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검은 보석의 주인 (4)
해일처럼 밀려드는 왕자의 군대.
그 중심에서 청록빛 망토를 두른 채 종횡무진 검을 휘두르는 오토마이어.
룽겔 공작의 눈에 비친 오토마이어는 이미 어린 날의 풋내기 왕자가 아니었다.
율겐마이어를 압도하는 왕의 모습이었다.
‘이대로…… 끝날 성싶은가!’
룽겔은 자신을 호위하던 네 명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들은 연합군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기사들로, 아틸라와 결투를 벌였던 자들이었다.
그런 인재를 전방에 두지 않고 자신의 호위로 돌렸다는 것부터가 룽겔 공작의 패착이었다.
물론 전방에 배치했다 한들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만.
“주군을 지켜라!”
“우리는 룽겔 공작령의 명예로운 기사들이다!”
“오토마이어 왕자를 쓰러뜨려라!”
“우와아아아!”
그러나 그들의 우렁찬 외침은 그리 길지 못했다.
한 명의 기사는 카스피의 손에.
“크허억……! 어느 틈에……!”
또 하나는 로잘린과 세이론의 손에.
나머지 둘은 오토의 강철검과 방패에 목숨을 잃었다.
“오토……마이어……!”
그렇게 네 기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병사들이 소리쳤다.
“룽겔 공작이 저기에 있다!”
“잡아라!”
오토의 눈이 룽겔 공작을 똑바로 노려봤다.
“거기 있었소! 룽겔 공작!”
말을 달려오는 오토의 칼날처럼 예리한 눈을 보며 룽겔이 추한 비명을 질렀다.
“으으……. 으아아아아악!”
지휘도 잊은 채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어이없는 광경을 연합군의 병사들이 보았다.
“공작께서…….”
“도주하셨다고……?”
최고 지휘관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모습에 연합군은 무기를 내려놨다.
도롱뇽의 브레스가 데스나이트와 유령마, 그리고 키메라를 한줌 잿개비로 만들어 낸 그 시각.
왕자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 * *
룽겔 공작은 로잘린의 손에 잡혀 왔다.
“으으……. 으으으으…….”
저것이 그 룽겔 공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망가지고, 무너진 모습.
밧줄로 포박당한 룽겔 공작은 클로비스 백작성 앞에 무릎 꿇렸다.
떨리는 그의 눈이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중심으로 기사와 병사들이 둥글게 자리를 잡은 채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나, 나는…….”
아틸라와 바토리도 그의 모습을 봤다.
룽겔 공작은 둘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것이 변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위의 상황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피폐해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릎 꿇은 룽겔 공작의 앞에 화려한 의자가 놓였다.
잠시 후 누군가 걸어와 그 위에 앉았다.
오토마이어 왕자였다.
“룽겔 공작.”
“으어어어어……!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제, 제발 목숨만은……!”
오토를 보자마자 룽겔 공작은 오줌을 지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지금껏 자신이 벌였던 일에 대해 자백을 시작했다.
왕의 후계자들을 암살했던 것과.
이본 클로비스 왕비를 독살한 것.
그리고 율켄마이어 왕을 시해한 것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룽겔 공작의 외모는 점점 더 볼품없어졌다.
그는 갑자기 수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히익! 힉! 요, 용서해 주십시오! 율켄마이어 국왕 폐하……! 폐하……! 제발 자비를……!”
그는 오토를 율켄마이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극도의 상실감과 공포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다.
“제발…… 자비를…… 끄어어어억…….”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룽겔 공작은 토사물을 뱉어 내며 혼절했다.
오토는 그런 그에게 차가운 물바가지를 뿌려 억지로 깨웠다.
그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룽겔 공작. 왕국의 반역자인 그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바요.”
룽겔 공작의 처형은 오토가 직접 치렀다.
그의 목은 긴 장대에 꽂혀 까마귀밥이 되었다.
룽겔 공작에게 가담했던 자들 역시 처형을 면치 못했다.
그 일은 클로비스 백작이 냉정하고 발 빠르게 처리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백작!”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클로비스 백작은 이번 기회에 나바라 왕가를 향한 반역의 싹을 말끔히 잘라 낼 생각이었다.
로잘린 란틴크 경은 왕국 기사단장이 되었다.
기존의 기사대장은 허물이 많은 인물이었고, 룽겔 공작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연금술사 케플러는 자신의 연구 시설에서 싸늘한 시체가 된 채 발견됐다.
토막 난 그의 몸뚱이 옆엔 시험관의 유리 파편이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었다.
* * *
은밀한 숲 어느 노움의 연구실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헉헉! 완성했다! 알키미야의 불이 드디어 완성됐다고!”
도롱뇽이 몰래 훔쳐 온 사엽초 덕에 알키미야는 ‘알키미야의 불’을 완성했다.
그녀의 손엔 바토리의 것과는 다른 빛을 내는 현자의 돌이 들려 있었다.
앞으로 그 돌은 알키미야의 불에 마르지 않는 연료를 공급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알키미야는 아틸라와의 약속대로, 바토리의 현자의 돌을 수리하는 것을 넘어 한 단계 뛰어난 아이템으로 업그레이드해 놓았다.
“완전히 고쳐진 것이더냐.”
현자의 돌을 건네받으며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알키미야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고, 바토리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네, 네 말대로 했으니 확인해 봐!’
알키미야는 아틸라 모르게 바토리와 약속을 했다.
그것은 현자의 돌에 어떤 특별한 기능을 담는 일이었는데.
과연 장인급 연금술사답게, 알키미야는 그것을 담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흐응. 그것참 고맙구나.”
