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왕의 길 (2)
오토는 수 개월 전 노르드 왕국의 대도시 리옹에서 아틸라와 결투를 했었다.
그때 아틸라는 오토의 필살기 ‘제비꼬리’를 그대로 따라 하며 오토를 쓰러뜨렸는데.
‘이, 이런 미친!’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거요!’
당연히 아틸라가 시전한 제비꼬리는 오토의 것보다 더욱 빠르고, 날카롭고, 강했다.
그야말로 제비꼬리의 완성형.
‘봤으면 기억해라. 반복해서 연습해.’
아틸라의 그 말 이후 오토는 틈나는 대로 제비꼬리를 연습했다.
언젠가 아틸라가 보였던 것처럼, 아니 가능하다면 그것보다 더욱 높은 경지의 제비꼬리를 시전할 수 있도록.
그간의 노력은 오토를 배신하지 않았다.
룽겔 공작의 기사가 내뻗은 양손대검을 막아낸 것을 넘어, 그 반동을 이용해 엄청난 속도로 상대의 안면에 검을 꽂아 넣었으니까.
“크허억……!”
털썩, 양손대검의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그 놀라운 광경은 지글러 백작군과 클로비스 백작군의 모든 병사들은 물론, 오토와 결투 중이던 방패 기사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누, 누구 본 사람 있어?”
양 진영의 병사들은 유령에라도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양손대검의 기사가 힘차게 왕자의 검을 튕겨 낸 것과.
그 순간 왕자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튕겨난 줄 알았던 왕자의 강철검이 상대의 안면에 꽂힌 광경이었다.
물론 그 과정을 육안으로 확인한 이도 있었다.
왕자와 결투 중인 방패 기사가 그랬고.
세이론과 로잘린이 그랬으며.
카스피가 그랬다.
‘대, 대단하잖아 영주 나리!’
늘 오토의 검술을 코앞에서 봐왔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공격은 달랐다.
덜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날카로운 검세.
‘영주 나리가 언제 저런……!’
“이런 씨바아아알!”
괴성을 지르며 방패 기사가 오토에게 달려들었다.
양손대검 기사의 얼굴에 박힌 오토의 검이 뽑혔다.
숨통이 끊긴 기사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의 안면이 지면에 채 부딪치기도 전에 오토는 방패 기사와 몸을 맞댔다.
콰앙!
악을 쓰며 방패를 휘두른 것은 기사였지만, 뒤로 밀려난 것 또한 기사였다.
오토의 힘이 기사의 힘을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오토는 자세를 낮춰 하체에 실린 힘이 오롯이 방패에 전달될 수 있도록 했고, 반대로 기사는 무리해서 앞으로 달려 나오는 바람에 상체의 힘만으로 방패를 내뻗었던 것.
“이런 씨발! 칠삭둥이 왕자 새끼가!”
흥분한 기사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눈앞에서 동료가 죽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기사를 보며 오토는 눈시울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군. 네 애인이라도 됐던 건가. 저 기사는.”
“이 씨발 새끼가아아아!”
오토가 반신반의하며 던진 말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
흰자위를 드러내며 돌아간 기사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오토는 날아드는 기사의 검을 강하게 방패로 튕겨 냈다.
기사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그 틈을 노려 오토가 검을 뻗었다.
푸슛! 기사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케헥! 끄으으으읏……!
그러나 치명타는 아니었다.
피를 보고 더욱 흥분한 기사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오토를 공격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동료가 죽은 순간부터, 아니면 오토에게 유효타를 허용한 직후부터라도 그는 냉정을 찾았어야 했다.
마구잡이로 쇄도하는 기사의 검을 오토는 어렵지 않게 막았다.
그러면서 그의 눈은 끊임없이 상대의 빈틈을 찾았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든 순간, 폭발적으로 전진하며 허점을 찔렀다.
“커헉……! 컥……! 케르르륵…….”
기사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오토의 검은 상대의 목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피거품을 토하며 무어라 주절대던 기사가 뒤로 넘어갔다.
그렇게 결투가 끝났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오토는 검에 묻은 피를 닦고, 검집에 넣었다.
그의 시선이 뒤를 돌아봤다.
세이론.
로잘린.
그리고 카스피가 환호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와아아아아!”
“오토마이어 왕자 전하께서 승리하셨다!”
“그것도 한꺼번에 두 명의 기사를!”
“왕자 전하께서 저런 엄청난 실력자였다니!”
“룽겔 가문 기사들의 엄청나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래 봐야 왕자 전하의 발끝에도 못 따라오는 실력이었군!”
“오토마이어 왕자 전하 만세!”
클로비스의 병사들이 양팔을 휘두르며 함성을 질렀다.
그 순간 오토는 무언가 울컥, 하고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오토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 위에 올랐다.
그러자 병사들의 함성은 더욱 거세어졌다.
종래엔 클로비스 백작군을 넘어, 지글러 백작군의 병사들마저도 오토마이어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오토마이어 왕자 전하! 만세!”
양 진영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오토는 오른손을 들었다.
가슴을 두드려 나바라 왕국의 예를 표했다.
쿵쿵! 병사들도 오른손을 들어 힘차게 가슴을 두드렸다.
우레와 같은 함성은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 * *
룽겔 공작은 일이 예정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지글러 백작. 뒤에서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본심을 드러낼 줄이야.’
지글러 백작은 룽겔 공작을 배신하고 오토마이어 왕자에게 붙었다.
