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클로비스 백작 (3)
그 말에 오토, 카스피, 로잘린, 심지어 세이론마저 놀란 눈을 떴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백작이 말했다.
“왕자께서도 아시겠지만 나바라 왕국은 왕의 힘이 강한 나라요. 율켄마이어 왕은 강력한 군주였지. 그가 있었기에 룽겔 공작은 그동안 자신의 야심을 표면화하지 못했던 거요.”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리샤르의 힘이 컸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왕의 공석은 오래 비울 수 없소. 강력한 왕의 존재가 없다면 나바라 왕국은 저 남쪽의 대국(大國) 발루아처럼 수많은 공후백국으로 쪼개질 거요. 물론 발루아는 그 와중에도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지. 그러나 나바라는 다를 것이오. 오랜 시간 중앙집권 국가였던 이곳은 발루아와 같은 지방분권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소.”
백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게 되면 남쪽의 패왕이라 불리는 샤를 아인하르트. 그의 패도를 막아 낼 수 없을 것이오.”
샤를의 이름이 나온 순간 오토와 카스피는 서로를 돌아봤다.
백작이 이어 말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룽겔 공작이 왕이 되어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 편이 나을 테지.”
“하지만 아버지.”
“넌 빠져 있거라. 세이론.”
백작의 눈이 오토를 바라봤다.
오토가 입을 열었다.
“룽겔 공작은 왕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수많은 왕의 후계자를 살해했고, 기어이 왕마저 암살했습니다.”
“그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있소?”
그것이 문제였다.
모두들 룽겔 공작을 의심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다.
룽겔 공작은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왕의 음식에 독극물을 주입했다고 의심받은 첩 역시 의문의 실족사를 당했다.
“룽겔 공작은 ‘검은 보석’이라 불리는 사악한 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적마탑을 습격한 리샤르 세바스찬이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힘이지요.”
오토는 적마탑 습격 사건에 대한 전모를 밝혔다.
듣는 내내 백작은 흥미로운 눈을 떴고,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의 말이 끝나자 로잘린이 도우며 나섰다.
“그 수상한 힘에 대해서는 저 역시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그녀는 룽겔 공작의 기병대가 오토마이어 왕자를 살해하려 했던 것과, 그들이 타고 온 말의 발이 검은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던 것.
그리고 결국엔 식인마로 변해 기병대를 씹어 먹은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세이론이 분노해 외쳤다.
“룽겔 그자가 감히! 대놓고 왕자를 살해하려 하다니! 이것만으로도 룽겔 공작의 죄를 물을 근거는 충분합니다 아버지!”
백작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로잘린 경. 그대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게 무슨…….”
“룽겔 공작이 기병들에게 왕자를 살해하라 지시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는 말일세.”
“……없습니다. 기병대는 그 자리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엔 추호도 거짓이 섞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난 그대의 말을 믿네. 그러나 내가 믿는 것과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
회의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오토가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카스피.”
카스피가 동그란 눈을 뜨며 오토를 바라봤다.
오토가 이번엔 로잘린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이곳에 남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나를 따라다녀 봐야 위험한 일에 노출될 뿐이오.”
“왕자 전하!”
“내 말을 따르시오. 그대의 주군인 나, 오토마이어 나바라가 명하는 바요.”
그 말에 로잘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사는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명에 따라야 한다.
“무례한 방문을 질책하지 않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토는 클로비스 백작과 세이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뒤돌아 출입문을 향해 걸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던 카스피가 강아지처럼 오토의 뒤를 따랐다.
“어딜 가시려는 게요. 왕자.”
백작의 음성이 오토를 멈춰 세웠다.
오토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나직이 답했다.
“외조부님께 들을 말은 모두 들은 것 같습니다.”
“성급하시구려. 왕자.”
백작의 목소리엔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분명 난 그대와 로잘린 경의 말을 모두 믿는다고 했소.”
오토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백작은 조금 전과는 달라진 얼굴로 오토를 보고 있었다.
“현 시간부로 클로비스 백작령은 왕자의 보호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오. 또한 왕족을 살해하려 했던 반역자 룽겔 공작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겠소.”
“하지만 외조부님.”
“다른 귀족들이 믿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소.”
백작의 입술 끝이 확연한 미소를 그렸다.
“클로비스의 힘을 보여 주겠소.”
* * *
이튿날 아침.
단검을 손에 들고 다가오는 카스피를 보며 오토가 기겁해 말했다.
“이, 이걸 꼭 해야 하는 거요?”
“가만히 좀 있어봐. 왕자면 왕자다운 위엄이 있어야지.”
“내가 위엄이 없다는 거요?”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는 거야 영주 나리는.”
카스피는 오토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에 쥔 단검으로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틸라처럼 깨끗이 밀어 버리는 게 나으려나? 아니지. 왕족의 위엄을 보이려면 어느 정도의 수염을 남기는 편이 좋겠어. 그 세이론인가 하는 아저씨처럼 말이야.”
“나, 난 외숙부처럼 수염이 많지 않소!”
