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도롱뇽의 이야기
나가(Naga).
그들은 원래 물의 정령이었다.
강이나 호수, 혹은 우물 속에 존재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비로운 정령.
그러나 이런 물의 정령 나가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원인은 악마였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옛날.
그렇게 어느 나가 일족은 악마의 힘에 타락한다.
타락한 나가들은 강과 호수, 그리고 우물을 떠나.
어둡고 진득한 늪지대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악마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것이 다크 나가(Dark Naga)다.
다크 나가가 물 속성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
한편 나가들은 자신들의 왕을 ‘나가라자(Nagaraja)’라는 이름으로 칭했는데.
그건 악마로 변한 ‘다크 나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콰콰콰콰콰.
정면의 검은 늪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뱀의 머리.
아틸라는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 역시 너였던 건가.”
눈앞에 드러난 뱀의 머리.
그 위엔 금빛의 비늘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다크 나가라자(Dark Nagaraja).
다크 나가들의 왕.
“탁샤카(Takshaka).”
콰콰콰콰콰콰콰.
탁샤카의 머리가 거칠게 포효했다.
놈의 머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일곱 개였다.
“탁샤카라고……?”
키릴은 탁샤카에 대한 것을 하르티칸 대사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일곱 개에 달하는 긴 목과 머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각각의 아가리 속에 존재하는 일곱 가지의 독액.
‘다크 나가의 왕, 탁샤카.’
탁샤카는 상급 악마다.
얼마 전 중급 악마 벨페고르가 둥지를 틀어 상급 악마에 준하는 힘을 발휘했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진짜 상급 악마와 동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악마의 등급엔 결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탁샤카는 진짜 상급 악마다.
‘위험하다.’
키릴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 자리의 동료들이 아무리 대단한 강자들이긴 해도.
‘둥지를 튼 상급 악마를 당해 낼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는 신이었던 존재인 대악마와 고위악마를 제외한다면.
상급 악마는 그야말로 악마들의 왕.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쉽지 않은 녀석이 등장했구나 야만전사야.”
바토리 역시 알고 있었다.
상급 악마는 중급 악마와는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존재.
관조자 시절의 자신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파티원으로는 결코 탁샤카를 쓰러뜨릴 수 없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
나가라자 탁샤카는 현재, 두 가지의 버프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이곳이 중간계와 마계를 잇는 통로라는 것.’
통로는 마계의 기운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탁샤카는 자신이 지녔던 본연의 힘을 상당량 드러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며 만났던 여러 다크 나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탁샤카가 이곳에 자신만의 둥지를 틀었다는 것.’
둥지를 튼 악마는 강해진다.
둥지를 튼 마법사 역시 그러하듯, 이곳에서 탁샤카는 공력력과 회복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탁샤카가 지닌 일곱 가지의 독 또한 더욱 강력해진다.
‘제대로 당한다면 치명적일 게야.’
그래서 탁샤카를 쓰러뜨리려면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해답은 아틸라의 입에서 나왔다.
“악마진(惡魔陣)을 찾아라. 바토리.”
바토리가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흐응. 넌 꼭 뭔가를 다급히 부탁할 때면 이름을 불러 주더구나.”
“네 말대로 다급한 상황이다. 녀석의 둥지를 깨부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승산은 없으니까.”
“무조건 도끼부터 휘두르고 볼 줄 알았더니. 그래, 알겠느니라.”
바토리가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아틸라.”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를 바라봤다.
“움직여라.”
“도롱뇽과 철혈귀검을 빌려 가겠다.”
“그러든지.”
“엥? 우, 우리만 따로 어딜 가겠다는 거요 바토리 아가씨.”
“잔말 말고 따라오려무나.”
바토리는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을 잡아 뽑았다.
“꾸에엑! 놔라! 나 바토리 할망구랑 가기 싫다고!”
“네 후각이 필요한 일이니라.”
바토리가 싱긋 웃으며 도롱뇽의 코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고는 오토를 끌고 부연 수증기 너머로 사라졌다.
카스피가 말했다.
“우린 뭘 하면 되는 거야? 아틸라.”
“뭘 하긴.”
아틸라는 웃었다.
“뱀대가리 잘라야지.”
* * *
“빌어먹을. 저쪽이다 할망구.”
도롱뇽은 바토리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바토리는 도롱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그 옆을 호위하듯 오토가 달렸다.
“악마진을 깨뜨린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우 바토리 아가씨.”
“하여간 저 종복 미물 새끼는 아는 게 하나도 없네. 그렇다고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저럴 바엔 지 나라 왕성에나 짱박혀 있지 왜 기어 나와 저딴 헛소리 담당을 하는 거지? 참나, 당최 야만 미물이 왜 저런 멍청한 약골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네, 네, 네 이놈 요망한 도마뱀아아아아!”
“철혈귀검아. 악마진이란 나가라자 탁샤카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마법진이니라. 그래서 우린 그 마법진을 구성하는 특별한 상징물들을 찾아 부수려는 게야.”
“왜 부숴야 하는 거요?”
“그걸 부수지 않으면 우리 힘으론 저 나가라자를 쓰러뜨릴 수 없기 때문이지.”
