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85화 (185/425)

185. 악마와 성기사 (5)

“키릴!”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뒤를 돌아본 키릴의 눈이 부릅떠졌다.

성기사 하나의 가슴에 팔뚝만 한 검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주룩주룩 핏물을 흘리던 성기사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고는 늪처럼 진동하는 지면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천장과 벽에서 검은 가시가 마구잡이로 돋아났다.

콰득! 콰득! 콰드드드득!

키릴은 방패에 성력을 둘렀다.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악마는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어디로……!’

그러나 모습을 감춘 벨페고르를 찾을 겨를은 없었다.

이곳은 악마의 마법진.

벨페고르는 이 마법진 안에서만큼은 상급 악마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키릴은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상대해 본 악마는 중급 악마까지다. 단장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상급 악마는……!’

사방에서 찔러드는 검은 가시를 키릴이 방패를 들어 막았다.

과연 둥지를 튼 중급 악마는 강했다.

이제는 방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이 널찍한 공간이 벨페고르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놈은 자신의 마법진 안에 몸을 숨긴 채 야금야금 성기사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 발악해라. 더욱 발버둥 쳐라. 포이베의 권속들아.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벨페고르의 의지가 키릴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방향도, 거리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속에서 동료 성기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크허억……!”

“끄아아아아……!”

비명은 점차 잦아들었고,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 죽은 자는 어둠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벨페고르의 의지와 함께 여섯 개의 인영이 솟아났다.

그들 모두는 키릴에게 너무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정화 임무의 총책임을 맡았던 기사대장.

벨페고르의 공격으로부터 중급기사들을 지키려다 전사한 상급기사.

그리고 조금 전까지 키릴과 함께 서있던 네 명의 중급기사들.

끄어어……. 끄어어어어…….

벨페고르는 거짓의 악마.

그는 죽은 키릴의 동료들에게 거짓을 속삭여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서 돌아왔다.

결코 예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언데드의 몸이 되어.

키에에에에!

언데드 성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검과 방패 위엔 성력이 아닌 끈적한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키릴은 당황했다.

그녀는 지금껏 한 번도 동료들에게 살의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래서 키릴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검이 아닌 방패를 앞으로 뻗었다.

그녀는 공격 대신 방어를 선택했다.

콰앙!

키릴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벨페고르의 마법진은 언데드 성기사들의 힘을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만들었다.

“크흐윽……!”

날아가는 키릴을 향해 검은 가시들이 쇄도했다.

그대로 키릴의 몸을 벌집처럼 꿰뚫을 듯했다.

그러나 키릴은 키릴이었다.

그녀는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가시들을 방패로 막고, 검으로 비껴 내고, 몸을 틀어 회피했다.

그럼에도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을 순 없었다.

키릴의 몸 곳곳에서 핏물이 흩어졌다.

게다가 그녀는 아틸라에게 입은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전엔 두 명의 중급 악마와 싸우며 많은 힘을 소진했다.

그런 그녀에게 언데드 성기사들이 재차 달려들었다.

끼에에! 끼에에에에!

키릴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아니 죽는 것을 넘어 저 경멸스러운 악마의 손에 놀아나 영겁의 세월을 농락당할 것이다.

‘그럴 순 없다.’

키릴은 악마와 연관된 자신의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저들은 이제 자신의 동료들이 아니다.

악마의 권속이다!

키이이잉!

키릴의 검에서 눈부신 광명의 빛이 발산됐다.

그녀는 악마에 대한 증오가 남달랐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키릴이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왕국 최강의 성기사 중 하나로 인정받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은 그것이 너무도 과한 평가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아압!”

키릴의 검이 빛의 검무를 추었다.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여섯 마리 언데드가 잘린 고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키릴의 검은 언데드에게서 불사의 마력을 앗아 갔다.

광명검이 지닌 놀라운 힘.

‘불사결단(不死決斷)’의 성력이 발현한 것이다.

“으아아아아!”

키릴이 짐승처럼 소리쳤다.

그녀의 부릅뜬 눈에선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바닥에서, 천장과 벽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돌기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시체처럼 퀭했고, 손에는 식칼이나 갈고리 같은 조악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키릴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어머 성기사님.’

‘이걸 보십시오! 저희 마을의 특산품인 민물장어입니다요! 이거 드시고 기운 내셔서 얼른 악마 놈들을 그냥 콱!’

‘이 파이도 한 번 드셔 보시구려! 우리 며늘아기의 손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하하하하!’

정화 임무를 위해 도착한 자신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이곳 마을의 주민들.

‘나도 성기사 언니처럼 예뻤으면 좋겠어. 그러면 폴이 날 바라봐 줄까?’

심지어 좋아하는 남자아이에 대해 재잘대던 일곱 살의 어린 소녀까지.

그들 모두가.

벨페고르의 속삭임에 영혼을 잃고 권속으로 전락해 키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부드득, 키릴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손에 쥔 아밍 소드가 더욱 짙은 광명의 빛을 뿜었다.

* * *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

여관에 도착한 아틸라는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바토리와 카스피의 눈빛도 변했다.

오토만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기를 뜯고 있었다.

“이 집 고기 맛이 아주 일품이오! 하하하하하!”