“아 쫌 가만있어 봐. 내가 알아서 잘 해 줄 테니. 그렇지. 이참에 너저분한 머리도 좀 정리하자. 그래. 그게 좋겠어.”
카스피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이발에 면도까지 하게 된 오토는 히익히익 비명을 질렀고, 카스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뜨며 깔깔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잘린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카스피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던 그녀였지만.
짧게나마 함께 여행을 하며, 그녀는 카스피가 진정으로 오토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믿음직한 동료를 구하셨군요. 왕자 전하.’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카스피가 만족한 얼굴로 헤헤거렸다.
“경비대장 아줌마. 어때?”
오토의 모습을 본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정리된 수염.
말끔하게 뒤로 모아 묶은 머리.
오늘따라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플레이트 아머.
거기에 더해 클로비스 백작이 전해 준 깨끗한 옷과 망토는 오토를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히익! 이게 나라고?”
거울을 들여다본 오토도 깜짝 놀랐는지 비명을 질렀다.
카스피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오. 이렇게 꾸미니까 영주 나리도 제법 괜찮은데? 어떻게 보면 정말 왕 같은 느낌이야.”
“와, 왕은 무슨. 그런 소리 마쇼!”
손사래를 치면서도 오토는 흘끔흘끔 거울을 쳐다봤다.
입꼬리를 올리며 콧구멍을 발름대는 꼴이 무척이나 제 모습이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
“입 찢어지겠어 영주 나리.”
잠시 후 세이론이 그들의 방을 찾아왔다.
그 역시도 달라진 왕자의 모습에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어 만족한 얼굴로 바뀐 세이론은 오토 일행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곳엔 클로비스 백작을 포함한 성의 모든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저분이 오토마이어 왕자 전하라고……?”
지휘관들은 백작의 입을 통해 왕자의 귀환 소식을 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릴 적의 왕자를 본 일이 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왕자의 모습에 그들 모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클로비스 백작이었다.
백작은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과 막역한 친우 사이였다.
그는 오토마이어 왕자의 모습에서 선대왕의 모습을 봤다.
‘이럴 수가……. 마치 율켄마이어가 살아 돌아온 것 같지 않은가.’
회의가 시작됐다.
지휘관들은 여러 의견을 내놓았지만, 결국엔 성문을 열고 지글러 백작군과 정면 승부를 벌인다는 결론으로 귀결됐다.
클로비스 백작이 말했다.
“지글러 백작은 룽겔 공작의 하수인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지. 그는 룽겔 공작이 왕이 된다 해도 그 치세가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네.”
백작의 눈이 오토를 향했다.
“그는 룽겔 공작이 왕이 되는 것보다, 정통성을 가진 오토마이어 왕자를 왕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편이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따라서 지글러 백작군과의 전쟁은 그리 길지 않을 걸세. 우리가 오토마이어 왕자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 즉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할 테니까.”
오토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지금은 룽겔 공작을 잡는 것이 먼저다.
굳이 지휘관들에게 왕이 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 사기를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세이론이 말했다.
“그러나 지글러 백작은 단순히 오토마이어 왕자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론 룽겔 공작을 거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오토마이어 왕자의 생환 소식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지글러 백작이 룽겔 공작을 통해 왕자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지휘관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지글러 백작이 왕자 전하의 존재를 보고도 병력을 무르지 않는다면 아군의 피해도 클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지글러 백작군만이 아닙니다. 룽겔 공작과, 그를 따르는 많은 귀족 가문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네. 지글러 백작은 반드시 병력을 무를 테니까.”
그렇게 말한 백작이 오토를 돌아봤다.
“그렇지 않소? 오토마이어 왕자.”
백작은 자신의 눈을 믿었다.
오토마이어 왕자는 성장했다.
그가 전장에서 보여 줄 모습은 분명 지글러 백작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 것이다.
오토도 외조부의 마음을 읽었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물론입니다.”
* * *
“야만전사야.”
“왜.”
“철혈귀검과 카스피가 전쟁에 휘말린 모양이다.”
“무슨 전쟁.”
“전쟁의 규모가 제법 상당한 것 같구나. 위치를 보아하니 이곳에서 멀지 않다. 그래. 클로비스 백작령이로구나.”
“클로비스?”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비스는 나바라 왕국에서 나름 힘을 지닌 가문이다.
게다가 클로비스 백작성은 마이어 강이 성의 삼면을 가로막듯 흐르는 덕분에 외세의 침입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쉬이 전쟁이 발발할 지역이 아니라는 것.
“상대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인간들이다.”
“옷은 입고 있고?”
“그래. 다행히 옷은 입고 있구나. 플레이트 아머도 제대로 착용한 것 같고.”
“오토 그 새낀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금방 볼일 보고 온다더니 정체도 모를 일행 하나 구한 뒤 벌거벗고 뛰어다니질 않나. 귀족들 전쟁에 난데없이 용병으로 끼어들지를 않나.”
아틸라는 당연히 오토와 카스피가 무언가의 이유로 단기 용병 일을 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야만전사야.”
“왜.”
“화가 난 것이더냐.”
“화는 무슨.”
말머리를 붙이며 바토리가 물었다.
“한 번 가 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