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악마와 성기사 (2)
아틸라는 흑철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놀랍게도 강물과 부닥친 방패에서 카앙! 하는 소리가 났다.
평범한 강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콰르륵. 콰륵.
지면에 떨어진 강물이 보다 명확한 형태를 그렸다.
긴 날개를 가진 거대한 여인의 형상.
아틸라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크로셀?’
크로셀(Crocell).
패영전에 등장하는 중급 악마 중 하나로.
물을 다루는 악마다.
‘크로셀이 왜 이곳에.’
악마가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강력한 소환진과, 그에 걸맞은 제물이 필요하다.
‘게다가 크로셀은 중급 악마.’
중급 악마는 하급 악마와 그 결이 다르다.
하급 악마 중엔 악마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녀석도 존재하지만.
중급에선 약체 따위 찾을 수 없다.
그런 중급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진과 제물이라면.
‘아니다.’
아틸라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의 소환에 응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이 세계선의 경계를 흐트러뜨렸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틸라의 가정은 사실로 드러났다.
[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 침입악마(侵入惡魔) ]
‘소환악마가 아닌, 침입악마다.’
[ 첫 번째 임무 ]
[ 밤의 강물을 타고 등장한 중급 악마, 크로셀을 처치하십시오. ]
[ 임무 완료 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아틸라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래. 이제 본격적으로 악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건가.’
크로셀의 등 뒤에서 활짝 날개가 펼쳐졌다.
반은 액체, 반은 고체의 성질을 지닌 그것이 아틸라를 향해 휘둘러졌다.
아틸라는 흑철방패를 뻗었고, 그 위로 날카로운 물의 화살비가 부닥쳤다.
아틸라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렸다.
방패를 치워 낸 아틸라는 시체처럼 새하얀 얼굴에 긴 은발을 흩날리는 중급 악마 크로셀이 얼음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다.
카앙!
흑철검이 얼음칼을 막았다.
크로셀의 동공 없는 하얀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크로셀이 파충류처럼 크게 입을 벌렸다.
벌린 입속으로 톱날처럼 뾰족한 이빨이 보였고, 그 안에서 얼음 가시가 쏟아졌다.
그러나 아틸라는 패영전의 원작자.
크로셀의 공격법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당할 것 같냐!’
아틸라는 상체를 숙여 얼음 가시를 피한 뒤, 크로셀의 복부를 방패로 후려쳤다.
카악! 비명을 지르며 크로셀이 뒤로 날아 강물 속에 빠졌다.
그곳에서 부글부글 강물이 끓어올랐다.
아틸라는 크로셀이 자신의 장기인 ‘수온 조절의 술(術)’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취이이이익!
펄펄 끓는 강물이 기다란 채찍이 되어 아틸라를 습격했다.
뜨거운 액체와 기체가 아틸라의 몸을 휘감았고, 그의 얼굴에 화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틸라는 개의치 않고 크로셀을 향해 전진했다.
그리고 시전했다.
[ 돌진(突進) ]
아틸라의 신형이 크로셀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로셀도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등 뒤의 두 날개를 접어 아틸라의 공격을 막았다.
아니, 막으려 했다.
파드득!
크로셀의 가슴에 흑철검이 꽂혔다.
크로셀이 쩌억 입을 벌리며 얼음 가시를 쏘아 내려 했지만 그전에 무휼이 놈의 입안에 틀어박혔다.
검은 핏물을 쏟아내는 크로셀의 복부를 아틸라가 걷어찼다.
더욱 깊은 강물을 향해 날아가려는 크로셀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아틸라는 뒤로 업어치듯 크로셀을 지면에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강물이 폭발물처럼 터져 올랐다.
아틸라가 시전한 스킬 때문이었다.
[ 도약(跳躍) ]
아틸라는 공중 최고점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크로셀은 중급 악마.
어지간한 공격으론 죽지 않고, 움직임 또한 재빠르다.
[ 타점을 특정합니다. ]
그래서 아틸라는 도약을 시전하는 것과 동시에 크로셀의 가슴을 타점으로 잡았다.
역시나 크로셀은 벌써부터 몸을 뒤집으며 반격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가 빨랐다.
콰앙!
아틸라의 두 발이 크로셀의 복부를 짓밟았다.
역수로 쥔 흑철검은 크로셀의 목 한가운데에 꽂혔다.
가공할 위력의 충격파가 일었다.
그것이 크로셀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카아아아아악!
크로셀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산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시커먼 강물이 적의를 드러내며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그래. 쉽게는 안 죽겠다 이거냐.’
아틸라는 흑철방패를 크로셀의 이마에 세로로 꽂았다.
그러고는 무휼을 들어 크로셀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 축성의 인장이 발동합니다. ]
그 사이 넘쳐 오른 강물이 아틸라의 배후를 습격했다.
무휼의 성력은 그리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아틸라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크로셀은 물의 악마.
저 강물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넘어, 크로셀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킬 것이다.
[ 모든 성력을 무휼의 절삭력에 집중합니다. ]
무휼에서 파릇한 예기가 뿜어졌다.
그것을 본 크로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아틸라는 크로셀의 미간에 무휼을 꽂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놈의 가랑이를 향해 힘껏 내리그었다.
카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크로셀의 몸이 반으로 쪼개졌다.
아틸라의 등 뒤를 습격하던 시커먼 강물도 반으로 갈라졌고, 지면에 흡수됐다.
