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66화 (166/425)

166. 왕의 길 (1)

“가 보긴 무슨. 됐다.”

“그러지 말고 가 보자꾸나.”

“왜.”

“네가 투덜대는 것을 그만 보고 싶구나.”

“내가 언제.”

“지금도 투덜대고 있지 않느냐.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아틸라는 대답 없이 말을 몰았다.

그의 뒤를 따라붙으며 바토리가 배시시 웃었다.

“또 토라진 것이더냐.”

* * *

지글러 백작은 조금 당황했다.

첫 번째 교전 이후 단단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클로비스 백작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놀랄 일은 잠시 후에 벌어졌다.

“오토마이어 왕자?”

지글러 백작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왕자를 확인한 기사와 병사들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유, 율켄마이어 왕께서 살아 돌아오셨다!”

나이가 있는 기사와 병사들은 클로비스 백작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왕자에게서 율켄마이어의 모습을 봤다.

지글러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겁쟁이 약골 왕자가 저렇게 변했다고? 말도 안 돼. 그야말로 선대왕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지 않았나!’

왕자는 나바라 왕가를 상징하는 청록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깔끔하게 뒤로 묶은 머리와 정돈된 수염은 그를 마치 한 폭의 그림 속 기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아군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왕자의 겉모습에 압도되고 있다. 일단은 병력을 물러야 해.’

지글러 백작은 서둘러 병사들을 후퇴시켰다.

그에 맞춰 클로비스 백작군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양 진영은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둔 채 대치했다.

왕자가 말을 몰며 앞으로 나왔다.

“지글러 백작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오!”

지글러 백작도 말을 몰며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이오. 지글러 백작.”

“오랜만입니다. 왕자 전하.”

불필요한 서두는 모두 생략한 물음이 왕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클로비스 백작령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요.”

지글러 백작은 말을 골랐다.

그는 깨달았다.

눈앞에서 마주한 오토마이어 왕자는 더 이상 예전의 병약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룽겔 공작의 사주를 받은 거요?”

왕자의 질문이 이어졌고, 지글러 백작은 등 뒤에서 한 방울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룽겔 공작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왕가의 후계자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소. 아울러 얼마 전엔 왕을 시해했다는 혐의가 추가됐지.”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단순한 혐의에 그친 것이 아닙니까. 룽겔 공작이 그런 중죄를 저질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왕자의 입가에 비소가 담겼다.

“룽겔 공작은 왕국으로 돌아온 날 죽이려 했소. 그의 기병대가 남쪽 관문에서부터 나를 쫓았고, 공격했지. 내 동료와 로잘린 경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벌써 그들의 손에 죽임당했을 것이오.”

“그렇지만 왕자 전하.”

“이것만으로도 룽겔 공작은 중죄를 저질렀소. 왕국으로 돌아온 왕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해하려 했지. 나는 룽겔 공작을 반역자로 규정했소. 아울러 나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그를 잡아 벌할 것이오.”

왕자의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신중하게 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대는 룽겔 공작과 마찬가지로 내게 반기를 들 것이오? 아니면 나와 함께 왕국의 반역자를 처단할 것이오.”

지글러 백작은 즉답하지 못했다.

“그대가 날 못 미더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대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철부지 소년에 불과할 테니까. 그래서 기회를 주겠소.”

“기회라 하심은…….”

“나바라 왕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서 유지될 수 있는 나라요. 그러려면 왕의 무력이 막강해야 하겠지.”

‘왕은 왕국의 그 어떤 기사보다도 강해야 한다.’

그것은 생전의 율켄마이어가 왕국의 구호처럼 외쳤던 말이었다.

“룽겔 공작의 무력에 대해 논하시는 거라면, 이미 시대는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군주가 빼어난 무예를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뛰어난 기사를 보유하는 것으로 충분히 그것을 메울 수 있습니다.”

왕자의 입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상했던 대답.

지금 오토가 지글러 백작에게 하는 말은 모두 클로비스 백작과의 은밀한 독대를 통해 결정된 것이었다.

오토는 나바라 왕국의 세부적인 정세를 몰랐다.

다행히도 그것에 대해선 클로비스 백작이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그래서 둘은 긴 회의 끝에 어떤 작전을 짰다.

‘말투가 다소 고역이긴 하지만.’

그러나 어투를 바꾸는 것도 큰 문제랄 것은 없었다.

오토는 15살 때까지 왕성에서 자랐고, 그런 그에게 귀족을 대하는 왕자의 말투를 연기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토는 주변의 인물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저들 모두는 날 왕 대하듯 보고 있다.’

사실 그는 남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건 자신을 뛰어난 전사로 바라볼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저 많은 적군과 아군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지글러 백작까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우수한 전사를 마주했을 때의 동경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토는 조용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의 진영에 룽겔 공작의 두 기사가 섞여 있는 것을 알고 있소.”

클로비스 백작과 오토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오토가 왕자의 이름으로 룽겔 공작의 기사 중 한 명과 결투한다.

그리고 상대를 쓰러뜨려 그간 오토마이어가 지녔던 좋지 않은 편견을 뒤집고, 강력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오토는 그것 이상을 보일 생각이었다.

