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악마와 성기사 (3)
공중에 떠오른 키릴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 날렵한 움직임은 마치 귀살의 힘을 각성한 카스피 같았다.
아니, 더욱 빨랐다.
‘이런 미친!’
벼락처럼 낙하하는 키릴을 향해 아틸라는 흑철방패를 뻗었다.
키릴 역시 등 뒤에서 방패를 꺼내 흑철방패를 내리쳤다.
카앙! 두 방패가 부닥치며 파괴적인 소음을 울렸다.
“더는 놓치지 않는다.”
놀랍게도 목소리는 아틸라의 머리 위가 아닌 아래쪽에서 들렸다.
아틸라는 반사적으로 흑철방패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키릴의 검이 한발 빨랐고, 용수철처럼 아틸라의 목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
피핏!
첨예한 파공음과 함께 핏줄기가 튀었다.
아틸라의 목에 길고 가느다란 상흔이 생겨났다.
치명상은 아니다.
아틸라는 그 와중에도 목을 비틀어 키릴의 공격을 피했다.
“과연 대단한 실력이군.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는 악마 따위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뭐라고?”
‘저게 지금 뭐라는 거야.’
아틸라는 어이가 없었다.
이어 하나의 가능성을 도출해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키릴을 비롯한 성기사들은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악마라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다짜고짜 공격했던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키릴처럼 발달된 성력을 지닌 성기사는 악마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틸라는 악마가 아니다.
“사람 잘못 본 것 같군. 키릴 크레센시아.”
키릴의 눈이 아주 살짝 동그래졌다.
“내 이름을 알아? 과연 중급 악마 ‘벨페고르’. 상당한 준비를 하고 인간계에 잠입했군.”
뭔 개소리야.
방금 네 동료 성기사들이 ‘키릴 크레센시아!’라고 외쳤었잖아.
그런데 잠깐.
“벨페고르라고?”
“모른척할 셈인가. 역시 거짓의 악마 벨페고르답군.”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아틸라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키릴이 검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쇄도하는 공격을 아틸라는 무휼로 막았다.
키릴의 눈빛이 가늘게 좁혀졌다.
‘교활한 악마 같으니. 성검 흉내도 낼 수 있는 건가.’
키릴이 아틸라를 악마라 단정하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키릴은 아틸라에게서 마기(魔氣)를 느꼈다.
이전에 슈시아가 직관의 힘으로 그것을 감지했던 것처럼, 키릴 역시 자신의 성력으로 아틸라의 불온한 기운을 포착했다.
게다가 키릴은 아틸라를 만나기 전, 크로셀뿐만 아니라 벨페고르와도 전투를 치렀었다.
거짓의 악마 벨페고르는 동료 성기사를 살해한 뒤 모습을 감췄다.
‘내가, 동료들의 복수를 하겠다.’
키릴의 검이 폭풍처럼 아틸라를 습격했다.
성기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백금빛의 아밍 소드(Arming Sword).
검날에 맺힌 포이베의 성력이 아틸라에게 짓쳐들었다.
아틸라 역시 성력을 두른 무휼로 상대의 공격에 대항했다.
아틸라는 감각했다.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실력이다.’
아틸라는 키릴의 실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전면 수정했다.
쓰러뜨리려면 쓰러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변한 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키릴이라도 샤를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아틸라는 생각했었다.
‘아니다.’
샤를보다 강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샤를보다 약하지 않다.
‘빌어먹을 메피스토펠레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메피스토펠레스와, 녀석을 이용한 사도 아자젤이다.
아니 어쩌면 ‘엘’이라는 녀석이 더욱 커다란 흑막일지 모른다.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에요. 김도현 씨.’
아틸라는 아자젤이 말했던 ‘그분’이 ‘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파캉!
키릴의 검세가 매서워졌다.
아틸라 역시 더욱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성기사들의 눈빛에 불안감이 번졌다.
‘벨페고르의 검술이 상상 이상이다.’
‘중급 악마 벨페고르가 저렇게까지 완성된 검술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언뜻 보면 키릴이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흑기사 벨페고르는 자신의 힘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악마 특유의 여유인 것인가.’
성기사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저 흑기사가 악마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성력은 아직 중급 악마의 마기를 제대로 감지할 수 없다.
다만 저 흑기사는.
‘중급 악마 크로셀을 죽였다.’
그것이면 의심의 여지는 충분하다.
성기사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도 키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성기사가 아닌 다음에야, 중급 악마 크로셀을 홀로 쓰러뜨릴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같은 악마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러나 이것 모두는 성기사들의 추측일 뿐.
그럼에도 성기사들은 저 흑기사가 악마라 확신했다.
키릴의 존재 때문이었다.
‘키릴이 흑기사에게 돌진했고, 악마라 특정했다.’
그들은 키릴을 믿었다.
아직 중급기사에 불과한 키릴이지만.
그녀가 상급기사와 기사대장을 넘어 단장급에 도달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래서 성기사들은 흑기사가 여유를 부리면서도 키릴과 대등한 싸움을 이어 가는 모습을 보며 불길함을 느꼈다.
‘벨페고르에겐 무언가 숨겨 둔 수가 있다.’
성기사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흑기사를 향해 맹렬하게 뛰어들었다.
“우리가 돕겠다! 키릴!”
벨페고르는 크로셀보다 강하다.
