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연회 (2)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보이지 않는군요. 아틸라 경.”
테라스에 홀로 서 있던 아틸라에게 키릴이 다가왔다.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토리는 국왕과 함께 사라졌다. 둘 다 하고픈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더군.”
“그렇습니까.”
키릴은 늘 보던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적당히 몸에 달라붙는 가죽 바지.
다소 헐렁한 상의.
연회장의 다른 여인들처럼 화려한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답다고, 아틸라는 생각했다.
‘또 이런 생각을. 작가병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아틸라 경.”
“그냥 별하늘을 보며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옛날 생각도 좀 하고.”
“옛날이라…….”
키릴의 입가가 희미하게 위를 향했다.
그러다가 돌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틸라는 키릴이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날의 일이 떠오른 것이겠지.’
아틸라는 키릴의 과거를 알고 있다.
키릴 크레센시아.
아니 ‘키릴 오를로프’는 평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소녀였다.
물론 소녀 시절부터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웃 마을에까지 퍼질 만큼 유명했지만.
‘키릴 오를로프?’
‘나도 들어봤어! 옆 마을 최고의 미녀라며!’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았다던데?’
‘타고난 미녀는 그 나이만 돼도 장래가 짐작되는 법이지!’
‘하긴 앞으로 4년만 지나면 성년식이니.’
키릴은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눈에 띄는 예쁜 외모와 상냥한 성격.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씩씩함까지.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키릴을 좋아했다.
그러나 밝은 빛 아랜 언제나 짙은 어둠이 숨어 있는 법이다.
‘흥! 얼굴 좀 반반하다고 활개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어차피 늙으면 똑같이 쭈그렁바가지가 될 운명이지!’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키릴이었지만, 그녀를 질투하는 여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순진한 키릴 역시 그들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뭐? 키릴, 고년이 또 내 남편을 홀리러 왔다고?’
‘정말이야. 내가 봤다니까?’
‘아주 눈웃음을 살살 치며 유혹하더라고. 그 요망한 눈빛에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이 마을에 어디 있겠어!’
당연히 키릴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본디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할 뿐이다.
‘허! 예쁘다고 다들 떠받드니까 아주 콧대가 하늘까지 솟아올랐군!’
‘맞아. 정말 요즘은 도를 넘은 것 같다니까?’
‘벌써부터 이런데 성년이 되고 나면 어떻겠어? 마을의 모든 남자들이 키릴, 고년에게 홀려 어디 집에나 제대로 들어오겠냐고!’
여인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했다.
‘이럴 게 아니라 다 같이 힘을 모아 한번 혼쭐을 내줘야 하는 거 아냐?’
‘맞아! 된통 당해봐야 함부로 남의 남자를 안 건드리지!’
‘절대 가만둬선 안 돼!’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진다.
우연찮게 마을을 찾은 용병들에게 돈을 쥐여 주며, 여인들이 키릴을 혼내줄 것을 청탁했던 것이다.
‘다른 건 필요 없고, 고년의 얼굴만 망가뜨려주면 돼.’
‘얼굴만으로 되겠어? 슬슬 봉긋하게 가슴도 올라오던데.’
‘맞아. 요즘 엉덩이 흔들고 다니는 꼴이 아주 제 잘난 맛에 사는 것 같더라니까?’
용병들은 두둑한 동전 주머니를 받으며 히죽 웃었다.
어리석은 여인들이었다.
다 큰 성인 남성도 아니고.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소녀 하나를 혼 내달라고 이런 돈주머니까지 쥐여 주는 꼴이라니.
‘걱정 마슈. 키릴인지 뭐지 하는 계집이 다시는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니.’
용병들은 키릴의 부친이 밭일을 나간 틈을 타 집으로 뛰어들었다.
‘누, 누구세요……?’
그리고 용병들이 본 것은 열두 살 난 자그만 꼬마가 아니었다.
키릴은 또래보다 성숙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뭐야. 이 마을에 이런 여자가 있었다고?’
용병들의 눈빛이 벌겋게 변했다.
그 눈빛을 보고 키릴은 앞으로의 일을 직감했다.
다급히 창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어딜!’
용병 하나가 키릴의 발목을 잡았다.
키릴은 용병의 손목을 깨물었다.
그러나 용병에게 따귀를 얻어맞고는 그대로 창밖을 날아 지면을 굴렀다.
‘조심해! 얼굴은 건드리지 말라고!’
애초에 마을 여인들에게 돈주머니를 받은 이유가 키릴의 얼굴을 망가뜨리는 것에 대한 대가였건만.
용병들의 머릿속에 이미 그런 것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굶주린 사내들이었다.
‘어이. 저거 도망치잖아!’
‘뛰는 폼이 꼭 사냥꾼을 마주한 토끼 같군.’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가 자길 사냥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으하하하하!’
용병들이 낄낄대며 키릴을 쫓았다.
키릴은 얼마 도주하지도 못하고 용병들에게 붙잡혔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키릴이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광경은 용병들의 욕정을 더욱 부추겼다.
‘내가 먼저!’
‘어이. 내가 먼저야!’
‘웃기는 소리 말라고! 내가 먼저…… 크허어억……!’
자기가 먼저라 소리치던 용병의 입에서 피 묻은 검이 삐져나왔다.
동료 용병이 찌른 것이었다.
