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물의 정령왕 (1)
“저, 저게 뭐요!”
오토가 기겁하며 외쳤다.
오토의 놀라움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라쿠나와 청마탑 사이를 가로막은 수면이 갈라지고 있었으니까.
“이, 이게 말이 돼?”
카스피도 입을 쩍 벌리며 길고 긴 호수의 가르마를 바라봤다.
갈라진 수면의 틈새로 청색 벽돌의 다리가 돋아났다.
오토와 카스피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라쿠나는 조금은 으스대는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기대 이상의 표정을 보이는 오토와 카스피와는 달리.
아틸라와 바토리는 엷은 미소만을 입가에 띄울 뿐이었다.
“우리가 건너갈 때까진 안전합니다. 안심하고 따라오시길.”
라쿠나가 앞장섰고, 아틸라 일행이 뒤를 따랐다.
‘영주 나리! 저것 봐! 물고기가 날 쳐다보고 있어!’
‘히익! 이러다 갑자기 물이 쏟아지면 우리 다 뒈져 버리는 거 아니요!’
‘흐에엣! 왜 그런 무서운 소릴 하고 그래!’
커튼처럼 좌우를 드리운 호수의 벽.
그것을 보며 아틸라는 물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쿠아리움 같군.’
아틸라, 아니 김도현은 어릴 적 아쿠아리움에 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그날, 어머니가 지었던 행복한 표정.
‘그때의 어머니는 건강하셨지.’
아틸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왜지.’
아버지는 김도현이 어릴 적 집을 떠났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일행은 마탑 입구에 도착했다.
바토리가 물어왔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일 아니다.”
갈라졌던 수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라쿠나가 말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모양이군요.”
일행은 라쿠나의 안내를 받으며 마탑으로 들어갔다.
청마탑 내부는 적마탑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하얀 벽돌 위에 푸른 장식이 조화롭게 양각된 실내.
보고만 있어도 시원한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바토리. 포획한 운디네들을 넘겨주십시오. 바로 탑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까요.”
“여깄단다.”
바토리는 군말 없이 그것을 넘겼다.
일행은 널찍한 방으로 안내됐고, 라쿠나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틸라는 펀치의 인벤토리에서 술병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펀치의 인벤토리는 다섯 칸이 되었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먹음직한 음식이 배달됐다.
물 속성을 연구하는 적마탑답게 음식은 대부분 해산물이었다.
배불리 식사를 한 일행은 저마다 침대, 소파, 바닥 등 편한 곳에 드러누웠다.
똑똑, 노크 소리가 일행을 깨웠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창밖엔 별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라쿠나였다.
그녀의 옆엔 노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청마탑의 탑주, 쿨리 야르비요.”
쿨리가 이어 말했다.
“먼저 라쿠나를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군. 대략적인 이야기는 라쿠나를 통해 들었소. 운디네는 어떤 사악한 마력에 오염된 것 같더군. 라쿠나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그 사악한 힘의 근원을 ‘명계의 보석’이란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 같소만, 사실이오?”
“그렇소.”
아틸라가 답했다.
쿨리의 눈이 오토를 돌아봤다가, 다시 아틸라에게 고정됐다.
“나바라 왕국의 오토마이어 왕과, 그 일행이시라 들었소. 수오미 왕국을 찾은 이유에 대해 물어도 되겠소?”
“우리 용건보다는 그쪽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군. 우릴 이곳에 초대한 건 거기 있는 라쿠나 야르미니까.”
아틸라는 자신의 목적을 먼저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쿨리가 무얼 요구할지 알 수 없었고.
또한 예상대로 일이 풀려 간다면, 도리어 보수를 받으며 목적을 이룰 수도 있을 테니까.
쿨리가 말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소.”
“말해 보시오.”
“이번 사건의 해결을 위해 청마탑에선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를 찾기로 했소. 허나 나이아드는 대호수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아틸라는 속으로 미소했다.
이야기의 진행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쿨리가 이어 말했다.
“나이아드를 만나려면 특별한 마법이 필요하오. 지금 청마탑에서 그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지. 회의 결과, 우린 라쿠나에게 이번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했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라쿠나의 호위를 맡아 줄 수 있겠소?”
아틸라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아틸라는 짐짓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당신은 우릴 오늘 처음 보았소. 그런데 그런 막중한 임무를 떠나는 라쿠나의 호위를, 실력도 검증되지 않은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거요? 청마탑엔 충분히 다른 적임자가 있을 거요.”
“그대들의 실력은 라쿠나를 통해 충분히 들었소. 그리고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검증했지.”
“다른 믿을 만한 사람?”
“나다. 아틸라.”
익숙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곳엔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 미소하며 서 있었다.
“라일 플라마.”
“오랜만이군 아틸라. 바토리.”
바토리도 미소하며 라일을 바라봤다.
라일의 눈이 오토와 카스피에게 돌아갔다.
“오랜만입니다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 그리고 카스피.”
라일은 오토에게 걸어가 악수를 청했다.
라일과 오토는 단순히 옛 동료 사이가 아니다.
