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악마와 성기사 (4)
키릴은 굳게 입을 닫았다.
이유는 그녀도 몰랐다.
다만 키릴은 자신의 본능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자의 얼굴이 처음의 온화한 것으로 돌아왔다.
“어린 성기사야. 넌 오해를 하고 있다.”
“…….”
“너와 싸웠던 전사의 이름은 아틸라.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내가 보증할 수 있다.”
“보증이라고? 내가 당신의 무얼 보고 그 말을 믿어야 한다는 건가.”
키릴의 목소리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여자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꺼내어진 여자의 손안엔 휘황한 빛을 내는 백금빛 메달이 들려 있었다.
키릴의 눈이 부릅떠졌다.
“백조의 메달!”
키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조의 메달은 샹크리스 왕가의 상징.
그러나 여자의 생김새는 샹크리스 왕가와 아무 연관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네 생각이 내 눈에 훤히 읽히는구나. 그래. 넌 왕가의 사람도 아닌 내가 백조의 메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겠지. 모조품이라는 생각도 들 테고 말이다.”
아니다.
저건 모조품이 아니다.
키릴은 눈앞의 메달에서 느껴지는 포이베의 성력을 또렷하게 감지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생각이 무언가에 닿았다.
‘설마……!’
들은 적이 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샹크리스의 궁정 마법사를 지냈다는 전설의 마법사 ‘바토리 에르제베트’.
바토리의 놀라운 마법에 감탄한 당시의 샹크리스 국왕은 그녀에게 왕가의 상징인 백조의 메달을 선물했다.
‘이 메달을 샹크리스의 궁정 마법사 바토리 에르제베트에게 하사한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이 메달을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자에게만 전해야 할 것이며.’
‘또한 이 메달을 지닌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샹크리스의 귀한 손님이 되리라.’
키릴은 놀란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어낸 여자가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바토리 에르제베트다.”
* * *
키릴과 성기사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잠시 후 아틸라, 오토, 카스피가 아침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예정대로 끝난 거유? 바토리 아가씨.”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엔 모든 상황이 종료돼 있을 거라 바토리는 말했었고, 그대로 되었다.
키릴은 쭈뼛거리며 아틸라에게 사과했다.
‘내 이름은 바토리 에르제베트다. 그러나 네가 알고 있는 먼 옛날의 궁정 마법사 바토리 에르제베트와는 다른 존재지. 난 그녀의 먼 후손이자, 하나뿐인 혈육이다.’
바토리는 키릴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리고 키릴은 샹크리스 왕국의 성기사.
바토리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그녀의 동료인 아틸라에게 더는 적의를 드러낼 수 없었다.
또한 돌아온 아틸라에게서 더 이상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말대로, 나의 착각이었던 건가.’
바토리는 아틸라의 몸에서 마기가 느껴지는 까닭이 크로셀 때문일 거라고 키릴에게 말해 두었다.
크로셀은 물의 악마.
크로셀이 시전한 물의 마술에 강하게 타격당한 아틸라였기에, 잠시 동안 마기가 묻어났던 것이었다고.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조금도 마기가 감지되지 않으니, 바토리의 말이 사실일지도.’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예전에 슈시아가 느꼈던 것처럼, 아틸라의 몸에선 마기와 비슷한 기운이 뿜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틸라가 강해질수록, 조금씩이지만 짙어지고 있다.
원래는 바토리가 아틸라의 몸에 마력장을 시전해 그것을 막아 내고 있었지만.
알키미야에게 현자의 돌 수리를 맡긴 이후론 마력장을 해제했다.
‘현자의 돌이 없으니 잡기술 외의 마법은 쓰지 마라.’
아틸라의 말대로 현자의 돌을 잃은 바토리는 마력 사용을 자제해야 했고.
또 어차피 나바라 왕국엔 아틸라의 ‘그 기운’을 알아챌 이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키릴을 만난 것이었다.
키릴과 성기사들이 정신을 잃은 사이 바토리는 아틸라의 몸에 다시금 마력장을 둘렀다.
예상대로 키릴은 아틸라에게서 더는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대단한 검술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겨뤄 보고 싶군.”
키릴이 기사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아틸라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난 기사가 아니다.”
“기사를 가장 기사답게 만드는 건 고결함. 그런 면에서 그대는 사악한 중급 악마 크로셀을 쓰러뜨린 기사 중의 기사라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키릴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키릴의 소녀 같은 웃음을 보며, 아틸라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명색이 여주인공이었으니까.’
키릴 크레센시아는 패영전의 히로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바토리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설정했었으니.’
그래서 패영전의 독자들은 샤를이 키릴과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바토리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었다.
때로는 편을 갈라 댓글로 싸우기도 했다.
뒤늦게 인기몰이를 한 패영전 작가 김도현은 그런 독자들의 댓글을 보며 함께 고민하고, 또 즐거워했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 전에 이 세계에 끌려들어와 버렸군.’
샤를이 키릴과 이어지는지, 아니면 바토리와 이어지는지 아틸라는 몰랐다.
또한 남부 대륙 통일에 성공한 샤를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도 아틸라는 몰랐다.
아틸라는.
패영전의 작가 김도현은, 소설의 결말을 정해 놓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해 놓지 못했다는 편이 맞겠지.’
김도현은 책상 앞에 앉으면 홀린 듯이 글을 썼다.
