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213화 (213/425)

213. 물의 정령왕 (3)

라쿠나는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호수의 색이…… 검어졌어?”

전체가 검게 변한 건 아니다.

마치 투명한 액체 속에 검은 염료를 듬성듬성 뿌려 놓은 것처럼, 호수는 얼룩덜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맑았던 호수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다니.

“서두르는 게 좋겠군. 라쿠나.”

아틸라의 말에 라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타락한 블루 드래곤이나 물정령은 보이지 않았다.

라쿠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심장을 둘러싸며 마력이 응집했다.

고오오오오.

라쿠나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이 주문은 다른 마법에 비해 높은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이윽고 라쿠나의 입에서 주문이 영창됐다.

우우웅.

라쿠나를 중심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파동이 발산했다.

라쿠나는 눈을 감은 채 대호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자처럼 보일 만한 광경.

이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콰콰콰콰콰!

호수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라쿠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멍은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발산하는 마력의 파동에 맞춰 거대한 나선을 그렸다.

아틸라에겐 그 모습이 마치 엄청나게 커다란 투명 드릴이 호수의 벽을 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라쿠나가 눈을 뜨며 말했다.

일행은 라쿠나가 발하는 파동 속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파동은 호숫물만을 밀어낼 뿐, 아틸라 일행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귀, 귀가 좀 울리는 것 같소!”

“영주 나리도? 나도!”

오토와 카스피가 귀를 주무르며 외쳤다.

아틸라가 말했다.

“적응해라. 대호수 아래로 내려갈수록 강한 수압까지 더해질 거다.”

일행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라쿠나가 다른 주문을 읊었다.

일행의 주위로 거대한 구 모양의 벽이 생성됐다.

“파동의 끝을 경화(硬化)했습니다. 이렇게 해둬야 물속에서 발을 디디며 걸을 수 있으니까요. 또 예기치 않은 침입자의 습격도 막을 수 있습니다.”

라쿠나가 발을 움직였다.

일행도 그녀를 따라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듯 그들의 몸이 호수 아래로 꺼져갔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주위를 두리번대던 카스피가 바락 소리쳤다.

“아악! 벼, 변태 영주 나리가 내 엉덩이 만졌어!”

“시, 시시시, 실수요!”

“역시 영주 나리가 범인이었어! 에잇!”

“케헥!”

오토가 목을 부여잡으며 켁켁댔다.

이런 어둠 속에서도 카스피는 오토의 목을 정확하게 노렸다.

“심상치 않구나. 대호수 안이 이렇게까지 어둡다니.”

바토리의 말에 라쿠나가 긍정했다.

원래 대호수 안에는 많은 정령들이 스스로 빛을 내며 유영한다.

그래서 호수 아래로 진입하면, 마치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정령광(精靈光)들이 반짝인다.

그런데 이 정도 수심까지 내려왔는데도 정령광은 보이지 않았다.

“조명이 필요하겠구나.”

바토리가 작고 동그란 발광체를 만들어 띄웠다.

그제서야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휴. 이제 살았네. 근데 마법사 아가씨. 나이아드의 신전까진 아직 먼 거요?”

“저도 신전엔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엥? 뭐, 뭐요? 그럼 어떻게 가겠다는 거요!”

“전 그저 나이아드의 기운을 감지하며 움직일 뿐입니다. 나이아드께서 우리와의 만남을 원하신다면, 신전에 도달할 수 있겠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오토가 중얼거렸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수.”

오토만이 아니었다.

바토리, 카스피, 라쿠나, 심지어 아틸라마저도 호흡의 곤란을 느꼈다.

[ 산소가 부족합니다. ]

그때였다.

쿵.

무언가 파동의 벽에 부닥쳤다.

고개 돌린 일행은 그것이 검은 기운으로 뒤덮인 물고기라는 것을 알았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오염된 물고기들이 거칠게 벽을 두드렸다.

점차 커다란 녀석들이 몰려왔다.

크게 벌어진 아가리에서 송곳니가 드러났다.

“우릴 먹잇감으로 인식하는 것 같구나.”

오염된 물정령들도 보였다.

물고기와 물정령들의 공격은 점점 거세졌다.

그것이 경화된 파동의 벽을 찌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아틸라가 검을 뽑았다.

오토와 카스피도 각자의 무기를 들었다.

바토리가 만류했다.

“기다리려무나. 야만전사야.”

아틸라가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는 싱긋 미소하며 라쿠나를 곁눈질했다.

“저 아이가 해결할 것이니라.”

“라쿠나가?”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청마탑 서열 4위 라쿠나 야르미는 물론 강력한 마법사다.

아틸라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정체를 알아봤을 정도로.

하지만.

‘이 시기의 라쿠나는 그리 강하지 않다.’

라쿠나는 수오미 왕국을 덮친 아인하르트의 마법사, 제롬 아그리피나를 만나며 강자로 거듭난다.

아틸라는 라쿠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현재 발현 중인 파동의 마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보였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바토리. 전 파동의 마력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결 방법을…….”

“해결 방법이라. 난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네가 이 상황을 반전시키지 않으면, 우린 물고기밥이 될 거란 말이지.”

물끄러미 바토리를 보던 아틸라가 검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오토와 카스피도 무기를 집어넣었다.

라쿠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이런 상황에 나만을 믿고 가겠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는 와중에도 물고기와 물정령들은 파동의 벽을 공격했다.

