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공주와 혼약자 (1)
아틸라는 잡념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귀환왕자가 아니다.
그에겐 사엽초를 구해 현자의 돌을 수리한다는 것과, 검은 보석을 조사해 카르타고가 말했던 ‘대격변’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그래서 아틸라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알키미야는 검은 마법사들이 사엽초를 모조리 뜯어 갔다고 말했다.’
사엽초(死葉草).
연금술사 외에는 별달리 사용하는 이가 없는 들풀.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독성을 갖고 있기에 식용으로 쓸 수 없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은 사엽초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다.
그런 사엽초를 일부러,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한 은밀한 숲까지 들어와 모조리 뜯어 갔다는 것은.
‘상대가 연금술사일 확률이 극도로 높다는 의미.’
그리고 나바라 왕국에서 알키미야를 제외한 연금술사라면.
‘케플러밖에 없지.’
케플러는 룽겔 공작의 손 아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룽겔 공작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 영약을 만들어 제공하고, 그 대가로 훌륭한 시설과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았다는 것을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케플러의 연구 시설을 찾는다.’
아틸라의 첫 번째 목표인 사엽초와, 두 번째 목표인 검은 보석은 모두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러나 케플러의 연구 시설은 룽겔 공작의 성 안에서도 매우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
사실 자세한 위치는 아틸라도 몰랐다.
‘룽겔 공작과 케플러는 원작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곳을 무작정 힘으로 뚫고 간다는 것은 지금의 아틸라로서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룽겔 공작의 기사와 병사들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다른 가문의 군사와도 싸워야 할 것이다.
‘검은 보석이 또 어떤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플라이웜, 가짜 와이번, 그리고 식인마까지.
더구나 현자의 돌의 부재로 바토리의 지원 사격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는 편이 낫다.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케플러의 연구실에 대한 것과, 그곳에 침투하기 위한 계획을 밝혔다.
“흐응?”
바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흥미로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생각이로구나.”
아틸라는 평소 답답해 잘 착용하지 않던 투구를 펀치의 엉덩이에서 벗긴 뒤 머리에 눌러썼다.
이후 바토리가 잡기술을 시전해 아틸라의 갑주를 눈부신 백금빛으로 탈바꿈시켰다.
“오. 감쪽같군. 이거 얼마나 지속되는 거냐.”
“내가 곁에 있는 한 쉬이 색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강한 충격을 받는다면 자칫 마법이 풀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마법은 무슨. 그냥 잡기술이라 해라.”
비죽 아랫입술을 내민 바토리가 흑철검과 흑철방패도 백금빛으로 바꿨다.
그러고는 자신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밝은 레몬빛으로 변화시켰다.
“어때 보이느냐.”
“뭐가.”
“네가 이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항상 지금의 모습으로 있어 줄 수도 있느니라.”
“됐으니 잡기술 풀리지 않게 주의나 해라.”
“참으로 무정한 말만 하는구나. 너는.”
둘은 서로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몰아 관문으로 다가갔다.
룽겔 공작을 지지하는 각 가문의 군대가 성벽 바깥까지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멈추시오.”
커다란 덩치의 경비병이 둘의 앞을 막았다.
그의 눈이 바토리와 아틸라를 훑었다.
“말에서 내리고 신분을 밝히십시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차림이었는지, 경비병의 어투가 다소 공손해졌다.
그러나 아틸라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바토리 역시 도도하게 얼굴을 든 채 경비병을 내려 볼 뿐이었다.
경비병은 생각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자로군.’
여자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시선이 빼앗겨 몰랐는데, 이제 보니 남자의 갑주도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다.
‘찬란한 백금빛 플레이트 아머라. 이런 갑옷을 입은 기사가 왕국에 있었던가.’
백금빛 투구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샹크리스 왕국의 일곱 번째 축복. 힐데가르다 숲과 일곱 무지개의 수호자이자,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명예 기사, 프리실라 샹크리스 공주 전하시오.”
기사의 묵직하면서도 장황한 설명에 경비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샹크리스 왕국’과 ‘공주 전하’라는 단어만은 제대로 알아들었고, 그 즉시 당황한 얼굴로 나바라 왕국의 예를 표했다.
“샤, 샹크리스 왕국의 공주 전하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투구 속에서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생각대로 경비병은 왕족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굽신대기 시작했다.
‘특권 계급을 향한 복종의 각인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지.’
아틸라는 바토리를 공주로 둔갑시켜 관문을 통과하고자 했다.
사실 바토리가 공주 출신은 맞으니 완전한 거짓말이라 할 수도 없었다.
물론 라일에게서 받은 적마탑의 증표를 보여도 문제 없이 관문을 지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인다면 룽겔 공작의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다.
‘룽겔 공작과 케플러가 검은 보석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적마탑 사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을 확률이 높지.’
그리고 룽겔 공작의 성격이라면 경비대에 특별한 명령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적마탑과 관련된 자가 찾아오면 그 즉시 보고하도록 한다든지.
“자, 잠시…… 경비대장을 불러오겠습니다!”
당황한 와중에도 경비병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 통과가 되었다면 가장 편했을 테지만, 설사 경비대장이 온다 해도 달라질 일은 없다.
‘샹크리스 왕국은 나바라 왕국과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왕래가 빈번한 사이도 아니지.’