때로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때도 있었다.
김도현은 패영전의 작가이자, 한 명의 독자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
조금 전의 웃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키릴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키릴은 여전히 아틸라를 경계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믿었고, 아틸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마기를 기억에서 지울 수 없었다.
아틸라는 흔들리는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일행은 다섯 성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말을 달리는 중이었다.
“또한 이번 크로셀 사건이 벌어졌던 마을이기도 하지.”
“크로셀 사건?”
아틸라가 물었다.
그 역시 크로셀이 어떤 계기로 성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마을 근처의 강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한 주민들이 성기사단에 연락을 주었다. 단의 수뇌부에선 물의 악마 크로셀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내렸지. 그래서 나를 포함한 일곱 성기사가 정화 임무를 맡고 출동했다.”
일곱 명이라.
아틸라 앞에 나타난 것은 키릴을 포함해 다섯 명.
그렇다면 둘은 크로셀과 싸우다 죽었다는 거로군.
‘혹은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부상을 입었거나.’
“그렇게 우린 강물의 수온을 조절하고 악천후의 환각을 일으키던 크로셀과 조우했다. 그 즉시 전투가 벌어졌고,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지.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이변이 벌어졌다.”
“이변?”
“그곳에 있던 악마는 크로셀만이 아니었던 거다.”
키릴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진을 갖춰 크로셀을 상대하던 일곱 성기사.
그들의 배후를 또 다른 중급 악마 벨페고르가 기습했다.
그 갑작스러운 습격에 기사대장이 큰 부상을 입었고, 상급기사는 목숨을 잃었다.
이후 벨페고르는 연기처럼 종적을 감췄다.
“벨페고르는 모습을 감췄지만 크로셀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놈을 상대할 이는 다섯 명의 중급기사뿐이었지.”
그때 키릴이 놀라운 무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성기사들은 크로셀을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고, 도주하게 만들었다.
‘쫓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다섯 명의 중급기사는 기사대장의 명을 따랐다.
추격은 어렵지 않았다.
크로셀은 물의 악마답게 강물 속으로 스며들어 도주를 시작했고, 그래서 성기사들은 강을 따라 달리는 것으로 크로셀의 흔적을 쫓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는 수 시간 뒤, 아틸라의 손에 반으로 갈려 죽은 크로셀과 재회했다.
“그래서 내가 벨페고르일 거라 추측했던 거로군.”
키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가 물었다.
“추가로 나타났던 악마가 벨페고르라는 증거는 있나.”
“놈은 검은 갑주를 입고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
중급 악마 벨페고르를 대표하는 모습이다.
키릴은 크로셀의 뒤를 이어 나타난 악마가 벨페고르라고 단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틸라의 생각은 달랐다.
‘벨페고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나바라 왕국에서 봤던 데스나이트를 떠올렸다.
도롱뇽의 브레스로 소멸시키긴 했지만, 데스나이트의 생명력이 대단히 질기다는 것을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한편 후미를 달리던 카스피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주 나리.”
“에, 엥? 불렀소?”
“뭘 그렇게 입을 헤벌리고 봐?”
“뭐, 뭐요?”
“아까부터 줄곧 저 여자 성기사만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대꾸도 않고.”
“부, 불렀었소?”
“참나 어이가 없어서. 아틸라도 그렇고, 영주 나리도 똑같아. 조금 예쁜 여자만 나타나면 그냥 눈이 벌게져가지고.”
“그건 아닌 것 같구나 카스피.”
바토리가 끼어들었다.
“철혈귀검이야 원래 그런 사내이고, 아틸라는 저 키릴이라는 여자 성기사에게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느니라.”
“워, 원래 그런 사내라니! 그건 또 무슨……!”
카스피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영주 나리가 문제라니까.”
“철혈귀검이 문제로구나.”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러는 동안 일행은 마을에 도착했다.
아틸라 일행은 먼저 여관 식당으로 향했고, 키릴과 성기사들은 교회로 달려갔다.
이 마을엔 빛의 신 포이베를 모시는 커다란 교회가 있다.
그리고 교회 안쪽의 널찍한 방 안엔 지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기사대장이 누워 있었다.
키릴과 성기사들을 보며 사제가 말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상태입니다. 강한 분이시니, 분명 며칠 안에 의식을 회복하실 수 있겠지요.”
성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키릴은 달랐다.
그녀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고, 전광석화처럼 사제의 가슴을 찔렀다.
“크헉……! 이게 무슨……!”
사제의 입과 가슴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기사들이 당황했다.
“키릴!”
“이, 이게 무슨……!”
그러나 키릴이 사제의 가슴을 찌른 것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군. 멀리 도망친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 숨어 있었나.”
키릴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거짓의 악마. 벨페고르.”
파랗게 질려 가던 사제의 얼굴이 변했다.
고통스러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무정물처럼 느껴지는 차가운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것의 아가리가 천천히 벌어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나쁜 웃음이 그 안에서 새어 나왔다.
방 안의 풍경이 변했다.
하얗던 벽과 천장이 검게 변색되고, 침상에 누워 있던 기사대장의 얼굴이 걸쭉한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이어 수면처럼 일렁이는 바닥 위에 기괴한 곡선과 붉은 문자들이 불온한 빛을 발했다.
키릴은 이 방 전체에 사악한 마법진이 새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대장이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