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발현 (3)
시간을 조금 앞으로 거슬러.
바토리는 악마진의 마지막 상징물을 파괴하는 것에 성공했다.
“히익! 서, 성공이요! 바토리 아가씨!”
“그래.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닌 것 같구나.”
바토리의 말대로였다.
상징물을 파괴해 악마진의 붕괴를 촉발시키는 것엔 성공했지만.
키에에! 키에에에에!
열 마리가 넘는 다크 나가들의 추격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 그래도 악마진인지 뭔지가 붕괴됐으니 저놈들도 약해진 거 아니요?”
“그건 나가라자 탁샤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저 중급 악마들은 악마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히익!”
“게다가 악마진은 아직 붕괴되지 않았다. 모든 상징물을 제거했지만, 이곳의 짙은 마기가 악마진을 보호하는 중인 것 같구나. 붕괴가 시작되려면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그럼 위험한 거 아니요!”
“당연하지 종복 미물 새끼야! 그러니까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달리라고!”
오토는 바토리를 안아든 채, 도롱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전력질주했다.
“왜, 왜 자꾸 방향을 바꾸는 거냐 도마뱀아아아!”
“조무래기 나가들 피해서 달리는 거 아냐! 걍 좀 닥치라니까!”
“이, 이 상황에 어떻게 입을 다물라는 거냐!”
“젠장! 빌어처먹을 종복 미물 새끼! 내가 성체만 됐어도 조무래기 나가들과 함께 잿개비로 만들어 버리는 건데!”
“시끄러운 건 둘 다 마찬가지인 것 같구나. 한데 도롱뇽아.”
“왜.”
“그 성체가 되는 것 말이다. 네 의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더냐.”
“……그, 그건.”
바토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역시 그러하구나. 아틸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로구나.”
바토리는 지금까지 도롱뇽이 성체가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검은 보석에 지배된 플라이웜과 가짜 와이번들을 상대했을 때.
연금술사 케플러가 만든 키메라와 싸웠을 때.
마지막으로 자신과 키릴의 결투 중간에 끼어들었을 때.
‘세 번 모두 아틸라가 가까이에 있었다.’
게다가 적마탑에서 거대 와이번과 졸개들을 상대했을 땐.
자신이 마법으로 도롱뇽을 아틸라에게 날려 주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키메라와 싸웠을 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음에도, 아틸라는 도롱뇽을 빠르게 성체로 만들지 못했다.
힘껏 달려 거리를 좁힌 뒤에야 도롱뇽은 성체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도롱뇽이 성체가 되려면 아틸라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
“도롱뇽아. 아틸라가 있는 곳까진 아직 멀었느냐.”
“아직 한참 남았다고!”
“시간을 끌 필요가 있겠구나.”
바토리는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다크 나가들이 일행을 추격하고 있다.
바토리는 이 상황에 어울릴 잡기술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나직이 주문을 읊었다.
스스스스슷.
바닥 일부가 건조해지는가 싶더니 흙먼지가 일었다.
그것이 다크 나가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키엣……!
키에에에……!
놈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다크 나가는 습지에 사는 악마.
메마른 땅은 익숙지 않다.
게다가 나가들은 굵은 뱃가죽으로 바닥을 비비며 이동한다.
흙먼지가 점점 거세게 일 수밖에 없다.
오토가 반색하며 외쳤다.
“바, 바토리 아가씨! 저런 좋은 마법이 있었는데 왜 이제서야 쓰는 거요!”
“이제서야 쓸 수 있을 만큼 마력이 모였느니라. 게다가 이건 눈속임일 뿐. 나가들은 금세 우리를 찾아 추격을 개시할 게다.”
“그러니까 어서 달리라고 종복 미물 새끼야!”
오토가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바토리는 시공추적의 반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야만전사야.’
반지의 나머지 한쪽은 아틸라가 가지고 있다.
바토리는 신전에 입장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틸라에게 반지를 건네줬었다.
그런데.
아틸라는 쉬이 추적이 되지 않았다.
