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바토리와 키릴 (1)
“뭐?”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댔다.
바토리가 다시 말했다.
“내가 키릴과 대련해 보겠느니라.”
아틸라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키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틸라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키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요. 바토리 에르제베트 님과의 대련이라면.”
“그냥 바토리라 부르려무나. 나는 그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먼 후손일 뿐이니.”
“그러죠. 바토리.”
아틸라는 바토리와 키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리를 비켜 오토와 카스피 쪽으로 와 앉았다.
오토가 물어왔다.
“아틸라 님. 이게 갑자기 뭔 일이우? 바토리 아가씨와 저 성기사가 대련을 하다니.”
“글쎄.”
“바토리 할망구는 널 도와주려는 거다, 야만 미물.”
“뭐?”
카스피가 조르르 아틸라 옆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 전 도롱뇽이 말했었어. 저 성기사의 숨겨진 힘을 발현시키는 데엔 바토리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말이야.”
아틸라는 도롱뇽을 쳐다봤다.
도롱뇽이 보이지도 않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두고 보라고. 내 말대로 될 테니.”
아틸라는 다시금 바토리와 키릴을 돌아봤다.
키릴 크레센시아.
며칠간 틈틈이 그녀와 대련하며 아틸라가 느낀 건.
키릴이 자신의 성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선이 붕괴를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갑작스레 불어난 성력을 통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그럼에도 키릴의 성력은 대단했다.
다시 말해 키릴이 자신의 성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욱 강한 실력자가 될 거다.’
한편 저만치에선.
“준비는 되었느냐. 키릴.”
“물론이죠. 바토리.”
현 패영전 세계관 최강의 두 여인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서 강한 불꽃이 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으으. 왠지 소름이 돋는 것 같수 아틸라 님.”
아틸라는 말없이 두 여인을 바라봤다.
실력으로 따지자면 바토리가 몇 수는 위다.
그러나 바토리는 더 이상 관조자가 아니고, 현자의 돌이 그녀의 힘을 억제하고 있다.
‘거리를 벌린다면 바토리, 좁혀진다면 키릴이 약간 유리하겠지.’
카스피도 곧 벌어질 전투에 집중했다.
먼저 움직인 건 키릴이었다.
차앙!
키릴의 아밍 소드가 바토리를 공격했다.
그것에 대항하며 바토리가 꺼내든 것은.
‘뭐, 뭐야!’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그럴 만도 했다.
파캉!
검을 쥔 키릴의 팔이 거칠게 뒤로 튕겨났다.
키릴은 아틸라 이상으로 크게 놀랐다.
‘저, 저건 무슨……!’
바토리의 정면으로 떠오른 핏빛의 칼날.
그것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니 막아 낸 것을 넘어 날카롭게 반격했고, 순간 키릴은 자신의 목이 절단되는 듯한 환각을 경험했다.
‘미친 할망구. 시작부터 마멸의 칼날이냐.’
아틸라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바토리가 여유를 부리며 싸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맨 처음 꺼내든 마법이 마멸의 칼날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어쩌면 키릴에겐 좋은 자극이 될지도.’
자극 정도가 아니었다.
키릴은 마멸의 칼날에서 뿜어졌던 가공할 살기에 얼어붙었다.
‘중급 악마 크로셀과 벨페고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자 불현듯 떠올랐다.
마법진의 둥지를 튼 벨페고르와 싸우던 중.
교회 지붕을 뚫고 난입한 아틸라와.
그 여파로 산산이 부서진 마법진 속에서 벨페고르가 외쳤던 말.
‘바, 바, 바, 바토리 에르제베트……!’
키릴의 눈이 커졌다.
‘벨페고르가 바토리를 알아봤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급 악마가 인간 마법사를 알아보다니.
게다가 벨페고르는 오랜 세월 마계에 머물러 있었다.
‘먼 옛날의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착각한 건가? 하지만.’
키릴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있었더냐.”
바토리의 목소리와 함께 핏빛 칼날이 날아왔다.
키릴은 등 뒤의 방패를 뽑아들었다.
바토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대로 된 성력을 두르지 않는다면 위험할 것이야.”
파카카카카캉!
그 말대로였다.
키릴은 바토리의 칼날을 막아 낸 자신의 방패가 엄청난 속도가 갈려지는 것을 봤다.
‘어떻게 이런 공격력이……!’
마법사들이 강한 공격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이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이런 마법이 있다고?’
키릴은 모든 성력을 방패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방패를 통해 전해지는 힘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크윽……! 이대로라면……!’
키릴은 자신의 방패가 완전히 부서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러면서 키릴은 생각했다.
바토리의 마법은 괴이하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크게 물, 불, 대지, 바람의 4개 속성으로 나뉜다.
그에 따라 청색 마탑, 적색 마탑, 황색 마탑, 회색 마탑의 4대 마탑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마탑의 으뜸인 백색의 중앙 마탑과, 지금은 사라져 버린 이단의 녹마탑도 있긴 하지만.
‘바토리의 마법은 그 어느 속성에도 속하지 않는다.’
키릴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마법사들의 속성을 판별할 정도의 감지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토리의 마력은 감지가 불가능했다.
‘오히려 저건 마력이 아니라.’
물리력.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그러나 그럴 리는 없다.
저건 물리적인 형태를 지닌 칼날이 아니다.
바토리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칼날을 소환했다.