“에엥? 아틸라 님과 바토리 아가씨가 있는데도 말이우?”
“하. 저 모자란 새끼. 상급 악마가 뉘 집 똥개 이름인 줄 아냐. 상급 악마, 그것도 둥지를 튼 상급 악마는 전성기의 바토리 할망구라도 쉬이 쓰러뜨릴 수 없는 괴물이라고.”
“그건 아닌 것 같구나 도롱뇽아. 과거의 나라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느니라.”
바토리가 정정했다.
그 말에 도롱뇽은 바토리의 옛 모습을 곰곰이 떠올렸다.
이윽고 도롱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때의 할망구는 완전 장난 아니었지. 아무리 약해진 상태였다고는 해도, 이몸을 마계로 추방시킬 정도였으니까.”
바토리는 도롱뇽, 아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마계로 추방했었다.
“나 역시도 생각이 나는구나.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것이 있다 도롱뇽아.”
“뭔데.”
“그때 넌, 왜 그리도 나약한 몰골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바토리는 먼 옛날, 리베르 파테르를 포함한 관조자들과 함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았던 일을 떠올렸다.
‘망국의 복수를 하러 왔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리고.
그때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옛 기억을 회상한 도롱뇽이 으르렁댔다.
“짜증 나게 왜 옛날 얘긴 꺼내고 그래.”
“먼저 옛이야기를 꺼낸 건 너였단다 도롱뇽아.”
도롱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잠시 후 도롱뇽이 입을 열었다.
“너희 관조자들이 날 찾아오기 전, ‘녀석’이 나타났었거든.”
“녀석이라면.”
“정체는 나도 몰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온몸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대는 통에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으니까.”
도롱뇽은 ‘녀석’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려 했다.
인간의 형체를 지닌 검은 그림자.
뿜어지는 강대한 마기.
그러나 그때도 그랬고, 지금 역시도 도롱뇽은 ‘녀석’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바토리가 놀라 물었다.
“뭐라?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을 만큼 강대한 마기를 뿜는 존재가 있단 말이더냐.”
바토리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고위악마, 아니 대악마의 마기조차 견딜 수 있는 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용족은 크게 여섯 등급으로 나뉜다.
최상위종.
상위종.
중상위종.
중위종.
중하위종.
하위종.
그러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이중 어느 등급에도 속하지 않는다.
‘드라코니안(Drakonian).’
바로 드라코니안이라 불리는 ‘규격 외 등급’에 해당하기 때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특별한 존재.’
먼 옛날 바토리를 관조자로 만들었던 사색(四色)의 신 오르피나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특별한 존재. 너희가 힘을 얻게 된들 결코 멸할 수 없으리라.’
멸망 이전의 사르데니야 왕국을 찾았던 사도(使徒) 엘 역시도, 바토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여타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거든. 그래서 특별한 존재라 불리는 거야.’
그런데.
그런 특별한 존재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의 마기를 지닌 상대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마기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엄청난 녀석이었지. 아무튼 놈이 나를 약화시켰다. 게다가 녀석은 말했어. 머지않아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관조자들이 날 찾아올 거라고.”
“뭐라?”
“녀석은 알고 있었다. 복수심에 젖은 네가 날 찾을 거라는걸.”
“그런데도 그곳에 있었던 게냐.”
“나는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약화된 상태로 너와 관조자들을 만나는 게 위험하다는 건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녀석이 내가 자리를 뜨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도롱뇽이 아주 잠시 말을 끊었다.
“난 녀석에게 속박을 당했다. 내 힘으론 벗어날 수 없는 강대한 힘이었지. 그리고 예정된 결과인 너를 만났고, 이후의 일은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도롱뇽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오소소 비늘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녀석이 발현한 속박의 주문에서, 익숙한 냄새가 느껴진다는 것을.”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잠깐. 그렇다면 네가 말한 ‘녀석’이란 게.”
바토리가 멸망한 왕국의 복수를 위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았던 날.
그녀는 알게 되었다.
눈앞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사르데니야를 한줌 잿개비로 만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다른 존재라는 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바토리는 깨달았다.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킬 당시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강력한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토리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죽이지 않았다.
- 무슨 속셈이냐 바토리 에르제베트. 날 이 지경까지 몰아넣고서 목숨을 취하지 않을 셈인가.
‘넌 내가 알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널 죽인다 한들, 나의 복수는 이뤄지지 않겠지. 따라서 난 널 죽이지 않겠다.’
- 그렇다면 어찌할 셈인가.
‘나는 널 마계에서도 가장 어둡고 깊은 구석의 지하마계(地下魔界)로 추방할 것이다. 그곳에서 영겁의 시간을 구르고 구르며 떠올리거라. 네 정신을 지배했던 자를. 사르데니야 왕국을 잿개비로 만들도록 지시했던 사악한 존재를.
그 말을 끝으로, 바토리와 관조자들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마계로 추방했다.
그리고.
도롱뇽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토리는 직감했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정신을 지배해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를 멸망의 길로 인도한 자와.
자신을 비롯한 관조자들의 손을 빌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지하마계로 전락시킨 자가.
“도롱뇽아.”
“그래 할망구.”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도롱뇽이 답했다.
“녀석이 바로, 그때의 그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