벽이 찌그러지고,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곳으로 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히익! 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니요!”

라쿠나는 조급해졌다.

바토리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바토리는 작금의 상황을 도우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라쿠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었다.

불시에 찾아든 극한의 상황이 의식의 밀도를 높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라쿠나는 자신의 마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장을 휘돌던 마력이 무언가의 형상을 갖췄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라쿠나는 자신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선명한 형태를 감각했다.

그것은 문이었다.

‘문!’

라쿠나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문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라쿠나는 알고 있었다.

라쿠나는 자신의 의식 속으로 완전히 진입했다.

마치 대호수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라쿠나는 문이 발하는 기운을 추적하며 헤엄쳤다.

손을 뻗었다.

문고리가 쥐여졌다.

문이 열렸다.

고오오오오오.

문 안의 공간은 더욱 밀도가 높았다.

라쿠나의 의식이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마법을 수련하는 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그러나 대부분의 마법사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

‘나만의 마법 세계.’

그랬다.

라쿠나는 자신의 마법 세계를 구축했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라쿠나에게도 깨달음의 방문은 갑작스러웠다.

라쿠나는 직감했다.

이틀 전, 마을 여관에서 바토리를 찾았을 때.

그녀가 자신의 의식 안에 어떤 실마리를 건네주고 갔다는 것을.

라쿠나는 눈을 떴다.

바토리를 돌아봤다.

“대단하구나.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바토리는 미소하고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이런 일을…….”

“난 별달리 한 일이 없다. 넌 이미 너의 마법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고, 다만 길을 잃었을 뿐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내가 한 일이란 네 의식 속에 이정표를 심어 넣고, 굳게 닫힌 너의 마법 세계의 문을 아주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바토리가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어찌하겠느냐 라쿠나.”

쿵. 쿵. 쿵쿵. 쿵쿵쿵.

세차게 벽을 두드리는 호수의 괴물들.

이미 벽은 구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찌그러졌다.

사방의 구멍에서 액체가 밀려들어 일행의 옷을 적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저 라쿠나를 보고만 있었다.

라쿠나는 바토리를, 그리고 아틸라를 바라봤다.

라쿠나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의 눈에 강력한 물의 기운이 새겨졌다.

심장으로 집약된 마력을 더욱 강하게 방출했다.

콰콰콰콰콰콰콰!

무너지던 파동의 벽이 보수됐다.

그뿐만이 아니라 더욱 공간이 넓어졌다.

벽을 공격하던 물고기와 물정령들이 그 반발력에 크게 튕겨났다.

놈들은 쉬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일행에게 헤엄쳐왔다.

그러나 여러 차례 몸을 부딪쳐 벽이 견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엔 아쉽다는 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아! 저,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오토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어나 걸어라. 쉴 틈 같은 건 없다.”

아틸라의 타박에 오토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러면서 말했다.

“어라? 숨쉬기가 좀 수월해진 것 같소?”

“파동의 공간이 넓어지지 않았느냐. 그만큼 마실 수 있는 공기가 늘어난 거란다. 아울러 공기의 질도 좋아진 것 같구나.”

바토리의 말에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쿠나를 보며 말했다.

“대단하군. 라쿠나.”

아틸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원작에서 제롬을 만나며 한 단계 높은 성취를 이루는 라쿠나 야르미.

그러나 지금은, 바토리를 만나 그 이상의 성취를 이룬 듯했다.

마치.

‘바토리를 만나 더욱 강해진 제롬처럼.’

머지않아 바닥면이 드러났다.

그리고 보였다.

“저, 저것 봐 영주 나리!”

바토리는 잡기술로 만든 발광체를 소멸시켰다.

그럼에도 일행은 주위의 풍경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정령광(精靈光)이었다.

“호, 호수 속에 밤하늘이 떠 있는 것 같소! 살쾡이 암살자!”

“흐에에엣!”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검푸른 빛을 내는 호수 속에서 유성처럼 흩날리는 정령광.

“아직 바닥 깊숙한 곳까진 명계의 마력이 침투하지 못한 것 같군.”

“그런 것 같구나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이어 말했다.

“나이아드의 신전이 보이는구나.”

그것은 신기루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오래전 이프리트의 성역을 찾았을 때처럼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은 호수 바닥에 내려섰다.

주위를 살피던 라쿠나는 잠시 후 파동의 마력을 거두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토가 기겁했지만, 숨 쉬는 것에 무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해졌다.

“와, 신기해. 물로 된 천장이라니.”

카스피가 머리 위를 보며 중얼댔다.

그녀의 말대로 호수 밑바닥엔 물이 없었다.

대략 높이 3미터 정도로 보이는 공기의 층이 존재했고, 그 꼭대기에 호숫물로 이뤄진 드넓은 천장이 있었다.

바토리가 웃으며 말했다.

“나이아드가 제법 손님 대접을 할 줄 아는 게로구나.”

일행은 신전을 향해 걸었다.

신전의 키는 공기의 층보다 더욱 높았기에, 꼭대기 부근은 굴절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신전의 출입문은 저절로 열렸다.

문 안으로 진입하자 쾌적한 공기가 일행을 반겼다.

“여긴 물이 아예 없는데?”

카스피가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저만치 깊숙한 곳에 운디네를 닮은, 그러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인어의 형상이 보였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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