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연회 (3)
아틸라는 키릴의 눈을 통해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봤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영화처럼 생생하게 아틸라의 머리에 새겨졌다.
‘키릴을 향한 마을 여인들의 강한 질투감이 음욕의 악마를 불러냈고, 종래엔 키릴의 아버지마저 이성을 잃었다.’
키릴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신뢰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키릴에게 하려 했던 행동은.
키릴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아무리 그녀의 아버지가 악마에게 세뇌 당한 상태였다 해도.’
지금의 키릴은 알고 있다.
대악마나 고위악마 정도의 존재가 아닌 이상.
악마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 어둠은 결코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즉,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엔.
‘키릴을 향한 음욕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
인간은 나약하다.
인간의 마음은 쉽게 무너지고, 작은 부채질에도 쉽게 타오른다.
키릴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악마에게로 돌렸다.
그렇게 쌓아올린 악마에 대한 적대감을 토대로.
‘키릴은 샹크리스 왕국 최강의 성기사가 되었다.’
아틸라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묘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키릴을 만든 것은 원작자인 김도현, 즉 자신이다.
그렇다는 것은.
‘키릴의 과거 또한 내가 만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틸라는 키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점점 이 세계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인가.’
바토리의 과거 역시도 자신이 만들었다.
그러나 바토리를 처음 마주했을 땐, 이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었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당시 바토리를 보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왜 그렇게 제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계신 겁니까. 아틸라 경.”
조금은 곤란해하는 듯한 키릴의 얼굴.
아까부터 아틸라는 아무 말 없이 키릴을 똑바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지금 키릴의 얼굴 표정은, 조금 전 프리실라가 보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틸라가 물었다.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키릴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신이라면, 빛의 신 포이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키릴의 표정이 아주 살짝 굳어졌다.
“전 포이베를 섬기는 성기사. 다른 신에 대한 언급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 중의 신.”
그제서야 키릴은 아틸라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신 중의 신은 오직 하나뿐이다.
주신(主神).
“주신에 대한 것이라. 어려운 질문이군요.”
무언갈 생각하던 키릴이 말을 이었다.
“포이베께서는 광명의 가호를 통해 샹크리스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빛의 축복을 내려 저와 같은 성기사와 사제를 만드셨지요. 그러나 저는 포이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빛의 신 포이베마저도 제겐 너무도 어려운 존재이지요. 그런 제가 ‘주신’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키릴의 완곡한 거절에도 아틸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신이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나?”
키릴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입니다. 주신께서는 신 중의 신. 모든 신들의 부모이자 으뜸. 이 세계는 그분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니까요.”
아니다.
키릴은 잘못 알고 있다.
‘이 세계는 원래부터 존재했다.’
먼 옛날 주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들이 일으켰던 ‘주신 전쟁’.
그 여파로, 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생성됐을 뿐이다.
‘이 세계는 덧씌워졌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이 세계는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
‘태초의 지구처럼 원시적인 세계.’
그 위에 신과 천사, 그리고 악마의 시체가 부서져 내려앉으며 지금의 형태를 만들었다.
대기와 구름.
산과 대지.
강과 바다.
그리고.
‘고대의 인간.’
그랬다.
이 세계에 가장 먼저 등장한 지성 종족은 인간.
바로 ‘고대의 인간’이다.
‘지금의 인간은 고대의 인간을 본따 만든 복제품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움, 드워프, 엘프, 심지어 요정들 역시 고대의 인간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대의 인간이 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고대의 인간은 신과 악마, 그리고 천사의 시체 속에서 태어났다.
악마도 원래는 신이었다.
다시 말해 고대의 인간은.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
주신은 고대의 인간이 태어나는 것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
고대의 인간은 ‘주신 전쟁’의 인과율(因果律)이 빚어 낸 특별한 종족.
주신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건 그 이후 탄생한 지성 종족들이다.
‘주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아틸라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아틸라는.
신의 화신이자 성기사인 키릴에게, 그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주신이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을 미리 계획하고, 또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키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키릴은 대답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물으시는 거라면.”
키릴은 말을 멈췄다.
머릿속에서 차분히 말을 골랐다.
그런 키릴을 아틸라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이윽고 키릴이 입을 열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듣고 싶군. 방금 넌 주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 말했었다.”
“인간의 삶이, 아니 이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들의 삶에 수많은 우연이 겹쳐 있기 때문입니다.”
“우연이라. 그 말대로라면 주신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로군.”
우연(偶然).
인과(因果)와는 대립되는 낱말.