그 와중에 룽겔 공작이 심어 놓은 두 명의 기사가 죽었다.
그 소식은 룽겔 공작은 격노하게 만들었지만, 정당한 결투의 결과였으므로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오토마이어가 그렇게 성장했다고? 우리 가문의 기사 두 명을 홀로 상대해 쓰러뜨릴 만큼?’
나직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검은 로브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남자를 보자마자 룽겔 공작은 쾅! 탁자를 내리쳤다.
“어떻게 된 건가 케플러! 기병대를 빌려 주면 오토마이어를 해치울 수 있다고 장담하지 않았나!”
남자, 케플러가 말했다.
“공작께서야말로 왕자의 실력이 볼품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왕자는 물론이고, 특히 왕자의 동료인 여자 살수는 엄청난 실력자였습니다.”
“그래서 20명이 넘는 기병대로도 그 둘을 잡지 못했다는 말인가! 더구나 기병들의 말은 검은 보석의 힘으로 더욱 강하게 개량하지 않았나!”
“개량했습니다. 그러나 공작께서도 아시다시피 군마들은 보석의 힘에 제대로 노출되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으니까요.”
케플러는 연금술사였다.
언제고 반드시 왕이 되리라 기회를 엿보던 룽겔 공작은 오래전부터 연금술사를 수소문해 왔고,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만나게 된 것이 케플러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인 룽겔 공작이 아직까지 정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케플러가 만든 여러 영약 덕분이었다.
“공작께서 지시하신 대로, 전 보석의 힘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했습니다. 그 덕에 오토마이어 왕자를 찾을 수 있었고, 왕자를 죽이기 위해 파견한 기병대가 전멸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개량된 보석의 힘을 충분히 검증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룽겔 공작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공작을 바라보던 케플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기병대의 군마는 부작용을 겪었다.’
룽겔 공작은 알지 못했지만, 케플러는 기병대의 군마가 식인마로 돌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식인마 중 세 마리를 제거한 왕자 일행이 현장에서 이탈하는 것에 성공했고.
그들의 뒤를 쫓던 나머지 식인마들이 어느 강력한 전사의 손에 모조리 죽임당했다는 사실도.
또한 케플러는 알고 있었다.
‘공작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케플러는 검은 보석을 통해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의지를 전해 온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한때 마법사를 꿈꾸다 연금술사의 길로 전향한 그는 세계의 신비에 관심이 많았다.
‘검은 보석은 단순히 연금술을 강화시키는 촉매제가 아니다. 검은 보석은 이 세계와는 다른, 어떤 특별한 세계로 통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걱정 마십시오 공작. 제가 새로이 연구하고 있는 작품은 분명 왕자를 확실하게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요.”
룽겔 공작도 케플러의 새로운 작품을 알고 있었다.
“이번엔 실망시키지 말게. 케플러.”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개 숙인 케플러가 공작의 방을 나섰다.
눈앞에 펼쳐진 긴 복도를 걸으며, 그는 검은 보석에 대해 생각했다.
보석의 의지는 케플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조금 전 룽겔 공작에게도 말했던 것처럼.
그는 보석을 통해 오토마이어 왕자가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사실을 룽겔 공작에게 전해 기병대를 출동시킬 수 있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지.’
보석의 의지가 쫓은 건 오토마이어 왕자가 아닌, 그가 속한 일행의 또 다른 전사였으니까.
그리고 케플러는 그 전사가 식인마들을 학살한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석의 의지는 그 전사를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
버서커 아틸라.
* * *
클로비스 백작령을 동으로 스치며 북진한 아틸라는 마침내 룽겔 공작령에 다다랐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야만전사야.”
아틸라를 돌아보며 바토리가 물었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더냐.”
사엽초를 회수하기 위해 아틸라와 바토리는 먼 걸음을 했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현재 나바라 왕국은 대규모 전쟁의 전조를 강하게 내뿜고 있다.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이 죽었고.
그에 따라 몇몇 귀족 가문이 왕좌를 노리고 군을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전 지나쳤던 클로비스 백작령에선 이십여 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클로비스 가문 출신의 왕비가 낳은 자식이라고.’
그제서야 아틸라는 클로비스 백작령에서 전쟁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돌아온 왕자를 견제하기 위해 룽겔 공작이 지글러 백작에게 사주해 클로비스 백작령을 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지글러 백작은 태도를 바꿔 왕자의 편에 붙었다.
‘재미있게 됐군.’
돌아온 왕자의 존재는 룽겔 공작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장 유력한 차기 왕 후보는 룽겔 공작이었다.
‘라일과 적마탑의 입장에선 돌아온 왕자가 왕이 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겠지.’
아틸라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라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적마탑을 떠나는 아틸라에게 그는 증표를 하나 건네줬었다.
‘이걸 보이면 적어도 나바라 왕국 내에선 어디든 편히 갈 수 있을 거다.’
“무작정 룽겔 공작의 성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니더냐.”
바토리가 다시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이곳엔 룽겔 공작을 지지하는 가문들이 군을 이끌고 합류하고 있다.
그들의 목표라면 물론 클로비스 백작령에서 힘을 키우는 중인 ‘귀환왕자(歸還王子)’.
클로비스 백작령을 지나며 듣기론, 그 왕자는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의 환생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외모와 압도적인 검술을 지녔다고 한다.
아틸라는 그것에 순수한 흥미를 느꼈다.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던 귀환왕자라. 조금 궁금하긴 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