키릴은 자신을 덮치려 했던 용병의 아귀처럼 벌어진 입과, 그 사이로 튀어나온 차가운 검을 보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검에 맞은 용병의 눈알이 좌우로 벌어졌다.
그러고는 털썩, 쓰러졌다.
‘별것도 아닌 새끼가. 내 언젠가 한번 손을 봐주려 했었지.’
시체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용병이 좌우를 둘러봤다.
그 사나운 모습에 나머지 용병들은 포식자를 마주한 동물처럼 시선을 피했다.
찌이이익……!
사내가 키릴의 옷을 찢었다.
키릴은 저항하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살해당한 용병의 얼굴이 머리에 각인돼 떠날 줄을 몰랐다.
그저 바들바들 몸을 떨뿐, 키릴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흐흐흐흐.’
그때였다.
‘키릴!’
밭일에서 돌아온 키릴의 부친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열린 창 너머로 키릴과 용병들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이 처죽일 놈들이!’
지금은 평범한 농부지만, 키릴의 부친은 한때 샹크리스 왕국에서 이름 깨나 날리던 용병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잘 손질된 그의 검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이 년의 아비인 모양인데?’
‘베어 버려! 어차피 일을 마치면 곧장 마을을 떠야 한다!’
키릴의 아버지는 용병들과 용맹하게 싸웠다.
피와 살점이 하늘 위를 날았다.
“헉……! 허억……! 헉……!”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자는 키릴의 아버지였다.
용병들은 모두 쓰러졌다.
‘크흐으……! 크흐으으으……!’
그의 눈은 악귀라도 씐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가 아직 숨통이 붙어 있는 용병들의 목에 검을 꽂았다.
‘크르르르릅……!’
모든 용병들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린 그가 키릴에게 눈을 돌렸다.
‘아버지……. 흐흑……! 아버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키릴이 상체를 일으켰다.
늦지 않게 나타난 아버지 덕에 키릴은 변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용병이 갈기갈기 찢어 놓은 옷은 어쩔 수 없었고, 그 바람에 키릴의 굴곡진 몸은 그대로 노출됐다.
아버지의 붉은 눈이 키릴을 똑바로 바라봤다.
키릴은 아버지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저런 아버지의 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낯익었다.
조금 전 키릴을 겁탈하려 했던 용병들과 똑같은 눈이었으니까.
키릴은 뒤돌아 달렸다.
짐승 같은 발소리가 등 뒤를 추격했다.
‘하아……! 하아……!’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처음 용병들이 나타났을 때, 키릴은 두려웠다.
그들이 도주하는 자신을 붙잡고 쓰러뜨렸을 때, 키릴은 숨이 멎을 것처럼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들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키릴……! 키리이이이일!’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또 헌신적이었던 아버지.
그랬던 아버지가.
‘키리이이이일!’
짐승처럼 돌변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
키릴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의 공포를 느꼈다.
주위 풍경이 새빨갛게 변했다.
내려앉는 공기가 바위처럼 무거웠다.
숨이 막혔다.
‘꺄아아아악!’
무언가 키릴의 머리채를 붙잡았고, 키릴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어 키릴은 오직 하나의 욕망에 모든 것을 내건 사내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봤다.
그의 무게가 느껴졌다.
키릴은 사지를 발버둥 쳤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키릴! 키리이이이일!’
사내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키릴은 손끝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의 손잡이를 쥐고 사내의 목에 꽂았다.
‘크허억……!’
사내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변했다.
아버지의 눈.
‘내, 내가 무슨 짓을……! 키릴……! 괜찮으냐 키릴……!’
키릴은 아버지의 목에 꽂힌 검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퀴르러르릅……!’
인간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거친 단말마를 울리며 아버지가 고꾸라졌다.
키릴은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걸었다.
저만치 죽어 나자빠진 용병들.
그 너머로 보였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으아악!’
‘꺄아아아아악!’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사이 마을 풍경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집이 불탔다.
사람들이 불탔다.
불에 타오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조금 전 용병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키릴에게 하려던 행위를 그들은 열성적으로 하고 있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자신의 몸이 불에 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그 행위를 계속했다.
그 사이로 보였다.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지만.
키릴은 본능적으로 그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악마’였다.
- 제물이 살아남고, 오히려 남은 자들이 음욕(淫慾)의 제물이 되었도다. 기구한 일이로군.
악마가 다가왔다.
시커먼 그림자 속으로 드러난 붉은 눈.
그 아래서 새빨간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두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키릴과 악마는 소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새하얀 군마를 타고.
백금빛 갑주를 몸에 걸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마을로 달려오고 있었다.
- 다리우스 크레센시아.
악마는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악마는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성기사들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가장 앞서 달리던 기사의 손에 창자루가 쥐어졌다.
그것에 눈부신 빛이 씌워지는가 싶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키에에에에에에!
어느새 창날은 악마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키릴은 진흙처럼 무너지는 악마의 모습을 봤다.
새까맣게 변색되는 키릴의 시야 속에서 음욕의 눈을 뜬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 뒤의 일은 키릴도 몰랐다.
그녀는 혼절했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 말끔하게 정돈된 방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으니까.
‘여긴…….’
그녀의 앞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키릴은 그가 기다란 창을 던져 악마를 처단했던 기사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 키릴은 자신이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내의 눈에선 음욕의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