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연금술이 낳은 괴물 (5)
룽겔 연합군은 압도적인 숫자를 무기로 백작성을 두드렸다.
그러나 ‘수비의 클로비스’라 불리는 클로비스 백작성은 흔들림 없이 그것을 막았다.
“쏴라!”
“바위를 굴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놈들을 저지해라!”
마이어 강이 흐르는 성의 측후면은 공략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룽겔 연합군은 성의 정면을 노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깊게 파인 해자와 유난히 높은 정면의 성벽은 연합군의 난입을 굳건하게 막아 냈다.
지루한 공성전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성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기병대가 튀어나왔다.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나바라 왕가를 상징하는 청록빛 망토를 휘날리는 전신갑주의 기사였다.
룽겔 공작이 외쳤다.
“왕자다! 오토마이어 왕자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 내 큰 상을 내리리라!”
‘왕자’라는 말에 아틸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청록빛 망토의 기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계속 성 안에서 지키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직접 선두에 나서 싸워 자신이 왕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걸 표출할 생각인가.’
아틸라의 생각대로, 왕자의 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잘린과 세이론은 왕자의 사각을 완벽하게 보조하며 그의 보호에 힘썼다.
사실 그들은 왕자가 내놓은 이 작전을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그러나 왕자가 고집을 부렸고, 클로비스 백작 역시 왕자의 손을 들어주자 더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왕자 전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나 로잘린 란틴크가!’
‘본인은 강력하게 부정하지만 오토마이어는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그릇이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왕좌에 앉는 것은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로잘린과 세이론은 오토마이어 왕자야말로 진정한 왕의 자질을 지닌 자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율켄마이어 왕에게 뒤처지지 않은 강력한 기사였고, 또한 유일한 왕의 핏줄이었다.
게다가 중립을 지키려 했던 많은 가문의 수장을 만나고, 포섭에 성공했다.
세이론은 다짐했다.
‘오토마이어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화살과 창검이 왕자를 노리며 뿌려졌다.
그것을 로잘린과 세이론이 막았다.
두 기사가 막지 못한 무기는 뒤이어 달려온 지글러 백작군과,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막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철벽같은 수비를 뚫고 진입한 무기도 있었지만 왕자의 강철방패에 가로막혔다.
왕자, 오토는 신들린 듯 검과 방패를 휘둘렀다.
그는 이번 전투에 목숨을 걸었다.
상대는 나바라 왕가의 오랜 숙적.
자신의 형제와 부모마저 죽게 한 철천지원수, 룽겔 공작이다.
‘룽겔 공작만은 내 손으로 쓰러뜨려야 한다.’
왕자의 신분으로 지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오토의 생각은 많은 것이 변했다.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을 느꼈고, 자신의 몸에 흐르는 나바라의 피를 실감했다.
그럼에도 오토는 여전히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왕이 되어 왕국 안에 머무르는 것보다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아틸라, 바토리, 카스피, 그리고 펀치, 도롱뇽과 함께.
‘그 삶을 언제까지 이어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아틸라 님.’
그때였다.
“괴, 괴물이다!”
“으히이이익!”
전장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공포에 가득 찬 외침이 들렸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검이나 창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마치 바윗덩이와 같은 어떤 둔중한 충격에 인간의 뼈와 살이 분해되는 파열음이 들렸다.
우드득. 콰직. 파드드듯……!
머지않아 오토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곰의 얼굴을 가진 기괴한 생물.
머리 위엔 산양의 뿔이 돋아나고, 말의 갈기에 뱀의 꼬리를 가진 괴물.
그 괴물이 전신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저, 저게 무슨……!”
“피하셔야 하오! 왕자!”
로잘린과 세이론이 오토를 보호하며 나섰다.
그 순간 괴물의 눈이 오토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오토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모두 물러서시오!”
오토는 저 괴물이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 괴물의 몸에서 발하는 검은 기운.’
분명했다.
룽겔 공작이 검은 보석의 힘으로 괴물을 만들어냈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려는 거다.
그때였다.
길길이 날뛰는 괴물의 등 위에서 오토는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체 없이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 * *
키메라가 클로비스 백작성에 도착하기 며칠 전.
그러니까 펀치와 도롱뇽을 등에 태운 키메라가 아틸라를 향해 달리기를 시작하고 수 시간 후.
키메라는 등 뒤를 추격하는 음습한 기척을 감지했다.
- 도롱뇽아.
- 일어나 봐 도롱뇽아.
펀치는 도롱뇽을 깨웠다.
그리고 키메라에게 들은 사실을 알렸다.
- 무언가가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대.
“뭐라? 뒤를 쫓아?”
도롱뇽은 고개를 돌렸다.
킁킁, 콧구멍을 발름대던 도롱뇽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이, 이런 시발! 키메라! 어서 달려! 잡히면 진짜 큰일 난다!”
- 왜?
- 뭐가 쫓아오는데 도롱뇽아.
“다, 닥치고 키메라한테 빨리 달리라고 해! 너 말 통한다며!”
- 키메라.
- 지금 전력으로 달리고 있대.
- 그런데.
- 상대가 더 빠른가 봐.
펀치의 말대로, 도롱뇽은 등 뒤의 살기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롱뇽의 비늘이 촤르르 곤두섰다.
“빌어먹을! 야만 미물도 없는 이런 때!”
이히히히히힝!
등 뒤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어 시커먼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젠장! 벌써 따라잡혔다!”
