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아틸라의 이야기
“그래서 말이요! 나에게 달려드는 두 기사를 그냥 딱! 따악! 전광석화처럼 쓰러뜨렸다는 거 아니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소? 혼자서 두 명의 기사를 동시에 상대해 이겼다는 거요! 그것도 룽겔 가문의 정예 기사를! 으하! 으하! 으하하하하!”
오토는 틈만 나면 룽겔 공작의 두 기사와 2 대 1 결투를 벌인 일을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룽겔 연합군과의 대전쟁에서 무려 일곱 명의 기사를 낙마시켰다며 큰소리쳤다.
그러나 오토는 대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오토의 동료 중 그 말을 듣고 감탄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영웅의 면모를 개화한 오토는 일반인 중에선 상대 가능할 자가 없는 강자였지만, 이 파티에선 여전히 최약체에 불과했으니까.
듣다 못한 도롱뇽이 쩌억 하품을 하며 말했다.
“어이 종복 미물.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있는 거냐.”
“뭐, 뭣이?”
도롱뇽의 눈이 배시시 가늘어졌다.
“야만 미물은 룽겔 공작성에서 기사 넷과 동시 결투를 해서 쓰러뜨렸다. 아니 마음만 먹었다면 네 명이 아니라 열 명 이상도 충분히 가능했겠지.”
“…….”
“그뿐인 줄 아냐. 난 이 송곳니 하나로 검은 보석에 지배된 식인마 일곱 마리를 처단했다. 물론 키메라 녀석의 도움이 아주 쪼오끔 있긴 했지만, 사실상 녀석은 별달리 한 게 없어. 나 혼자 처리했다 봐도 무방하지.”
“뭣이라? 너 혼자 일곱 마리 식인마를? 거, 거짓말하지 마라 이 요망한 도마…… 켁! 히익! 미친 도마뱀 새끼가 또 날 공격한다아아!”
오토의 얼굴에 잔뜩 할퀸 상처를 만들어 낸 도롱뇽이 킁! 콧방귀를 뀌며 펀치의 등으로 돌아왔다.
오토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빌어먹을. 그냥 남아서 왕 노릇이나 할 걸 그랬나.”
“지금도 안 늦었으니 돌아가던가.”
“히익! 노, 농담이었수! 아틸라 님!”
“줏대 없는 새끼.”
나바라의 북쪽 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샹크리스의 영역에 들어섰다.
샹크리스 왕국.
아니 ‘샹크리스 신성(神聖) 왕국’은 크리엘도라 남부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성기사를 대거 육성할 수 있는 나라다.
이유는 왕국의 탄생 설화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는데.
신계(神界)에서의 삶에 지루함을 느낀 빛의 신 ‘포이베’가 몇몇 천사들과 함께 중간계로 내려와 만든 왕국이라는 것.
당시 포이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크레센시아 샹크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따라서 지금의 왕가인 샹크리스는 포이베의 후손이라 알려져 있다.
한편 포이베와 함께 강림한 천사들은 포이베의 절대적 권능이자 그들의 신성한 힘, ‘광명(光明)’을 샹크리스의 인간들에게 전했고.
힘을 전수받는 것에 성공한 몇몇 축복받은 자들은 성기사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성(聖) 크레센시아 기사단’, 다른 말로는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이 탄생했다.
“그런데 아틸라. 성기사라는 자들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카스피가 물어왔다.
성기사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성기사의 강함에 대해서는 카스피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강하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에 드리운 어둠의 힘이 짙어질수록 더욱 강한 힘을 보이는 자들이지.”
“어둠의 힘?”
“본디 신이란 자신을 추앙하는 신도가 많을수록, 그리고 신도들의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족속이다. 그건 성기사들에게 빛의 가호를 내리는 포이베 역시 마찬가지지.”
카스피가 알았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아! 세계에 드리운 어둠의 힘이 짙어질수록 포이베를 추앙하는 신도들의 믿음은 강해질 테고, 그것이 포이베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포이베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의 힘 역시 강해진다는 이야기네! 맞지? 아틸라!”
“정답이다.”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카스피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그렇다면 아틸라. 지금은 역시 세계에 드리운 어둠의 힘이 강해지는 시기겠지?”
카스피의 물음에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작에서와 달리, 크리엘도라 대륙은 점점 어둠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
바토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단다 카스피. 붉은 눈의 귀공자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만들어 냈던 공간 환술의 후유증은 아인하르트 왕국을 넘어 다른 왕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건, 검은 보석을 말하는 거야?”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명계에 존재하고 있어야 할 힘이 그림자(검은 보석)의 모습으로 중간계를 침범했다. 붉은 눈의 귀공자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공간 환술이 세계의 경계를 흐트러 놓지 않았다면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지.”
“대륙에 더 많은 검은 보석이 숨어 있다는 말이야?”
“그건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구나. 나바라 왕국에 등장했던 검은 보석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왕국에 퍼져 있을 가능성은 아직 확인된 바가 없으니 말이다.”
나바라 왕국의 전쟁이 끝난 후 일행은 룽겔 공작성을 샅샅이 뒤졌었다.
그러나 공작성 그 어디서도, 그리고 케플러의 연구 시설에서도 검은 보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토리의 감지 마법과 도롱뇽의 후각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아틸라는 나바라 왕국의 검은 보석이 모두 사라진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런데 말이우. 그 붉은 눈의 귀공자라는 녀석은 대체 뭐 하는 놈이요?”