“히익! 바토리 아가씨! 놈들이 꽁무니까지 따라왔소!”
“조금만 참아! 야만 미물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거의 다 왔다고!”
바토리의 시선이 다시금 뒤를 향했다.
오토의 말대로다.
나가들의 삼지창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토리는 온 힘을 다해 아틸라를 불렀다.
‘이러다 큰일이 날 것 같구나. 어떻게 된 것이더냐 야만전사야.’
그 순간 바토리의 심장이 크게 울렸다.
일순이지만.
바토리는 아틸라의 현 상태를 읽어 냈다.
‘설마……!’
그것과 동시에 도롱뇽은 자신의 몸에서 가공할 힘이 발산하는 것을 느꼈다.
[ 해방(解放) ]
펄럭! 성체가 된 도롱뇽이 활짝 날개를 폈다.
다크 나가들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키랴랴랴랴랴랴랴!
흑염의 브레스가 나가들을 향해 쏘아졌다.
아무리 중급 나가라 해도.
또 도롱뇽의 해방 스킬이 전성기 때의 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해도.
다크 나가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엔 충분했다.
키에에에에!
전방에 있던 다크 나가들은 어쩌지도 못하고 즉사했다.
그러나 양쪽 가장자리와 후방에 있던 나가들은 위기를 모면했다.
놈들은 치명상을 입었을지언정 숨통이 끊어지진 않았고.
거기에 더해 몇몇 개체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키에에엣!
그중 하나가 도롱뇽의 가슴에 삼지창을 꽂았다.
도롱뇽이 괴로운 듯 몸을 뒤틀다 뒷발로 녀석을 걷어찼다.
공격이 통하는 것 같자 나가들의 움직임이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도롱뇽은 다시 한번 브레스를 뿜었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아틸라의 의지가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도롱뇽아!”
바토리가 소리쳤다.
도롱뇽은 자신의 측면으로 쇄도하는 삼지창을 발견했다.
부웅, 날개를 움직여 피한 도롱뇽이 다크 나가의 목을 물어뜯었다.
다크 나가의 목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브레스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성체가 된 도롱뇽은 충분히 강하다.
- 감히 중위종 뱀대가리 따위가 이몸에게 발톱을 드러내?
도롱뇽이 분노했다.
그러고는 앞발과 뒷발, 송곳니를 이용해 다크 나가들을 물어뜯었다.
그러나 나가들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덩치에서만큼은 도롱뇽에게 밀리지 않는 다크 나가들은 악착같이 삼지창을 휘두르며 반격했다.
“비, 빌어먹을! 바토리 아가씨! 잠깐만 여기 있으쇼!”
오토가 달려가 도롱뇽을 도왔다.
오토의 등장으로 도롱뇽은 아주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기회를 틈타 도롱뇽은 브레스를 날리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 야만 미무우우울!
그때였다.
쿠쿠쿠쿠쿠……!
지면에서 마기가 솟아올랐다.
그러고는 허공에 흩어졌다.
최후의 상징물을 잃은 악마진이 붕괴를 시작하고 있었다.
‘야만전사야.’
바토리는 주위를 돌아봤다.
수증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던 주변은 검은 마기가 뒤섞이며 더욱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토리는 멀지 않은 곳에 아틸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있는 것이냐. 야만전사야.’
점점 짙어지는 수증기와 마기는 시야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차단하는 듯했다.
어디선가 몇 마리의 다크 나가가 추가로 등장했다.
“히익! 또 나온다고!”
오토와 도롱뇽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았다.
그러던 중 바토리는 익숙한 발소리를 포착했다.
“펀치야!”
거대화한 펀치가 수증기를 뚫고 등장했다.
펀치의 등 위엔 카스피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바토리는 서둘러 카스피의 상태를 살폈다.
‘탁샤카의 독에 당한 게로구나.’
바토리는 잡기술을 시전해 카스피의 독이 퍼지는 것을 억제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한계다.
어서 빨리 제대로 된 치유를 받아야 한다.