“……물론 주신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저희와 같은 피조물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빛의 신 포이베를 비롯한 여러 신들을 통해, 저희들이 어둠의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보고 계시지요. 그러나 주신께서는 가없는 너른 길만을 제시하실 뿐입니다. 그 길 안에서 우리는 타자(他者)를 만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수많은 우연을 쌓아 갑니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는 철저하게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지요.”
“그러니까 넌 주신이 아무리 전지전능해도, 그 모든 우연의 조각들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로군.”
“……신성모독이라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는 발언이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주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로군.”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키릴은 자신의 말이 이치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키릴의 대답은 아틸라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요즘 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 실은 오래전부터 그랬다.
‘패영전은 내가 만든 세계다.’
그러나.
아틸라가 만든 패영전의 세계는.
이 세계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
‘내가 만든 소설 속 세계와, 실제의 이 세계는 같지 않다.’
아틸라가 알지 못하는 ‘사도’와 같은 존재 때문이 아니다.
아틸라는 패영전 세계에서 고작 수백 명의 등장인물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비중 있게 활약하는 인물은 수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넓고, 활자 속에 채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 하나하나의 삶에 대해 아틸라는 몰랐다.
아틸라는 사유(思惟)했다.
‘이 세계는 정말로 내가 만든 것인가.’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자신은 고작 이 세계의 일부만을 상상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지 않은 나머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아마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는 자는.
‘엘. 그리고 아자젤.’
“아틸라 경.”
키릴의 목소리에 아틸라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도 말했듯 난 기사가 아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존대는 그만뒀으면 하는군.”
“제 어투가 불편하신 겁니까.”
“처음엔 그런 말투가 아니지 않았나.”
그때를 떠올린 듯 키릴이 얼굴을 붉혔다.
“어투는 서서히 바꿔 보겠습니다. 아틸라 경.”
이어 빠르게 정정했다.
“아니, 아틸……라.”
“그편이 낫군.”
아틸라가 씩 웃으며 술병을 들이켰다.
“이제 내가 악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완전히 지운 건가.”
“물론입니다. 다리우스 단장께서도 더는 아틸라……를 악마라 여기시진 않는 것 같더군요.”
그것에 대해 아틸라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무휼.’
아틸라는 키릴이 기습했던 결정적인 순간에 무휼을 들어 막았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다리우스 크레센시아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샹크리스 최강의 성기사 키릴과, 하르티칸의 대사제마저도 따라올 수 없는 특별한 능력.
그것은 바로.
‘성물(聖物)을 감지하는 능력.’
아틸라가 무휼을 꺼내든 순간, 다리우스는 감지했을 것이다.
무휼이 성검이라는 것을.
또한 다리우스는 알고 있다.
‘악마라는 존재가 누구보다도 성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악마는 성물을 타락시키는 것을 즐긴다.
그렇게 타락시킨 성물이 악마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
‘벨페고르가 키릴의 영혼을 타락시켜 더욱 강대한 힘을 얻으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 이유지.’
그런 이유로 악마는 성물의 성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탐욕스럽게 그것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아틸라가 성검을 내보이는 것은 그가 악마일 거라는 의심을 더욱 부추기게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악마의 손에 넘어간 성물은 그 즉시 타락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성력을 감지할 수 있는 자들이 가장 정확하게 악마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
아틸라는 그래서 다리우스에게 보였다.
다리우스라면 무휼의 성력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물론 처음 다리우스를 만났던 날 무휼을 꺼내 보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틸라는 그러지 않았다.
십여 년 전, 다리우스는 열두 살 난 어린 딸을 악마에게 잃었다.
그리고 수 년 후, 악마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열두 살의 소녀, 키릴을 만났다.
다리우스에게 키릴은 딸과 같은 존재였다.
아틸라가 자신의 강함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다리우스 또한 안심하고 키릴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거 다행이군. 샹크리스 왕국에 온 이후, 보는 이마다 날 악마로 몰아가서 짜증이 났었으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틸라는 고개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가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키릴은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저만치 벌게진 얼굴의 오토와 카스피가 서로 술을 먹여주며 깔깔대는 모습이 보였다.
8팀의 용병 중 일부는 탁자에 엎어져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밤이 깊었건만 연회는 그칠 줄을 몰랐다.
키릴은 고개를 돌려 아틸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키릴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히익! 내, 내가 그런 소릴 했단 말이오!”
이튿날 아침, 잠이 덜 깬 얼굴의 오토가 자신을 찾아온 샹크리스 왕성의 대신을 향해 꽤액 소리를 질렀다.
대신이 웃으며 말했다.
“나바라 왕국의 오토마이어 나바라 국왕 폐하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주군께서는 샹크리스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동맹에 대해 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길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