오토는 붉은 눈의 귀공자를 습격해 아틸라를 도운 적이 있었다.
오토의 물음에 바토리는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녀는 아틸라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틸라는 분명, 이전에 붉은 눈의 귀공자와 만난 적이 있다.’
또 붉은 눈의 귀공자는 아틸라를 ‘김도현’이란 독특한 이름으로 불렀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것을 확인한 아틸라도 물끄러미 바토리를 바라봤다.
바토리가 아틸라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아틸라 역시 바토리에게 확인할 것이 있었다.
“잠깐 쉬어 가는 것이 좋겠군.”
일행은 가까운 강가에 말을 멈춰 세웠다.
말이 풀을 뜯고 목을 축이는 사이 일행은 푹신한 들풀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아이고 다리야. 이제야 좀 살겠수. 아주 안쪽 허벅지에 땀띠가 나는 줄 알았수다.”
“뭐야 영주 나리. 승마 경력이 40년은 될 텐데 엄살은.”
“사, 사십 년이라니! 내 나이가 이제 겨우 서른아홉이요!”
“서른아홉이나 마흔이나.”
“내 설마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고 있었겠소!”
오토의 주절거림을 무시하며 아틸라가 바토리에게 물었다.
“넌 붉은 눈의 귀공자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바토리의 눈이 먼 하늘을 향했다.
해는 점점 기울어 지평선 위에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더욱 깊숙한 무언가를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내가 아직 인간이었을 무렵의 일이니 말이다.”
아틸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간이었을 때?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의 공주였을 때 말인가.”
“그렇단다.”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군.”
“그전에 나도 묻고 싶은 게 있구나.”
“뭔데.”
“붉은 눈의 귀공자라면 너도 일면식이 있는 사이가 아니더냐.”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아틸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바토리가 이어 물었다.
“김도현이란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더냐.”
그 물음에 오토와 카스피도 아틸라를 쳐다봤다.
두 사람 역시 붉은 눈의 귀공자가 아틸라를 ‘김도현’이란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바토리, 오토, 카스피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펀치와 도롱뇽과도 시선을 맞췄다.
자신을 마주 보는 동료들의 시선에서 아틸라는, 이제는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감각했다.
“나는.”
아틸라가 입을 떼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동료들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검은늑대 부족의 아틸라가 아니다.”
바토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넌.”
“난 ‘지구’라는 행성에서 왔다. 그곳에서의 내 이름이 바로 김도현이었지.”
지구.
그 단어를 일행은 들은 적이 있었다.
카스피가 놀라 말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틸라?”
“말했듯이, 난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난 지구에서 온 김도현. 지구를 찾아온 붉은 눈의 귀공자가 강제로 날 이 세계로 이동시켰다. 정신을 차리니 난 이 몸 안에 들어와 무덤 속에 묻혀 있었고, 무덤을 뚫고 부활했다.”
아틸라는 자신이 패영전의 원작자이며, 그래서 이 세계와 등장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지구의 어느 웹소설 작가가 만들어 낸 소설 속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바토리와 달리, 오토와 카스피는 쩌억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주, 죽은 사람 몸에 빙의했다는 말이요?”
“그래.”
“히익! 귀신이다!”
기겁하는 오토를 카스피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틸라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틸라가 된 나는 검은늑대 부족을 삼키려는 숙부와 그 배후를 처단하고 부족을 떠났다. 그렇게 처음 도착한 문명 세계의 어느 마을에서 도적단의 조무래기들과 시비가 붙어 가볍게 손을 봐주었지. 그러자 놈들의 우두머리가 부하들을 잔뜩 이끌고 덤벼들더군.”
“아니 어떤 멍청한 놈이 감히 아틸라 님에게 덤빈단 말이오! 비열한 도적단 놈들! 아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당했겠소!”
“그게 너다 이 새끼야.”
아틸라의 말에 바토리와 카스피가 소리 내 웃었다.
상황을 깨달은 오토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 그때의 이야기였수? 헤헤. 그땐 살려 주셔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틸라 님. 헤헤헤.”
“휴. 저런 멍청이를 왕으로 섬기는 나바라의 백성들이 불쌍하다 정말.”
“머, 멍청이라니! 말 다 했소! 살쾡이 암살자!”
이후의 이야기는 일행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스코뉴와 아키텐의 전쟁에 오토와 함께 참여한 아틸라는 카스피를 만났고, 이후 남쪽 수해에서 바토리를 동료로 맞이했다.
바토리가 물었다.
“그런데 붉은 눈의 귀공자가 ‘지구’란 곳에 직접 찾아갔다는 말이더냐. 그곳에서 널 이쪽 세계로 보낸 것이고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붉은 눈의 귀공자는 널 다시 지구로 돌려보낼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바토리는 붉은 눈의 귀공자의 얼굴을 때려 부순 아틸라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말해 보시지.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넌,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이 여정을 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
그 말에 카스피와 오토가 펄쩍 뛰었다.
“흐에엣? 정말이야 아틸라? 그 지구란 곳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저, 정말이오 아틸라 님?”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오토가 소리쳤다.
“그, 그럼 나도 가겠소! 그 지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나 내, 내 검술이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요!”
“그렇다면 나도!”
오토와 카스피를 향해 피식 웃은 아틸라가 바토리를 돌아봤다.
“내 이야기는 끝났다. 이젠 네 차례인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