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공주와 혼약자 (2)
룽겔 공작의 목소리는 방 안에 짧은 정적을 가져왔다.
바토리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공작께서도 참 짓궂으십니다. ‘광명검’이라면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에서도 아주 특별한 힘을 지닌 기사만이 발할 수 있는 오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장의 한복판이나, 혹은 명예로운 결투의 장이 아니라면 그리 쉽게 내보일 힘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명예로운 결투의 장이 마련된다면 어떻겠습니까, 프리실라 공주.”
“뭐라고요?”
“나바라 왕국의 변방인 이곳 룽겔 공작령까지 명성이 자자한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경입니다. 그런 위대한 성기사와 명예로운 결투를 치르고 싶은 기사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룽겔 공작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바토리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틸라가 머리에 손을 가져갔고, 투구를 벗었다.
그곳엔 무심한 인상을 지닌 금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오오. 과연 성기사다운 강건한 풍채를 지니고 계시는구려, 아틸레르 경.”
아틸라는 대답 없이 고개만을 까딱했다.
“그래. 경은 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직 부족한 실력을 지닌 우리 룽겔가의 기사들에게 한수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소?”
아틸라의 눈이 룽겔 공작을 향했다.
그리고 시전했다.
‘심안.’
룽겔 공작의 머릿속 생각이 아틸라의 눈앞에 펼쳐졌다.
-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 백조의 메달도 그렇고, 프리실라 공주의 외모도 듣던 것과 다르지 않지만 경계는 충분히 해 두는 것이 좋겠지.
그래. 역시 의심하고 있다 이거군. 룽겔 공작.
아틸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룽겔 공작은 그것을 수락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잠시 후 다섯 명의 기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룽겔 공작은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던 게 분명했다.
“룽겔 가문이 자랑하는 다섯 명의 젊은 기사요. 아직 부족한 면이 많은 이들이지만 아틸레르 경에게 여흥거리는 될 것이라 자부하지.”
룽겔 공작의 눈이 번들거렸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응해 준 경의 아량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결투 상대는 아틸레르 경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겠소.”
아틸라는 여전히 룽겔 공작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심안을 통해 케플러의 연구 시설 위치를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확인할 수 없었다.
‘서두를 필요 없다. 일단은 눈앞에 닥친 상황부터 해결한다.’
아틸라의 시선이 룽겔 공작을 떠나 기사들을 훑었다.
다섯 기사 모두 제법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틸라는 그중 가장 평범한 체구를 지닌 기사에게 다가갔다.
- 뭐야.
- 일부러 가장 어리고 미숙해 보이는 기사를 선택한 건가?
- 광명검이라길래 나름 기대했더니 배포가 작은 놈이었군.
- 그래. 그렇다면 역시 놈들은 진짜가 아니라……
룽겔 공작의 눈에서 의심의 기운이 타올랐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이 기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군.”
아틸라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이자를 제외한 나머지 네 기사와 동시에 결투를 치르겠소.”
* * *
이튿날, 공작성의 연무장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오. 저분이 바로 샹크리스 왕국의 프리실라 공주 전하인가.”
“눈이 부시군.”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룽겔 공작가를 따르는 각 가문의 귀족들, 그리고 기사들은 바토리의 자태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듣기론 오늘 결투를 치를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경의 혼약자라지?”
“아깝군.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라면 일개 기사가 아니라 타국의 왕자와도 충분히 혼례를 치를 수 있을 터인데.”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듯 바토리는 천천히 연무장을 걸어 아틸라 앞에 섰다.
그러고는 아틸라의 목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아틸라가 바토리를 밀어내려 했다.
바토리가 속삭였다.
‘이곳에서 프리실라 샹크리스 공주는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경의 혼약자로 알려져 있다. 설마 이 많은 군중 앞에서 공주에게 무안을 줄 셈이더냐.’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바토리가 눈웃음을 지으며 빤히 아틸라를 올려 봤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더욱 아틸라에게 밀착시켰다.
‘이럴 때 기사는, 혼약자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면 된단다.’
예정에도 없던 ‘혼약자’란 말을 내뱉었을 때부터 이럴 속셈이었군.
아틸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바토리의 말대로,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바토리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발그스름하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아틸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야만전사야.’
부드럽고 따스한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네 심장이 무척 빠르게 뛰는구나.’
아틸라에게서 떨어진 바토리가 배시시 눈웃음을 흘리며 군중 속에 섞였다.
아틸라는 눈앞에 선 네 명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 모두는 4 대 1로 결투를 하겠다는 아틸라의 말에 빈정이 상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틸라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덥군.’
그는 참기 힘든 더위를 느꼈다.
이유는 몰랐지만, 갑주가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갑주를 벗었다.
“엥? 뭐야.”
“결투 시작 전에 갑옷을 벗는다고?”
군중이 술렁거렸다.
네 기사의 얼굴에 강한 모욕감이 어렸다.
그러나 이번 결투는 룽겔 공작이 마련한 자리.
사사로운 감정을 표출할 수는 없다.