상대는 검은색 군마를 탄 한 명의 기사였다.
그러나 기사도, 군마도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리샤르가 타고 있던 거대 와이번처럼, 둘은 가공할 검은 기운을 폭발적으로 방출하고 있었다.
펀치는 그 모습에서 익숙한 기억을 떠올렸다.
- 도롱뇽아.
- 저건.
“그래! 데스나이트다!”
데스나이트가 검을 뽑았다.
시커먼 검신이 뱀처럼 몸을 흔들었고, 채찍처럼 쏘아졌다.
취리리리릭!
키메라는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검은 채찍이 쏘아졌다.
“히이익! 더 빨리 달려 이 느림보 키메라 새끼야!”
그러나 키메라는 한참 전부터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키메라는 판단했다.
계속 도망만 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아있을 때 반격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키메라는 빙글, 몸을 돌렸다.
“뭐야! 뭐 하는 거야!”
도롱뇽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데스나이트에게 달렸다.
콰드득! 키메라의 앞발이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타격했다.
그것을 넘어 군마에게도 치명상을 입혔고, 그대로 데스나이트와 군마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오오 뭐야 시발! 키메라 너 강하잖아!”
도롱뇽이 반색하며 외쳤다.
그러나 상대의 공격을 허용한 건 데스나이트만이 아니었다.
크르르……. 크르…….
키메라의 가슴에 검은 채찍이 꽂혔다.
이미 그건 채찍이 아닌 기다란 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키메라의 입에서 검은 피가 토해졌다.
데스나이트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검이 다시금 키메라를 향해 쏘아졌다.
키메라는 앞발을 휘둘러 막아 낸 다음, 대포알처럼 돌진해 데스나이트의 몸을 짓뭉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를 시작했다.
“후아! 간신히 살았네!”
- 도롱뇽아.
- 키메라.
- 많이 다쳤어.
도롱뇽은 달리는 키메라의 옆구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 봤다.
데스나이트의 검에 당한 상처는 끔찍했다.
그러나 도롱뇽은 그 상처가 조금씩이지만 수복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처가 수복되고 있다. 이 속도라면 몇 시간 안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그러나 그 몇 시간이 지나기 전에 키메라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봉착했다.
데스나이트가 또다시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이히히히힝!
다시금 등장한 데스나이트는 키메라에게 당한 상처를 완벽하게 회복한 상태였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덩치가 커졌고, 발산하는 검은 기운도 강렬해졌다.
반면 키메라는 가슴의 상처 때문에 처음과 같은 속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키메라는 다시 한번 데스나이트와 격돌했고, 복부에 추가 상처를 입는 것을 대가로 데스나이트를 저지하는 것에 성공했다.
키메라는 다시 도주했고, 데스나이트가 추격해 왔다.
이것이 수 일 동안 십여 차례 반복되었다.
그러는 동안 키메라는 완전히 녹초가 됐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이번에 만나면 진짜 뒈지겠군!”
- 키메라.
- 많이 아파해.
- 어떡하지.
- 어떡하지 도롱뇽아.
고민하던 도롱뇽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도롱뇽은 펀치에게 검은 보석을 뱉어 내라 말했다.
“키메라는 검은 보석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다! 그렇다면 회복도 할 수 있을 거야!”
펀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 보석을 토해 냈다.
그것을 쥔 도롱뇽이 키메라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었다.
“야! 이걸로 네가 괴물이 된 거잖아! 힘을 좀 흡수해 봐!”
키메라는 보석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하얗게 풀렸던 키메라의 눈에 일순 생기가 돌아왔다.
키메라는 보석을 삼켰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키메라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오오! 살아난다! 살아나!”
키메라는 펀치와 도롱뇽을 다시 등 위에 올린 뒤 전력으로 달렸다.
그동안은 데스나이트에게서 도망치느라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달리지 못했다.
키메라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보석을 삼킨 자신이 머지않아 펀치와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키메라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클로비스 백작성 앞에 도달한 키메라는 검은 보석의 힘에 완전히 지배당했다.
그는 케플러의 시험관 속에서 자신에게 주입되었던 단 하나의 목표를 기억해냈고, 눈으로 찾았다.
“모두 물러서시오!”
키메라의 목표물, 오토가 말을 달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토는 키메라의 등 위에서 펀치와 도롱뇽의 모습을 봤다.
키메라가 세차게 앞발을 휘둘렀고, 오토가 강철방패로 막았다.
“크으윽……!”
오토의 군마가 크게 뒤로 밀려났다.
한 번 더 저 공격을 막아 낸다면 군마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오토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2차 공격이 날아왔고, 오토는 검과 방패를 교차하며 그것을 막았다.
“펀치!”
오토의 외침에 펀치가 도롱뇽을 입에 물고 키메라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광분한 키메라가 오토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 왔다.
오토는 하체에 힘을 주며 그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순간 측면에서 난입한 무언가가 오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찬란한 백금빛 방패가 키메라의 공격을 저지했다.
눈부신 백금빛의 갑주.
그 위에서 찬란하게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
그것을 보며 오토는 낯선 와중에도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스스스스슷…….
키메라의 공격을 막아 낸 백금빛 방패가 흑빛으로 변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갑주도 흑빛으로 몸을 바꿨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옆얼굴을 드러냈다.
찬란한 금빛이었던 그의 머리칼은 어느새 익숙한 흑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이 오토.”
길게 찢어 웃는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빌어먹을 오토마이어 왕자가 바로 너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