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81화 (181/425)

181. 악마와 성기사 (1)

어느새 해는 땅속으로 숨었다.

일행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마침 옆을 흐르는 널찍한 강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물고기가 많이 있었다.

실력 발휘를 하겠다고 강물 속에 뛰어든 오토는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왔다.

그 사이 아틸라는 모닥불을 피웠고, 잠시 후 나뭇가지에 꿰인 물고기들이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노릇노릇 익었다.

밤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바토리가 입술을 떼었다.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의 어린 시절, 난 왕국을 찾아온 두 명의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토리는 그날을 회상했다.

세월을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날의 일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엘’과 ‘아자젤’.

‘엘’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밤하늘처럼 검고 긴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진 장신의 사내였고.

‘아자젤’은 엘과는 대조적으로, 자그만 키에 붉은 눈을 지닌 어린 소년이었다.

그날, 그들이 왕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왕과의 면담 이후 한동안 왕성에 머물렀고, 바토리와 가까워졌다.

아틸라가 물었다.

“엘과 아자젤? 그 붉은 눈의 꼬마의 진짜 이름이 아자젤이라는 건가.”

“그것이 진짜 이름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 소년은 내게 자신을 아자젤이라 소개했지. 당시 왕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소개와 상관없이 붉은 눈의 귀공자라 불렀지만 말이다.”

“그럼 아포스톨로스는?”

“그 역시 엘과 아자젤이 자신들을 가리켜 말하던 이름이다. 그러나 아포스톨로스는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의 언어. 지금의 대륙 공용어로 번역하자면 ‘보냄을 받은 자’, 즉 ‘사도(使徒)’라 부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바토리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포스톨로스, 아니 ‘사도’라 자신을 소개한 두 남자는 왕성에 머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자젤은 말수가 적었다.

표정도 거의 없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인형을 보는 듯했던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런 아자젤과 달리 엘은 사교적인 사내였다.

그는 바토리를 상당히 귀여워했다.

‘바토리.’

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을 바토리는 좋아했다.

바토리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를 바토리라 불러 주는 이는 왕성에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녀를 공주라 불렀고.

왕성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과 마법사, 기사들 역시 그녀를 공주라 불렀다.

바토리에겐 형제자매가 없었기에 그냥 ‘공주’라 부르면 누구나 바토리를 칭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아주 어릴 적,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던 리베르 파테르가 유일하게 ‘바토리’라는 이름을 불러 주던 이였지만.

어느 날 기사단장에게 호되게 혼이 난 이후, 그마저도 바토리를 공주 전하라 부르기 시작했다.

‘리베르. 아무도 없을 땐 예전처럼 이름을 불러 주면 안 돼?’

바토리가 그렇게 물을 때면 리베르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바토리 공주 전하’라고.

그러던 중 엘이 나타났다.

그리고 엘은 ‘바토리’라는 그녀의 이름을 똑바로 불러 주었다.

바토리는 엘에게 호감을 느꼈다.

‘엘은 어디서 왔어?’

‘아주아주 먼 곳에서.’

‘아자젤은? 아자젤도 같은 곳에서 온 거야?’

‘같은 곳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피. 그게 뭐야. 같은 곳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니.’

‘우리가 같다고 생각하는 곳이 때론 다른 곳이기도 하고, 다르다 여겼던 곳이 때론 같은 곳이기도 하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엘?’

‘바토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언젠가? 그게 언젠데?’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러고 나면 분명 바토리도 알게 될 거야.’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라면 얼마큼인데?’

‘사르데니야 왕국 위에 또 다른 왕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제국이 되고, 또 그것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때쯤?’

‘뭐야. 그러려면 수백, 아니 수천 년은 지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때까지 살 수 없는걸.’

그 말에 엘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바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야. 바토리.’

그 후로도 엘은 틈날 때마다 바토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왕성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 사르데니야 왕국 너머엔 그런 세상이 있는 거야?’

‘응. 난 크리엘도라 대륙의 모든 곳을 가 봤어. 몬스터들의 땅 수해.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괴수들의 땅 칼날 산맥. 먼 북쪽의 거인들과 설인들. 그리고 죽음의 땅까지도.’

‘와아.’

바토리는 입을 헤벌리며 엘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직 사르데니야 왕성만이 자신이 아는 세계의 전부였던 그녀에게, 엘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롭고 또 신비로웠다.

그녀가 왕성을 떠나, 아니 사르데니야 왕국의 국경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게 만들 정도로.

‘엘은 드래곤을 본 적이 있어?’

‘하하 물론이지 바토리. 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을 봤어.’

‘그럼 다크 드래곤은? 다크 드래곤도 봤어?’

‘다크 드래곤이라. 암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말하는 거라면, 봤지.’

‘정말? 그런데 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광룡이라 불리는 거야? 왜 다른 드래곤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 불리는 거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여타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거든. 그래서 특별한 존재라 불리는 거야.’