게다가 저 칼날은.
파카아앙!
핏빛 칼날이 허공으로 튕겨 났다.
키릴의 몸도 수 미터 뒤로 밀려났다.
키릴은 고개 숙여 방패를 바라봤다.
방패는 언제 반으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덜대고 있었지만.
반대로 이제껏 본 적 없는 강대한 성력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었다.
“흐응. 역시 제법이구나. 그사이 성력이 더욱 강해지다니.”
“바토리. 당신은…….”
키릴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허공으로 튕겨 난 줄 알았던 핏빛 칼날이 단두대처럼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키릴은 검과 방패를 동시에 들어 칼날을 막았다.
콰드드드득……!
키릴의 무릎이 굽어졌다.
악다문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키릴은 인정했다.
‘무시무시한 강자다.’
그동안 키릴은 아틸라의 무력에만 감탄했었다.
오토마이어 왕 역시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아틸라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키릴은 그간 바토리의 마법 실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키릴은 바토리의 엄청난 마력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아틸라에 밀리는 실력이 아니야.’
아니, 공격력에서만큼은 더욱 강력하다.
키릴은 그동안의 대련을 통해 아틸라의 검을 수없이 마주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압도적인 파괴력을 느끼진 못했었다.
“크흐으윽……!”
키릴은 검과 방패에 성력을 집중했다.
다시 한번 바토리의 칼날을 튕겨 내려 했다.
‘튕겨 낸 후가 기회다.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일격을 먹여야 한다.’
공격력은 아틸라보다 강할지 몰라도.
마법사인 바토리는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때였다.
“하나론 부족한 모양이구나.”
바토리의 머리 위 허공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또 하나의 핏빛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키릴은 볼 수 있었다.
‘왼팔의…… 문신?’
핏빛 칼날의 엄청난 위력 탓에, 전투가 시작된 후 키릴은 바토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바토리의 왼팔 전체엔 새빨간 문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에서 빛이 흘렀고, 키릴은 바토리의 마력이 저 왼팔에서 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또 다른 놀라움이 찾아왔다.
‘설마 바토리는……!’
그것은 경악이었다.
‘주문을 영창하지 않았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주문을 영창하지 않는 마법사라니.
마법사는 전사를 능가하는 공격력을 지니지만, 주문 영창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단점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상식.
그런데.
눈앞의 마법사,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분명해. 바토리는 단 한 번도 주문을 영창하지 않았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런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도롱뇽도 혀를 내둘렀다.
“바토리 할망구, 아주 단단히 작정을 했구만. 뭐, 왠지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뭐야. 몰랐냐? 야만 미물.”
“뭐가.”
“네가 저 성기사 미물과 노닥거릴 때마다 바토리 할망구가 얼마나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는지 말이야. 후……, 아주 내 비늘이 바짝 돋아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었지. 글쎄 한 번은 꿈에 나온 적도 있었다니까!”
그때가 생각나는지 도롱뇽의 좁쌀만 한 비늘이 오소소 곤두섰다.
그 말대로 도롱뇽은 계속 보고 있었다.
바토리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어도.
틈틈이 보이는 그 눈빛마저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조금 전에도 그랬다.
냇가에서 카스피가 아틸라와 키릴에 대해 투덜댔을 때.
‘그건 키릴, 저 아이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아틸라가 말하지 않았더냐. 대련을 통해 키릴의 ‘성스러운 오러’를 발현시켜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바라키엘 신전에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이다.’
바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심지어 냇물에 발까지 담그고 즐거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도롱뇽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괜찮은 척하는 연기가 슬슬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것도.
그래서 도롱뇽은 부추겼다.
‘할망구. 너야말로 왜 구경만 하고 있는 거냐. 저 성기사 미물의 숨겨진 힘을 발현시키는 데엔 너만 한 적임자가 없을 텐데.’
도롱뇽이 그렇게 한 첫 번째 이유는,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바토리가 언제 폭발해 자신에게 불똥이 튈지 몰랐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두 여인의 결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기 때문이며.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도롱뇽의 말대로 키릴을 각성시키는 데 바토리만 한 적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토리는 그것을 증명했다.
바토리가 만들어낸 두 번째 칼날에서 변화가 일었다.
화르르륵.
칼날 위에 새로운 힘이 덧씌워졌다.
피처럼 붉었던 칼날이 색을 바꿨다.
키릴의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마기?’
그랬다.
저것은 마기였다.
‘어떻게 바토리가 마기를……!’
이유는 단순했다.
바토리는 일리시아의 환술을 경험한 뒤, 메피스토펠레스의 마술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후엔 진짜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을 경험했으며.
대악마 ‘아몬’의 고서도 손에 넣었다.
그런 바토리였기에.
마멸의 칼날 표면을 뒤덮을 정도의 마기를 발현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키릴에겐 달랐다.
키릴은 악마와 마기에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키릴은, 아틸라와의 대련 후 체력을 제대로 회복하지도 못한 채 바토리의 맹공을 견디는 중이었다.
한 마디로 현재의 키릴은 육체와 정신 모두가 위기에 몰린 상태.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네 마음속 어둠을 마주해 보자꾸나.”
바토리는 키릴에게 환술을 걸었다.
대개 환술은 상대의 정신 속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키릴의 정신이 열두 살의 어느 날로 되돌아갔다.
그 순간 두 번째 칼날이 키릴을 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