우어어어어!
그 사이 상황을 파악한 펀치는 오토와 도롱뇽의 전투에 합류했다.
오토가 반색했다.
“흐어어어! 왔구나 펀치!”
펀치의 가세로 일행은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와 동시였다.
오토, 도롱뇽, 펀치는 온몸에서 활력이 순환하며 체력이 회복되는 기분을 느꼈다.
레벨업이었다.
“아, 아틸라 님이 그 대왕 뱀새끼를 쓰러뜨린 것 같소!”
오토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그는 아틸라와 함께하며 많은 레벨업을 경험했다.
스스스스스…….
주위를 메웠던 수증기와 마기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다크 나가들도 나가라자의 죽음을 느꼈다.
게다가 오토, 도롱뇽, 펀치는 레벨업의 영향으로 더욱 강해졌다.
“이 뱀새끼들! 죽어! 죽어라아앗!”
오토의 칼질에 다크 나가들이 비명을 질렀다.
도롱뇽과 펀치도 더욱 신나게 앞발을 휘둘렀다.
이윽고 다크 나가들이 꼬리를 말고 도주를 시작했다.
“도롱뇽아!”
바토리가 외쳤다.
무언갈 느낀 도롱뇽이 바토리를 향해 날아갔고, 바토리는 날렵하게 몸을 띄워 도롱뇽의 등에 올라탔다.
“서두르자꾸나 도롱뇽아.”
바토리는 아틸라가 버서커의 힘을 발현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방금 탁샤카가 쓰러졌다.
그렇다면 저쪽에 남은 건 아틸라와 키릴뿐.
“키릴,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해있을 것이다.”
도롱뇽은 아틸라의 냄새를 감지하며 날개를 움직였다.
수증기는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기에 둘은 금세 아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카르타고와 싸울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핏발이 선 두 눈.
터질 듯이 부푼 근육.
그 속에서 솟구치는 핏물.
퍼억!
아틸라의 무릎이 키릴의 배를 타격했다.
키릴이 핏물을 쏟았다.
그 와중에도 키릴은 반격을 준비했다.
고오오오오오.
바토리는 키릴의 아밍 소드에 둘러진 백색의 신력을 봤다.
‘포이베의 신력!’
광명의 아밍 소드가 아틸라에게 뻗쳤다.
그러나 막혔다.
콰드드듯!
키릴의 아밍 소드를 짓누른 건 커다랗게 몸을 바꾼 드라칼리온.
포이베의 신력과 버서커의 권능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승자는 버서커였다.
광기(狂氣)의 드라칼리온이 키릴의 아밍 소드를 바닥으로 날려 버렸다.
그 순간 도롱뇽이 키릴을 낚아챘다.
“바토리!”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날 뻔했구나. 키릴.”
도롱뇽이 날개를 접으며 착지했다.
바토리는 재차 반지에 정신을 집중하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나 아틸라는 여전히 반지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토리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지난번처럼은 되지 않는구나.’
카르타고를 상대했을 때의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에 걸려 있었다.
바토리는 그것을 이용해 아틸라의 정신에 침투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아틸라의 정신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토리가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은 있겠지.’
조금 전 탁샤카가 죽으며 레벨업한 건 오토, 펀치, 도롱뇽만이 아니다.
바토리도 레벨업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력이 일부 회복됐다는 것을 감각했다.
‘이 정도의 마력이라면 가능할 게야.’
아틸라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키릴. 내가 아틸라의 정신 속에 침투하겠다. 그때까지 아틸라를 막을 수 있겠느냐.”
“해보겠어요.”
키릴도 아틸라를 향해 달렸다.
아밍 소드를 잃은 그녀는 방패만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의 위를 도롱뇽이 날았다.
- 내가 도와주지. 성기사 미물.
그들만이 아니다.
바토리는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오토와.
카스피를 등에 업은 펀치를 봤다.
시간은 충분하다.
바토리의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그럼 시작해 보자꾸나.”
바토리는 대악마 아몬의 환술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