철컥. 철컥…….
갑주를 모두 벗어 낸 아틸라는 (지금은 백금빛으로 빛나는)흑철검과 흑철방패도 바닥에 내려놨다.
그는 무휼 한 자루만을 손에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결투가 시작됐다.
“하아아압!”
우렁찬 기합을 발하며 네 명의 기사가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아틸라는 가장 먼저 달려드는 기사의 검을 고개를 비틀어 피했다.
그 자리로 두 번째 기사의 검이 쇄도했다.
아틸라는 첫 번째 기사의 몸에 무휼을 휘둘러 자상을 입히고, 관성을 이용해 두 번째 기사의 검을 막았다.
스르릉.
무휼의 날이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며 두 번째 기사의 손목을 베었다.
“으아아아아!”
세 번째 기사는 방패를 밀어붙이며 달려들었다.
아틸라는 맨손바닥을 뻗어 방패를 막아 낸 뒤, 요철 부분을 쥐고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쿵! 방패 기사의 몸이 지면에 꽂혔다.
그 순간 네 번째 기사의 양손검이 아틸라의 가슴을 노리며 쇄도했다.
아틸라는 무휼로 그것을 튕겨 낸 다음, 바닥에 쓰러진 방패 기사의 몸에 두 갈래 상흔을 만들었다.
그 사이 양손검의 기사는 아틸라의 완력에 밀려 수 걸음이나 주춤대며 물러나고 있었다.
아틸라가 그를 쫓았다.
양손검의 기사는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아틸라가 더욱 빨랐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무휼이 그의 어깨를 베었다.
“크으으……!”
기사가 신음을 내뱉었지만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아틸라는 무휼에 맺힌 핏물을 털어 냈다.
그렇게 그는 네 명의 기사와 한 차례씩 검을 섞었다.
아틸라의 실력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것을 직감한 네 기사가 서둘러 군집하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관중 속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 엄청난 실력자잖아!”
“저 짤막한 검 한 자루로 네 기사를 흔들림 없이 상대하고 있어!”
사실 그들은 결투의 주인공인 아틸레르 경이 아닌, 이국의 아름다운 공주 프리실라 샹크리스를 보러 이 자리에 왔다.
어제 관문에서 공주를 본 이들이 만들어 낸 입소문은 하룻밤 만에 공작령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많은 귀족과 기사들은 공주의 아름다움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항간의 소문이 공주의 아름다움을 발끝만큼도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로 프리실라 공주의 아름다움은 독보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 중에 더 이상 공주를 곁눈질하는 이는 없었다.
‘저런 엄청난 기사가 존재한단 말인가.’
‘결투 전 갑주를 벗을 땐 더할 나위 없는 오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맨몸에 단검 한 자루만을 쥐고 룽겔 가문의 네 기사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정말 엄청난 기사로군.’
귀족들, 특히 평생 동안 검의 길을 걸어온 기사들은 아틸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룽겔의 네 기사가 아틸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틸라의 몸에 자그만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다.
반대로 기사들의 몸엔 상처가 늘어났다.
그리고 기사들은 자신의 몸에 생성되는 모든 상처가 뼈나 근육이 아닌, 오직 살갗만을 베는 경상이라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언제까지 그렇게 싸우려는 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셈이오! 아틸레르 경!”
“명예로운 결투를 모독하지 마시오!”
기사들은 모두 룽겔 가문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타국의 기사 한 명에게 완벽하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관중들도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아틸레르 경이 광명검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랬다.
처음엔 그의 엄청난 실력에 압도당해 깨닫지 못했지만, 아틸레르 크레센시아는 광명검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지에 오른 기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광명검.
관중들의 눈에 강한 호기심이 어렸다.
“이상하군. 광명검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설사 그렇다 해도 그는 광명검을 선보일 의무가 있어!”
그 말대로였다.
애초부터 이 결투는 광명검을 보이기 위해 마련된 자리.
네 기사도 그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우릴 상대로는 굳이 광명검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완전히 얕보이고 있군!’
네 기사가 성난 사자처럼 달려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틸라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는 모든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 축성의 인장 발동 효과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파지지지지짓……!
무휼의 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단검처럼 짧았던 검날이 양손검과 비슷할 정도로 제 모습을 바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길어진 검신에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관중들이 경악했다.
“저, 저, 저것이……!”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광명검!”
이것이야말로 아틸라가 결투에서 사용할 무기로 무휼을 택한 까닭이었다.
그는 기사들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유효타를 날렸고, 성력을 모았다.
아울러 네 명의 기사와 동시 결투를 선택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이번 결투는 상대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는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할 때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리 없이 성력을 모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광명검이고 나발이고! 밀어붙여!”
무휼의 성력에 압도되었음에도 용기 있게 달려드는 네 기사를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그가 네 명의 기사를 동시에 상대하기로 한 것엔 사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틸라의 무릎이 굽어졌다.
무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휩쓸기 ]
[ 무기를 크게 휘둘러 최대 4인의 적을 한꺼번에 가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