‘어떤 방식으로 태어났는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줘도 지금의 바토리는 이해하기 힘들 거야. 아무튼 그 탓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정신세계는 불안정하게 성장했고, 다른 드래곤들보다 괴팍한 성정을 갖게 되었어. 심지어 동족을 잡아먹기도 했지. 그것이야말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광룡이라 불리게 된 배경이야.’

‘나도 보고 싶어. 나도 엘이 본 많은 것들을 직접 두 눈에 담고 싶어. 끝없이 펼쳐진 바다도, 백색의 칼날 산맥도, 몬스터들의 땅 수해도, 그리고 거인, 설인, 드래곤도! 모두 다 보고 싶어!’

바토리의 외침에 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분명 이룰 수 있게 될 거야. 바토리.’

‘정말?’

‘응. 전에도 말했지만,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로부터 머지않아 엘과 아자젤은 사르데니야 왕성을 떠났다.

바토리가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내 말을 기억해, 바토리.’

엘은 마지막으로 바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 말한 바토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틸라, 오토, 카스피, 그리고 펀치와 도롱뇽마저 홀린 듯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틸라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왜냐하면 지금 바토리가 들려준 이야기는 패영전 원작자인 그도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엘과 아자젤. 그리고 아포스톨로스……, 아니 사도라 불리는 자들이라.’

이후 바토리는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사르데니야 왕국을 침공하고, 소멸시킨 이야기를 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오토와 카스피가 도롱뇽과 바토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도롱뇽은 고개를 돌린 채 애써 무시하는 얼굴이었고, 바토리는 그저 덤덤하게 그날의 일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바토리는 자신의 목표인 사르데니야 왕국 부활에 대한 이야기와 그것을 위해 새로운 주신을 찾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승천자에 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틸라와 바토리, 두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부분만은 마음속에 숨겨 둔 채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 * *

아틸라는 술병을 홀짝이며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체력 수치가 높은 그는 극히 적은 시간만 수면을 취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일행과 야영을 할 때마다 불침번은 아틸라의 몫이었다.

물론 그의 동료들이 아틸라의 사기적인 육체 능력을 이용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틸라 님! 혼자 불침번을 서겠다니!’

‘마, 맞아 아틸라. 그렇게 계속 잠을 자지 않다간 픽! 하고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고!’

그러나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자는 동료들의 말을 무시한 건 아틸라 쪽이었고, 그 덕에 일행은 언젠가부터 편안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사실 아틸라는 이 시간이 좋았다.

모닥불 앞에서 홀로 술병을 비우며 별하늘을 바라보고, 풀잎이 사각대는 소리를 느끼며 밤공기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이 시간만큼은, 그는 오롯이 지구에 대한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벌써 2년인가.’

패영전의 시간법으론, 아틸라가 이 세계에 진입한 지 벌써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틸라의 신체 나이는 18살이 되었다.

지구에서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이곳과 마찬가지로 2년이 흐른 걸까.

그렇다면 병원에 계신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혼자 있을 고양이 녀석은.

‘밥 줘야 하는데. 화장실도 치워 줘야 하고.’

나바라 왕성에서 술은 충분히 가져왔기에 아틸라는 물 마시듯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이렇게 술을 마셔도 아틸라는 취하지 않았다.

패영전 세계에 진입한 이후, 아틸라는 단 한 번도 취기를 느낀 적이 없다.

이 역시도 높은 체력 수치 때문일 테지.

‘체력이 좋은 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야.’

아틸라는 잠든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전부는 아니지만,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의 대부분을 이들에게 말했다.

바토리 역시 대부분의 일을 동료들에게 전했다.

아틸라는 바토리가 카르타고를 관조했던 이유와, 현재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유를 알고 있었고.

조금 전 그녀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자신의 눈치를 살폈던 것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바토리는 그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바토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자신이 패영전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아틸라의 발달된 청력이 무언갈 감지했다.

사르륵. 사륵.

강물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소음이 들렸다.

그것은 매우 작고, 또 바람 소리와 비슷했다.

무언가의 발소리.

또한 아틸라 정도의 감각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쉬이 감지할 수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이. 야만 미물.”

도롱뇽 역시 그것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아틸라는 잠든 바토리와 오토, 카스피의 얼굴을 내려 봤다.

이곳이 여관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깊이 잠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틸라가 불침번을 서는 야영지에서는 오히려 숙면을 취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아틸라가 불침번을 서고 있다는 것만큼 심적 안정감을 주는 것은 없었으니까.

“넌 여기 있어라.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으면 다들 깨우고.”

아틸라는 무기를 들고 소리를 향해 발을 움직였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던 발소리가 어느 순간 멎었다.

그것에 상관없이 아틸라는 발을 움직였고, 시커멓게 흐르는 강물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 강물의 일부가 허공으로 치솟으며 무언가의 형태를 그렸다.

그것이 아틸라를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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