룽겔 공작의 두 기사 중 하나를 쓰러뜨리는 것으론 부족하다.

여기선 본보기를 보이는 의미에서라도, 더욱 강하게 나가야 한다.

“룽겔 공작의 두 기사와, 동시에 결투를 치르겠소.”

“그게 무슨……!”

“그대에겐 하등 불리할 것이 없는 제안일 거요. 내가 두 기사를 쓰러뜨린다면 그대는 더 이상 룽겔 공작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나를 따를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진다면 내 목을 룽겔 공작에게 바칠 수 있을 테니까.”

왕자의 말대로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지글러 백작에겐 손해갈 것이 없는 이야기.

‘왕자의 머리에서 나온 계산인가. 아니면.’

지글러 백작은 클로비스 백작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바로 치워 냈다.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가 중요할 뿐.

‘그러나 안타깝군. 오토마이어 왕자.’

그는 왕자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며 깨달았다.

왕자가 왕의 재목이라는 것을.

‘맹랑했다 왕자. 당신은 결코 룽겔 공작의 기사들을 쓰러뜨릴 수 없어.’

룽겔 공작의 기사들.

그들의 실력을 지글러 백작은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의 기사만을 상대하는 편이 좋았을걸. 물론 그리해도 승산은 그리 크지 않을 테지만.’

지글러 백작은 이번 작전이 클로비스 백작이 아닌, 왕자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것이라 결론 내렸다.

‘클로비스 백작이라면 룽겔 공작의 두 기사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진 않았을 거다.’

지글러 백작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드러났다.

두근대던 심장의 고동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좋습니다 왕자 전하.”

지글러 백작이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세이론이 말을 몰아 나와 오토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것이오 왕자. 원래의 계획은 한 명의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소?’

세이론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괜찮다고 답한 오토는 말에서 내린 뒤, 검과 방패를 꺼내들었다.

잠시 후 룽겔 공작의 두 기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오토와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린 뒤 자신의 무기를 쥐었다.

“이렇게 왕자 전하의 수급을 가져갈 수 있게 해 주어 고맙소.”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것 아니오? 죽기 싫어 왕국에서 도망친 겁쟁이 왕자께서 우리 둘을 동시에 상대하시겠다니.”

두 기사가 킬킬대며 웃었다.

한 명은 오토처럼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양손대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 기사 모두 오토보다 덩치가 컸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어떻소. 그렇게 한다면 룽겔 공작께서도 목숨만은 살려 주실 거요.”

“그렇지. 마침 내 종자 놈이 병에 걸렸는데 어떻소. 이참에 내 종자로 일해 보는 것은.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리다. 으하하하하하!”

두 기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들의 노골적인 말에 클로비스 백작군은 분노로 가득한 얼굴이 되었지만 왕자는 달랐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두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들의 말 따위 그의 귀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장악한 질문은 오직 하나였다.

‘아틸라 님이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싸웠을까.’

오토는 아틸라의 전투를 수없이 봤다.

남몰래 아틸라의 전투법을 연구하고, 연습하기도 했다.

오토는 자신의 힘에 대해 크게 자신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 또한 나의 운명이겠지. 그렇지 않소? 아틸라 님.’

오토가 제 가슴을 두드리며 나바라 왕국의 예를 표했다.

그러고는 아틸라의 습관처럼 콰앙! 검과 방패를 맞부딪쳤다.

오토의 무릎이 굽어지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두 기사는 자신들의 도발이 먹히지 않자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목숨을 구걸할 기회는 이미 드렸소. 왕자 전하.”

짧은 고요가 전장에 내려앉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있었건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을 깨뜨린 건 양손대검을 쥔 기사였다.

“하아아압!”

질풍 같은 속도로 기사가 달려들었다.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몸놀림.

세이론과 로잘린마저 그의 속도에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검과 방패의 기사가 오토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정면에선 양손대검이, 측면에선 방패 뒤에 몸을 숨긴 기사의 한손검이 오토를 노리며 쏘아졌다.

“플레이트 아머를 믿고 계신 모양인데, 내 힘을 버티진 못할 거요!”

힘차게 양손대검을 내리치며 기사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다.

지금 오토에게 플레이트 아머는 상징적인 것.

그는 상대의 검이 자신의 갑옷을 건드리게 할 생각이 없었다.

오토는 방패 기사를 향해 몸을 이동시키며 양손대검을 피했다.

그의 드워프 강철방패가 상대의 방패를 후려쳤고, 그것을 맞은 기사는 생각 외의 강력한 힘을 느끼며 뒤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그는 보았다.

왕자의 눈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결코 가질 수 없을 듯한 섬뜩한 예기를 발하고 있는 것을.

“건방진!”

양손대검의 기사가 내려쳤던 검을 추켜올리며 공격했다.

왕자의 검이 그것을 막았지만 상대의 괴력을 이기지 못한 듯 사선으로 튕겨 났다.

양손대검의 기사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대로 다시 검을 내리치면 왕자는 장작처럼 반으로 쪼개질 것이다.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시이잇!

튕겨 낸 줄 알았던 왕자의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양손대검의 기사는 그 모습이 마치 허공을 가르는 제비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순간 그의 안면에 강철검이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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