찾은 것엔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나이아드의 눈물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힘으로 빼앗을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서두르지 마십시오. 난 그대에게 그것을 넘기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말장난이라도 할 셈인가.”
- 아닙니다. 나이아드의 눈물은 나의 수중에 있지 않습니다.
“뭐라고?”
- 나이아드의 눈물은 아에스투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 물건을 대가로, 아에스투스를 중간계로 소환했던 거니까요.
그랬다.
나이아드가 용계에 있던 아에스투스를 소환하기 위해 사용했던 ‘어떤 물건’.
그것이 나이아드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 나이아드의 눈물은 아에스투스가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힘이 아에스투스의 타락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라쿠나는 다시금 떠올렸다.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가 자신에게 브레스를 쏘려 했을 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보였던 검은 보석.
라쿠나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것은 검은 보석이 아니라……!’
-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인간 전사 아틸라. 버서커 카르타고를 쓰러뜨리고 아에스투스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그것에 성공한다면 나이아드의 눈물은 그대에게 양도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아틸라의 눈앞에 생각지도 않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 정령왕 시나리오가 이어집니다. ]
[ 두 번째 임무 ]
[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를 제압하고, 사악한 마물로 가득한 대호수에서 탈출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