카스피는 남몰래 귀안을 뜨고 여관 안팎의 사람을 살폈다.

그들 중에 악귀는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이상해. 악귀는 아니지만, 무언가가.”

그게 무엇인지 카스피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바토리가 속삭였다.

“악마의 속삭임에 당한 자들이 섞여 있는 것 같구나.”

“에엥? 악마의 속삭임이라니 그게 뭔 소리유?”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인간은 악마의 하수인이 된다. 그리고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지.”

“벨페고르인가.”

“그런 듯하구나.”

“벨페고르? 그 키릴인가 하는 성기사가 내내 주절거렸던 이름 말이야?”

키릴의 이야기가 나오자 카스피가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바토리가 물었다.

“넌 키릴, 그 아이가 싫은 것이더냐 카스피.”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그리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이냐.”

“…….”

“철혈귀검이 그 아이를 쳐다보는 음흉한 눈빛에서 혹 질투라도 느낀 것이더냐.”

“케헥! 켁!”

바토리의 말에 놀란 오토가 고깃 조각을 토해 냈다.

그 모습을 본 카스피가 짜증을 냈다.

“아 진짜 더러워 죽겠어 영주 나리! 그, 그리고 바토리! 내가 무슨 영주 나리를 질투한다는 거야!”

“철혈귀검을 질투한다는 말이 아니라, 키릴 그 아이를 질투하는 것이냐 묻는 것이다.”

바토리의 눈빛이 은근해졌다.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내심 카스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스피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바토리의 말대로, 그녀는 키릴을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토 때문이 아니었다.

“몰라. 다 아틸라 때문이야.”

“뭐라?”

바토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카스피. 철혈귀검이 키릴 그 아이를 음란한 눈동자로 쳐다봐서 질투하는 게 아니었더냐.”

“으, 음란한 눈동자라니!”

오토가 소리쳤지만 그 말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 늙다리 아저씨가 누굴 보고 헬렐레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느, 늙다리라니! 내 아직 마흔도 안 되었소!”

이번에도 오토의 말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바토리가 더듬거렸다.

“자, 잠깐. 정리를 좀 해 보자꾸나. 그러니까 카스피, 너는 철혈귀검에게 연심을 품었던 것이 아니라…….”

“뭐? 내가 미쳤어? 영주 나리한테 그런 마음을 품게!”

“그, 그럼 나바라 왕국에서 줄곧 둘이 붙어 다녔던 것은.”

“그건 순전히 의리 때문이지. 영주 나리가 지난번에 날 도와줬었으니까.”

바토리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토리는 카스피가 오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처음의 카스피는 아틸라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오토와 가깝게 지냈고.

게다가 나바라 왕국에서 둘의 관계를 보며 바토리는 내심 카스피와 오토를 응원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철혈귀검이 아니었어?’

바토리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아틸라와 카스피를 번갈아 쳐다봤다.

카스피는 비죽이 입술을 내밀며 생각했다.

‘나한텐 한 번도 그런 얼굴 표정 보인 적 없으면서.’

카스피는 아틸라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키릴이 아틸라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을 때, 아주 잠시지만 카스피는 아틸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표정은 카스피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살갑게 굴 때, 몇 번인가 아틸라가 내비쳤던 표정이었으니까.

‘바토리는 나보다 먼저 알게 된 사이니까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 여자 성기사는 오늘 처음 본 사이잖아.’

그래서 카스피는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키릴을 향해 콧구멍을 벌름대던 오토의 얼굴도 떠올랐지만 잠시였다.

그러나 카스피는, 아틸라뿐 아니라 오토의 행동 역시도 자신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하싸씬의 훈련장인 그녀는, 이런 면에서 무척이나 서툴렀다.

카스피의 고양이 같은 눈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 봐 아틸라.”

“뭘.”

“아까 그 여자 성기사가 너한테 눈웃음쳤을 때, 왜 그런 표정을 지었어?”

“뭐라?”

대답은 아틸라가 아닌 바토리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이어 아틸라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체.”

아틸라는 내심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답했다.

그러나 평소의 무심한 말투와 완전히 같은 것일 수는 없었고.

바토리가 그것을 감지했다.

“흐으으응……?”

바토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러고는 새초롬히 아틸라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번엔 아틸라가 당황했다.

바토리와 카스피가 동시에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주민들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엔 낫, 쇠스랑, 과도 등의 흉기가 들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하수인이 된 모습.

과도를 든 여자가 ‘키에엑!’ 소리치며 카스피에게 달려왔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여자에게 사슬낫을 투척하며 카스피가 다시 물었다.

“어서 말해 보라니까?”

사슬낫에 절단된 여자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쇠스랑을 든 사내가 바토리를 향해 달려왔다.

바토리 역시 표정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사내의 얼굴에 화염구를 선사했다.

흔적도 없이 얼굴이 날아간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래. 말해 보려무나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어느새 식당은 살기를 내뿜는 악마의 하수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틸라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아틸라는 자신을 노려보는 두 여인을 보며, 패영전 세계에 진입한 이후 가장 난감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부터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던 오토가 외쳤다.

“지,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요! 그렇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냔 말이오! 히이익!”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