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토너먼트 (1)
샹크리스 신성 왕국.
국민 대부분이 빛의 신 ‘포이베’를 믿으며.
그중에서도 믿음이 강한 이들은 성기사나 사제로 전직해 자신만의 광명을 따르는 곳.
‘빛의 신이시여!’
‘신도들에게 광명을!’
물론 아틸라가 지나쳐 왔던 이전의 왕국들도 종교는 있었다.
아틸라의 고향은 야만전사의 신 ‘티르’를 섬기는 곳이었고.
발루아, 아스투리아, 후마이야, 노르드, 그리고 나바라 왕국은 각자 믿고 싶은 신을 섬기는 자유 종교 국가였다.
그리고 샹크리스 왕국은 남부 대륙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빛의 신 포이베를 섬기는 ‘광명교(光明敎)’를 국교로 삼은 나라다.
‘태초에 빛이 있었으니!’
‘빛의 신 포이베야 말로 모든 신들의 으뜸이다!’
종교가 발달한 나라엔 몇몇 특징이 있다.
그중 하나가 종교를 표현하는 건축과 미술 등의 학문이 발달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증거하듯 샹크리스 왕국의 수도 ‘하르티칸’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곳은 예전과 변한 것 하나 없구나.”
바토리가 입가를 올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빛의 신 포이베를 상징하는 ‘광명의 문양’이 건물 곳곳에 미려하게 장식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가를 거니는 사람들, 병사들, 달칵달칵 소리를 내며 이동 중인 마차에서도 광명의 문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저기 저 교회 좀 보시오! 지붕이 저렇게 길고 뾰족할 수가 있는 거요!”
“흐에엣! 정말이네?”
호들갑을 떠는 오토와 카스피를 향해 바토리가 말했다.
“포이베의 신도들은 예부터 신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저 뾰족한 지붕 역시 포이베와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혀 보려는 열망의 발로인 게야.”
아틸라도 하르티칸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있었다.
물론 그의 감상은 오토나 카스피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곳 또한 내 상상 속 세계와 완벽하게 동일하다.’
패영전 세계 속에서도 특별한 지역에 진입할 때면, 아틸라는 늘 이런 종류의 놀라움을 느꼈다.
키릴은 나머지 네 사람과 달리,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화 임무를 위해 일곱 명의 성기사가 단에서 파견됐지만.
살아서 돌아온 건 키릴 혼자뿐이었으니까.
“키릴 님이다.”
“키릴 님이 돌아오셨어!”
키릴은 알아본 아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키릴은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그녀는 친절한 성기사였고, 그 나이대 아이들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검술과 외모를 갖고 있었으니까.
“이번 토너먼트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키릴 님이 참가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지!”
“맞아!”
아이들의 말대로, 지금 하르티칸은 토너먼트 시합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키릴을 알아보곤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키릴은 평소처럼 그들의 인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틸라가 말했다.
“그렇게 축 처져 있을 필요 없어. 넌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중급 악마가 두 마리 존재했던 걸 단에서 파악하지 못한 순간, 이번 임무는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넌 최선을 다했고 마을의 주민들을 지켜 냈지.”
아틸라의 말대로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는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
‘한 번 악마의 하수인이 된 자는 결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키릴 역시 알고 있는 사실.
그래서 그녀는 악마의 하수인이 된 이들을 아틸라 일행이 모조리 쓰러뜨렸고.
또 인간인 채로 살아남은 주민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르티칸의 백금빛 창날.
포이베의 가호를 받아 악마를 사냥하는 샹크리스 최강의 무력집단.
성(聖) 크레센시아 기사단.
“돌아온 건가 키릴. 그런데 함께 임무를 떠났던 이들은…….”
경비 임무를 맡은 동료 중급기사가 그렇게 묻다 말끝을 흐렸다.
키릴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 것이다.
“단장님은.”
“집무실에 계실 거다.”
창살문이 열렸고, 출입문 안으로 진입한 키릴은 즉시 집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일행은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의 단장, ‘다리우스 크레센시아’를 만날 수 있었다.
“키릴.”
다리우스는 키릴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그 역시 키릴의 얼굴을 보며, 함께 임무를 떠났던 자들의 최후를 짐작했다.
키릴은 다리우스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보고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다리우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틸라를 봤다.
‘저 사내가 홀로 중급 악마들을 쓰러뜨렸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중급 악마 크로셀은 강하다.
자신, 혹은 키릴 정도 경지에 오른 성기사가 아니라면 결코 상대할 수 없는 강자.
그런데 키릴의 말에 따르면 저 사내는 크로셀뿐만 아니라 벨페고르마저 쓰러뜨렸다.
그것도 마법진을 발동시켜 상급 악마에 준하는 힘을 지녔던 벨페고르를.
‘키릴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다.’
다리우스는 키릴을 믿었다.
키릴은 고결한 성기사였고, 또한 다리우스에겐 특별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리우스는 의심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대사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것 같네.’
‘메피스토펠레스가 말입니까?’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메피스토펠레스가 누군가의 손에 소멸당했다는 것이지.’
‘고위악마가 소멸당하다니. 설마 신께서……!’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네. 자네도 알다시피 신께서는 중간계에 대한 간섭을 극도로 꺼리시니 말일세.’
‘그렇다면……!’
‘같은 고위악마, 혹은 대악마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겠지.’