즉, 이곳엔 샹크리스 왕국의 공주를 알아볼 만한 자가 없다.
게다가 ‘프리실라 샹크리스’는 실존하는 인물이다.
샹크리스 왕국의 일곱 번째 축복.
힐데가르다 숲과 일곱 무지개의 수호자.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명예 기사.
이 모든 것은 아틸라가 즉석에서 지어낸 것이 아닌, 실제 프리실라 샹크리스 공주의 소갯말이다.
잠시 후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달려왔다.
“샤, 샹크리스 왕국의 프리실라 공주 전하라 하셨습니까.”
“그렇단다.”
“그렇다면 옆의 기사분은…….”
경비대장이 아틸라의 신분을 물어왔다.
그것에 대한 답도 정해져 있었다.
샹크리스 왕국엔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이 있고, 그들이 입는 갑주가 지금 아틸라의 것과 같은 백금빛이었다.
물론 모양은 다소 다르지만, 그런 것을 알아볼 이는 이곳에 당연히 없었다.
아틸라는 정해진 답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바토리가 아틸라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분은 나의 혼약자이자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광명검(光明劍),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경이다.”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물론 아틸라도 그 이름을 대려 했었다.
그런데 뭐?
혼약자?
“언제까지 절 이곳에 멀뚱히 서 있게 하실 셈입니까 아틸레르 경. 저는 긴 여행에 지쳤습니다. 나바라 왕국의 룽겔 공작령이라면 아름다운 밤의 경관과 맛 좋은 술을 벗 삼아 낭만적인 사랑을 나눌 기회가 많을 거라고, 그리 제게 달콤하게 속삭이지 않으셨습니까.”
도도하게 턱 끝을 올리며 바토리가 말했다.
아틸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바토리를 바라봤다.
물론 투구로 가려진 탓에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곳의 경비대장 역시 자신의 임무에는 충실해야겠지요.”
바토리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꺼내어진 그녀의 손엔 반짝이는 백금빛 메달이 쥐여 있었다.
“샹크리스 왕국을 상징하는 백조(白鳥)의 메달이다. 이것으로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터.”
이건 아틸라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바토리가 꺼내든 것은 정말로 샹크리스 왕국의 상징인 ‘백조의 메달’이었다.
엉겁결에 메달을 건네받은 아틸라는 경비대장에게 그것을 보였다.
이어 아틸라는 바토리가 백조의 메달을 지니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그랬던 건가.’
바토리는 오랜 세월 관조자로 살아왔다.
그녀는 길고 긴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종종 인간 행세를 하곤 했는데, 그런 그녀가 어느 왕국의 궁정 마법사로 활동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왕국이 바로.
‘샹크리스 왕국.’
백조의 메달은 아마도 그때 몰래 챙겨 놓은 모양이었다.
혹은 그녀의 강력한 마법에 탄복한 당시의 샹크리스 왕이 선물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비대장은 백조의 메달을 알아봤다.
“화, 확인했습니다! 고, 공작께는 그럼……!”
“아틸레르 경. 룽겔 공작가의 성이 그리 아름답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바토리가 경비대장의 말을 끊었다.
“공작령의 아름다움에 반해 타국의 공주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공작을 만나 뵙지 않는다면 혹여 그분께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검지를 입술 아래로 가져가며 바토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고혹적이었는지 경비대장과 경비병은 물론이고, 아틸라마저 잠시 멍하니 바토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지. 아틸레르 경. 저 경비병이 룽겔 공작께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우린 공작께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고, 만약 정식으로 초대를 받게 된다면 그 아름답기로 소문난 룽겔 공작가의 성을 직접 두 눈에 담을 기회를 얻지 않겠습니까. 아아. 저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아틸레르 경.”
바토리는 정말로 기대가 된다는 듯 깍지 낀 두 손을 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경비병은 경비대장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공작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공작성에서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룽겔 공작의 마차였다.
* * *
공작성에 도착한 아틸라와 바토리는 룽겔 공작의 환대를 받았다.
두 사람을 화려한 장식의 방으로 안내한 룽겔 공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 거리를 오셨을 텐데, 때마침 시국이 이런 상황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공주.”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 갑작스레 찾아온 결례를 나무라지 않고 흔쾌히 초대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옆의 기사분은 그 이름도 유명한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의 광명검, 아틸레르 크레센시아 경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울러 아틸레르 경은 제 혼약자이기도 하지요. 내년으로 예정된 혼례를 앞두고 이렇게 본국과 타국을 여행하고 있답니다. 제 부친께서 워낙 당신의 딸을 사랑하시는지라 처음엔 만류하셨지만, 아틸레르 경의 검술 실력을 믿고 여행을 허해 주셨지요.”
“오오. 역시 광명검 아틸레르 경이로군요. 경의 검술 실력이라면 이곳에서도 정평이 나있습니다. 하하하하하.”
룽겔 공작의 호방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틸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틸레르 크레센시아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다.
‘물론 샹크리스엔 광명검이라 불리는 자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광명검(光明劍).
샹크리스 왕국에서도 아주 특별한 성기사들만이 발할 수 있는 오러.
그때 룽겔 공작이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아틸레르 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게 그 유명한 광명검의 오러를 보여 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