아틸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로셀은 죽었다.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새로운 전투 스킬이 개방됩니다. ]
‘오. 새로운 스킬.’
새로운 전투 스킬은 언제나 환영이다.
[ 발 구르기 ]
‘발 구르기?’
[ 지면, 혹은 그와 비슷한 지물 위에 힘껏 발을 굴러 일정 반경 내에 강력한 진동을 발생시킵니다. ]
[ 진동에 노출된 대상은 일정 시간 평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민첩 능력이 10% 감소합니다. ]
‘이놈의 일정 반경. 일정 시간. 하여튼 불친절한 시스템 같으니.’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어 새하얀 군마를 탄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아틸라 앞에 멈춰 섰다.
“저, 저건?”
아틸라 밑에 반으로 갈려 널브러진 크로셀을 보며 기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의 눈이 아틸라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동시에 검을 뽑아 아틸라를 겨눴다.
“정체를 밝혀라.”
아틸라는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이름을 말한다고 너희가 알기는 하냐.”
“닥쳐라!”
기사들은 제법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아틸라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새하얀 군마를 탄 백금빛 갑주의 기사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다시 묻겠다. 정체를 밝혀라.”
아틸라는 기사들의 갑주에 얼룩진 살점과, 검은 핏물을 발견했다.
피식 입가를 올렸다.
“그렇군. 이 크로셀은 너희의 사냥감이었던 건가.”
성기사들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역시 네놈은!”
그들의 검이 동시에 아틸라에게 뻗어졌다.
빌어먹을.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다니.
아틸라는 어이가 없었다.
전방에서 날아드는 네 자루 검을 보며 휩쓸기를 시전했다.
[ 휩쓸기 ]
그러면서 그는 크레센시아의 성기사들이 이렇게 무례한 이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생각을 마무리 짓기 전에 흑철검이 성기사들의 검을 튕겨 냈다.
검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팔이, 어깨가, 그들이 타고 있던 백마들이 이히힝!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야만전사야!”
“아틸라!”
“이, 이런 미친놈들이 감히 아틸라 님을!”
전투의 소란을 감지한 바토리, 카스피, 오토가 말을 달려왔다.
스르릉, 오토가 검을 뽑았다.
카스피의 눈은 벌써부터 붉은 귀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의를 드러내는 이가 있었다.
바토리였다.
말끔하게 수리된 현자의 돌을 지닌 바토리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살기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양손에 마력을 집약하고 있었다.
‘미친 할망구.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겠군.’
“멈춰!”
아틸라는 한 손을 뻗어 동료들을 막았다.
이곳은 샹크리스 왕국이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과 필요 이상으로 마찰을 빚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순간 아틸라는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정면의 성기사들 너머로,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는 매끄러운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아틸라는 무휼을 들었다.
완전한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새하얀 빛이 아틸라의 시야를 덮었다.
아틸라는 저 기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광명검(光明劍)!’
파캉! 광명검과 무휼이 부닥치며 우렁찬 소음을 뿌렸다.
아틸라는 무휼을 쥔 왼팔이 강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엄청난 힘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힘이 아니다.
성력(聖力)이다.
‘광명검이 이렇게 강하다고?’
아틸라는 놀랐다.
물론 크레센시아의 성기사는 강하다.
그중에서도 광명검을 발할 수 있는 자들은 대부분 영웅의 단계에 근접한 자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틸라를 이렇게까지 당황하게 만들 수 없다.
그 상대가 샹크리스의 최강자이자 패영전의 여주인공인, ‘키릴 크레센시아’라 할지라도!
“키릴!”
“키릴 크레센시아!”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난입에 그들 역시 크게 놀란 듯했다.
그럼에도 키릴은 멈추지 않았다.
더욱 강력하게 광명의 힘을 발하며 아틸라를 습격했다.
‘이런 미친……!’
아틸라는 크게 소리쳐 동료들의 참전을 막았다.
동료들이, 특히 바토리가 이 전투에 참여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테니까.
그러면서 아틸라는 키릴의 무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무리 키릴 크레센시아라고는 하지만 너무 강하잖아 이건!’
물론 이유는 짐작 가능했다.
성기사는 빛의 신 포이베의 가호를 받으며 강해지는 존재.
그리고 포이베는 신도들의 믿음이 강할수록 더욱 강력해진다.
‘지금의 포이베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엄청난 믿음을 받고 있는 거다.’
그건 저만치 죽어 나자빠진 중급 악마 크로셀,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강해진 건가. 키릴 크레센시아.’
쓰러뜨리려 한다면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아틸라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녀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선.’
조금 전 크로셀을 쓰러뜨리며 얻은 새로운 스킬.
아틸라는 그것을 시전하기로 했다.
[ 발 구르기 ]
아틸라의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지면을 밟으며 강력한 진동을 발했다.
[ 진동에 노출된 대상은 일정 시간 평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민첩 능력이 10% 감소합니다. ]
“흐억! 이, 이게 뭐야!”
“지, 지진인가……!”
“갑자기 몸이 말을……!”
진동에 노출된 성기사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발 구르기의 사정거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성기사들의 몸에 격렬한 진동을 선사할 만큼.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
아틸라가 발 구르기를 시전하기 직전, 무언갈 감지한 키릴은 나비처럼 공중으로 솟아올라 그것을 회피했다.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피했다고? 그 짧은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