무엇보다 녀석이 크로셀을 찢어 죽인 것으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키릴은 당황했다.
동료 성기사들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 그들이 끼어드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 휩쓸기 ]
아틸라의 흑철검이 네 명의 성기사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그러면서도 무휼은 키릴의 공격을 방어하고, 반격했다.
키릴은 자신이 상대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포이베를 향해, 눈앞의 비열한 악마 벨페고르를 처단할 수 있는 힘을 갈구했다.
고오오오오.
키릴의 아밍 소드에 더욱 강한 성력이 덧씌워졌다.
한편 아틸라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신을 벨페고르라 여기는 것에 슬슬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물론 중급 악마 벨페고르는 강하다.
그러나 아틸라는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마저 쓰러뜨린 사내다.
“받아라! 벨페고르!”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이 네놈을 처단하겠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성기사들이 재차 달려드는 것을 보며 아틸라는 참는 것을 포기했다.
[ 도약(跳躍) ]
지면을 짓밟은 아틸라의 몸이 성기사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성기사들이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 어디로 간 것인가!”
“악마 벨페고르가 사악한 마술을 부렸도다!”
“어찌 이런 사악한 술수를……!”
그러나 키릴만은 보았다.
아니,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첨예한 감각과 성력이 아틸라의 몸에서 발하는 마기의 이동을 탐지했다.
“위!”
키릴의 눈이 하늘 위를 향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흑기사가, 이번엔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며 엄청난 속도로 낙하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흑기사의 발이 지면을 밟았고,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흐에에엣!”
“으, 으힉! 우리 모두를 죽일 셈이요 아틸라 님!”
오토와 카스피가 호들갑을 떨며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둘은 아틸라의 충격파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바토리의 보호막 덕분이었다.
‘흐응. 생각보다 재주가 뛰어난 노움이었구나.’
현자의 돌을 보며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바토리는 현자의 돌의 숨겨진 기능을 이용해 평소보다 더욱 강력한 보호막을 생성했다.
그러나 성기사들에겐 보호막이 없었다.
“크허어억……!”
그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사방으로 날아갔다.
단련된 본능으로 방패를 뻗어 막았기에 치명상을 면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키릴은 이번에도 몸을 띄워 직접적인 충격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도약의 충격파는 발 구르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키릴은 성력을 방패에 집중한 채 최대한 몸을 웅크려 충격을 견뎠다.
놀라운 반사 신경과 판단력, 그리고 포이베의 성력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그녀의 저항은 여기까지였다.
“날다람쥐처럼 잘도 피하는군. 키릴 크레센시아.”
아틸라의 손아귀가 키릴의 방패를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키릴의 상체가 노출됐고, 아틸라는 무릎에 힘을 실어 그녀의 복부를 가격했다.
“크흐윽……!”
키릴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 키릴은 충격파를 견디기 위해 모든 성력을 방패에 집중했다.
그래서 아틸라의 무릎 공격에 강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키릴은 복부를 보호할 수 있는 흉갑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아틸라나 오토의 것 같은 완전한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틸라의 일격을 흡수할 정도는 결코 되지 못했다.
아틸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키릴의 투구 너머 가지런히 묶인 머리채를 쥐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
얼마나 충격이 강했는지 키릴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투구와 방패가 지면에 흩어졌다.
키릴은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흑철검의 서늘한 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계속할 텐가. 키릴 크레센시아.”
저만치 널브러진 성기사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것을 느끼며 키릴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나 키릴 크레센시아가 악마 따위에게……!”
“그러니까, 난 악마가 아니.”
“날 죽여라 벨페고르! 살려 두어서 무슨 추악한 짓을 할 셈인가! 난 샹크리스 신성 왕국의 성기사 키릴 크레센시아! 악마의 욕정에 더럽혀지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택……!”
퍼억!
아틸라의 주먹이 키릴의 복부를 후려쳤다.
키릴의 입에서 울컥 핏물이 솟았고, 온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적을 영접하며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아틸라가 내뱉듯 말했다.
“씨발 악마 아니라니까.”
* * *
키릴이 정신을 차렸을 때, 동녘 하늘엔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단단히 포박됐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이건 평범한 밧줄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는 붉은빛의 실.
그것이 거미줄처럼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이제 깨어났느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신비로운 목소리가 키릴의 귀에 스몄다.
키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목소리의 방향을 바라봤다.
과연, 저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낼 수 있을법한 외모의 여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당신은.”
“난 마법사다.”
“마법사…….”
키릴은 자신의 몸을 포박한 이가 저 여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 네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인간 전사’의 동료이기도 하지.”
“놈은 인간 전사가 아니다.”
키릴의 시선이 흑기사를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키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포박돼 나무에 묶인 동료 성기사들을 발견했다.
“죽지 않았으니 염려 말거라.”
“넌 악마가 아니로군. 그런데 왜 악마와 함께하고 있는 거지?”
“말했듯이, 그는 악마가 아니란다. 한 명의 인간 야만전사일 뿐이지.”
“너는 속고 있다. 녀석은 추악하고 비열한 악마…….”
그렇게 말하던 키릴의 입이 얼어붙었다.
여자의 눈빛에서 가공할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무슨 살기가……!’
키릴은 지금껏 한 번도 저런 살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서늘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한 번 더 그를 모욕하는 발언을 한다면,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래서 키릴은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