둘은 각각 적마탑과 나바라 왕국의 수장으로서, 한배를 탄 동맹 관계.
오토도 라일의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이오. 라일 플라마 탑주.”
“여행은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적마탑 재건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소.”
“염려 마십시오. 로잘린 경과 라시드 님이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라시드의 이름을 언급하며 라일은 카스피를 바라봤다.
카스피가 토끼 같은 눈을 뜨며 물었다.
“아, 아빠는 건강한 거야?”
라일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가 물었다.
“라일. 왜 네가 청마탑에 있는 거지?”
“중앙 마탑의 호출이다.”
“중앙 마탑의?”
“그래. 청색, 적색, 황색, 회색의 4대 마탑주가 모두 호출 명령을 받았지. 그래서 중앙 마탑을 향하는 길에 이곳에 들렀다.”
“4대 마탑주가 동시에 호출을 받을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겠군.”
라일은 그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이곳은 청마탑이고, 이 방 안엔 쿨리와 라쿠나가 있다.
라일은 이들이 없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쿨리가 말했다.
“사정이 그렇게 되어 라쿠나의 호위를 그쪽에 부탁드리게 된 거요. 중앙 마탑에서 탑주의 호출이 있을 땐 서열 3위까지의 마법사를 대동하는 것이 관례이고, 또 원로들과 남은 마법사들이 탑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물론 적마탑주의 의견도 크게 반영된 결과요.”
그 말에 라일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적마탑주가 되더니 제법 능글맞아졌다고 생각하며 아틸라는 피식 웃었다.
“호위는 받아들이지. 대신 조건이 있소.”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보시오.”
“물정령의 반지.”
쿨리의 눈이 커졌다.
물정령의 반지.
강한 물 속성 마력이 내재된 청마탑의 보물로.
쿨리가 어린 시절 우연히 나이아드를 만나 선물 받은 것이다.
“……그건 곤란하오 아틸라.”
“그렇소? 그럼 호위 건은 없었던 일로 하지.”
그 말에 오토와 카스피가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아틸라가 나이아드를 만나기 위해 수오미 왕국에 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틸라는 나이아드를 만나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청마탑을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준비란, 조금 전 쿨리가 말했던.
‘나이아드를 만나려면 특별한 마법이 필요하오. 지금 청마탑에서 그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지.’
저 ‘특별한 마법’인 게 틀림없다.
즉, 쿨리가 이대로 호위 제안을 포기한다면 아틸라도 곤란해진다는 것.
하지만 아틸라는 여유로운 얼굴로 쿨리를 바라봤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틸라는 심안을 통해 쿨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쿨리 야르비는 내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운디네가 명계의 보석에 오염됐다.
이것만이라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블루 드래곤이 타락하고 있다.’
이는 대단히 큰 위험이다.
블루 드래곤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보다 약하지 않다.
그 말은 즉.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나이아드 역시 타락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블루 드래곤은 애초부터 인간과 별다른 접점이 없는 존재지만.
‘나이아드는 다르지.’
청마탑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나이아드에게 많은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쿨리는, 아니 청마탑은 나이아드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현재 쿨리는 그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본인이 직접 나이아드를 만나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다.
나이아드를 만나기 위한 ‘특별한 마법’을 시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쿨리는 그 마법을 라쿠나보다 능숙하게 발현할 수 있다.
다만.
‘쿨리의 노화한 육체는 대호수의 수압을 견딜 수 없다.’
게다가 그 마법을 발현 가능한 다른 실력자들은 쿨리와 함께 중앙 마탑으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고 한시가 바쁜 상황에 나이아드를 만나는 일을 미룰 수도 없다.
‘그래서 서열 4위, 라쿠나 야르미에게 차례가 온 거다.’
쿨리는 아틸라 일행에게 라쿠나의 호위를 맡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약한 마법사들을 라쿠나에게 딸려 보내야 하고,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크게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번 운디네와 블루 드래곤 사건만 보아도, 아틸라 일행이 아니었으면 라쿠나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표정 연기 하난 잘 하는군. 너구리 같은 노인네.’
아틸라는 강수를 두기로 했다.
“그럼 우린 이만 떠나겠소.”
아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겼다.
바토리가 한술 더 뜨며 말했다.
“야만전사야. 수오미 왕국의 볼일 같은 건 다음으로 미루고 카스티야 왕국을 향하자꾸나. 알폰소 왕자가 꼭 다시 만나고 싶다며 초대하지 않았더냐. 네가 샹크리스 왕국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을 때 말이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렇군. 이곳의 볼일은 그리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마, 맞아 아틸라.”
“그, 그거 좋은 생각이요! 나 역시 카스티야 왕을 만나 남부의 현 정세에 대해 논할 생각이었소!”
카스피와 오토마저 맞장구를 쳤다.
마무리는 라일이었다.
“아쉽게 됐군요 청마탑주.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은 이곳저곳에서 찾는 이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이쯤 되자 쿨리는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문을 열고 나서는 아틸라에게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아틸라는 발을 멈췄다.
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