마력을 운용해 현자의 돌을 살펴보던 바토리가 만족의 미소를 머금었다.
용건을 마친 일행은 은밀한 숲을 떠났다.
그로부터 십수 일이 지난 후, 일행은 나바라 왕국의 북쪽 국경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나바라 왕국의 북쪽 국경 너머엔 두 개의 왕국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토리와 아틸라가 룽겔 공작을 속이기 위해 이용했던 샹크리스.
패영전의 여주인공 ‘키릴 크레센시아’가 있는 왕국이다.
아틸라는 다음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라면 샹크리스 왕국에 오르피나의 두 번째 성물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이유 중 하나는.
- 북쪽을 목적지로 삼으시길. 지금의 난 당신에게 이 정도 말밖에 해 줄 것이 없네요.
‘붉은 눈의 귀공자’가 북쪽을 향하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은근하게 말을 건네 왔다.
아틸라는 무심히 답했다.
“왜.”
“넌 어느 모습이 더 좋았더냐.”
“뭐가.”
“내 눈과 머리색 말이다. 지금이 좋더냐, 아니면 프리실라 공주를 연기하던 때가 좋았더냐.”
“…….”
바토리가 어울리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줄 수 있느니라. 아니면 혹 다른 머리색을 원한다면…….”
“됐고. 그냥 생긴 대로 있어라.”
“지금이 좋다는 말이더냐.”
“글쎄.”
“확실히 말을 해 주려무나.”
“뭐, 그렇다 치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아틸라를 보며 바토리가 동그랗게 입술을 모았다.
뾰족하게 모인 입술이 다시금 말을 흘려냈다.
“야만전사야.”
“또 왜.”
“넌 예상이나 했었더냐. 철혈귀검이 나바라의 왕자였고, 결국 나바라의 국왕이 되는 모습을 말이다.”
바토리의 말대로, 오토는 나바라 왕국의 왕이 되었다.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끼.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떼를 부릴 땐 언제고 결국 왕좌에 앉더군.”
“그건 철혈귀검 그 아이의 의지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라.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법이지.”
바토리는 고대왕국 사르데니야의 공주이자 후계자였다.
뿐만 아니라 바토리는 샹크리스 왕국에서 궁정 마법사를 지내며 왕족과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오토의 마음과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어찌 보면 좋은 일이지 않느냐. 샤를, 그 아이에 이어 또 다른 왕 친구가 생겼으니 말이다.”
“뭐야. 누가 샤를 녀석이 내 친구래.”
“흐응. 부정할 셈이더냐. 또 샤를의 이야기가 나오니 발끈하는 것이더냐.”
“발끈은 무슨. 됐다.”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렇다면 말이우. 금사자 그놈은 친구가 아니지만 나는 아틸라 님의 친구다, 이 말씀이오?”
아틸라는 등 뒤를 돌아봤다.
오토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콧구멍을 발름대고 있었다.
“넌 지난번에도 영주 짓 안 하고 쫓아오더니, 왜 또 왕 노릇 팽개치고 따라오고 있냐. 그냥 왕성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라니까?”
“그, 그건 내 맘이오!”
“샤를 녀석이 언제 여길 침공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 왕이란 놈이 지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다니. 에라이 애국심 없는 새끼.”
“그 무슨 소리요! 도망이라니! 이건 수행이요 수행! 나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한! 더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한!”
“둘러대기는.”
“그, 그건 그렇고 얼른 대답이나 해 주쇼! 정말 내가 아틸라 님의 친구인 거요? 그런 거요?”
오토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오토는 원래 왕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클로비스 백작과 세이론, 그리고 로잘린이 오토가 아니면 아무도 왕좌에 앉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오토는 아틸라와의 여행을 계속하게 해 준다면 왕좌에 앉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토를 왕좌에 앉혀야만 했던 세 사람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타협했다.
언젠가 자신들의 왕이 왕국으로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그동안 왕의 빈자리는 세이론과 로잘린, 그리고 라시드가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했다.
오토의 탈출에 큰 역할을 했던 아론, 로버트, 던컨의 세 기사 역시 왕국 기사단에 소속되며 중책을 맡았다.
또한 오토는 아틸라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적마탑 재건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다.
룽겔 공작에게서 몰수한 재산이 엄청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것으로 오토는 향후 10년 동안 나바라 왕국이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될 시, 적마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적마탑의 새로운 탑주, 라일 플라마는 그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이고 아틸라 님! 얼른 대답 좀 해보쇼!”
“시끄러 새끼야.”
아틸라는 씩 웃으며 말을 달려 나갔다.
오토의 곁을 스쳐 달리며 카스피가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영주 나리. 아하하하하!”
“뭐, 뭐요! 같이 좀 갑시다아아!”
네 마리 말이 나바라의 북쪽 관문을 향해 달렸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도롱뇽이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 * *
전쟁이 끝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클로비스 백작성 앞 어느 곳엔 검게 탄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바라 왕가의 수호룡이 이계의 두 괴물을 태워 죽인 그곳.
부르르, 검은 흔적이 일순 흔들렸다.
흔적은 머지않아 액체가 되고, 검은 기운을 발하는 기체로 바뀌었다.
꿈틀대는 검은 기체가 무언가의 형상을 그렸다.
그것은 커다란 군마를 탄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의 얼굴과 몸은 검붉은빛 갑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피처럼 짙은 적색 머리칼이 투구 너머로 소리 없이 흩날렸다.
사내의 투구 방향이 먼 북쪽을 향했다.
검붉은 투구 속 푸른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