대사제의 마지막 말은 다리우스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아틸라를 보며 다리우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 사내가 바로.
‘그렇다면 모든 상황은 설명될 수 있다.’
다리우스는 키릴의 힘을 잘 알고 있다.
키릴의 마기 감지력은 최대로 잡아도 상급 악마를 판별할 정도.
고위악마의 마기는 감지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다리우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키릴의 이야기가 끝났다.
다리우스가 말했다.
“아틸라 경이라 하셨소.”
“그렇소.”
다리우스는 신중했다.
그는 성기사도 아닌 인간이 중급 악마를 둘이나 쓰러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만약 나의 가정이 사실이라면, 샹크리스 왕국은 이제껏 없었던 대재앙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다리우스는 머릿속에서 이는 끔찍한 생각에 몸을 떨었다.
고위악마.
심지어 대악마는 신보다 강력한 존재.
만약 저 아틸라라는 사내가 고위악마나 대악마 중 하나라면.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다리우스 경.”
아틸라의 목소리가 다리우스의 상념을 깨웠다.
“말해 보시오. 아틸라 경.”
“키릴 크레센시아를 며칠간 빌릴 수 있겠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리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더욱 놀란 건 키릴이었다.
“아틸라 경. 그게 무슨…….”
“나와 동료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샹크리스 왕국에 왔소. 그리고 목적을 이루려면 강력한 성기사의 힘이 필요하지.”
아틸라의 눈이 키릴을 향했다.
“키릴 크레센시아 같은.”
아틸라는 샹크리스 왕국에서 반드시 취해야 할 물건이 있다.
‘오르피나의 두 번째 성물.’
그리고 성물은 상당히 위험한 곳에 감춰져 있다.
아니, 본래는 그다지 위험한 곳이 아니었지만.
‘세계선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지금은 더없이 위험한 장소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곳에서 키릴의 힘은 분명 큰 도움이 된다.
“그건 곤란하오. 아틸라 경.”
다리우스가 말에 아틸라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난 키릴 크레센시아를 도와 중급 악마들을 쓰러뜨렸소. 나와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키릴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테지. 아울러 마을은 상급 악마로 거듭난 벨페고르의 아지트가 되었을 거요.”
“그건 인정하오. 그러나 크로셀과 벨페고르 같은 중급 악마들이 왕국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때, 키릴처럼 뛰어난 성기사를 내줄 수는 없는 일이오. 게다가 경은 키릴은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도 말하지 않았소.”
“바라키엘 신전.”
다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바라키엘(Barachiel).
빛의 신 포이베의 일곱 천사 중 하나.
전설에 따르면 포이베가 샹크리스 왕국을 세우는 과정에 몇몇 악마들의 훼방이 있었고.
그것을 막아 낸 것이 포이베의 일곱 천사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천사 ‘바라키엘’이었다고 한다.
바라키엘은 악마들을 마계로 내쫓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 역시도 악마들의 공격에 목숨을 잃게 되고.
소멸한 바라키엘의 육체는 신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것이 ‘바라키엘 신전’이다.
그러나 이것엔 아틸라만 아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아틸라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의 바라키엘 신전은 아주 높은 확률로, 악마의 소굴이 되어 있을 거다.
다리우스가 말했다.
“설마, 신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오?”
“그렇소.”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틸라 경! 바라키엘 신전은 금기의 성역. 신전 안에는 대천사 바라키엘이 물리쳤던 악마들의 마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소!”
다리우스의 말대로다.
바라키엘 신전 안에는 웬만한 성기사조차 접근을 꺼릴 정도의 마기가 드리워져 있다.
현재 바라키엘 신전을 드나들 수 있는 이는 오직 대사제뿐.
그러나 아마도, 얼마 전부터는 대사제조차 출입하지 못하고 있을 터다.
‘신전 안의 마기가 몇 배는 짙어졌을 테니.’
그것은 아틸라는 물론이고, 동료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위협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안전하게 신전 안으로 진입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키릴의 도움이 필요하다.
“단장께서도 지금쯤 알고 계실 것이 아니오. 바라키엘 신전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그걸 어떻게……!”
다리우스가 대사제에게 들은 건 메피스토펠레스에 관한 내용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리우스는 바라키엘 신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신전 안에만 머물던 마기가 바깥으로 방출되고 있네.’
다리우스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아틸라가 말했다.
“약속하지. 키릴 크레센시아의 힘을 빌려준다면 바라키엘 신전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겠소.”
어차피 오르피나의 성물을 얻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키릴이 말했다.
“허락해 주십시오 단장.”
“키릴!”
“전 아틸라 경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아틸라 경이 없었다면 샹크리스 왕국엔 이미 거대한 위협이 닥쳤을 것입니다.”
“허락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없었던 악마들의 등장. 바라키엘 신전의 위협. 그런 공교로운 시기에 아틸라 경과 그의 동료들이 왕국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포이베께서 안배하신 일일지도 모릅니다.”
다리우스 역시 알고 있었다.
바라키엘 신전의 위협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아틸라를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어떤 꾀를 냈다.
‘그래. 저자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저자가 만약 고위악마라면.
자신의 신변에 큰 위협이 닥쳤을 때만큼은 악마의 힘을 끌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리우스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건이 있소. 아틸라 경.”
“말해 보시오.”
다리우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열흘 뒤, 왕성에서 열릴 ‘토너먼트(Tournament)경기’에 참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