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클로비스 백작 (2)
내내 무심한 얼굴이던 아틸라는 처음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오토 이 새끼 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그러면서 아틸라는 저도 모르게 카스피의 벗은 몸을 상상했다.
“야만전사야.”
“왜.”
“얼굴이 빨갛구나.”
“모닥불이 뜨거우니까.”
“흐응.”
바토리가 입술 끝을 비틀며 아틸라를 흘겨봤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들어 아틸라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야. 넓은 자리 두고 왜 이리 오는데.”
“춥구나.”
“춥긴. 모닥불이 너무 강해서 몸이 다 익을 지경이다.”
“몸이 춥다는 뜻이 아니니라.”
두 팔로 제 무릎을 감싸 안은 바토리가 고개 돌려 아틸라를 바라봤다.
“내 마음이 말이다.”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하던 아틸라는 술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바토리가 아틸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틸라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순간 바토리는 무언갈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꼬옥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를 향했다.
아틸라는 술을 마셨고, 둘은 그렇게 한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
* * *
‘빌어먹을. 내가 달밤에 왜 이런 짓을!’
성벽 안으로 몸을 날리며 카스피는 손날에 약간의 귀기를 집중했다.
그리고 병사 하나의 목을 후려쳤다.
“……!”
급소를 얻어맞은 병사가 무릎을 꿇고 기절했다.
남은 병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카스피를 바라봤다.
그가 놀란 이유는 모두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지금껏 단 한 명의 침입자도 허용하지 않았던 마이어 강쪽 성벽이 뚫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벽을 뚫고 올라온 자가 손에서 기묘한 붉은 연기를 흩뿌리고 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나, 나체 여자?”
완전한 나신은 아니지만 중요한 곳만을 국소적으로 가린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심지어 여자는 아름다웠다.
달이 사라진 탓에 얼굴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에 늘씬하게 긴 다리는 병사의 눈을 홀리기 충분했다.
때마침 구름 뒤에서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머금어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이 병사의 시야에 잡혔고, 그제서야 병사는 깨달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평소 잠이 많아 경계 근무 중에 조는 일이 많았던 그는 이것이 꿈일 거라 단정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이런 난공불락의 성벽 위에 나신에 가까운 차림으로 등장한 매혹적인 여자.
누가 이런 상황을 현실이라 생각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병사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꿈속이지만 저런 여자를 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리고 이 꿈이 가급적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갈망하며.
병사는 소원을 이뤘다.
“께륵……!”
무방비하게 달려드는 병사의 목덜미를 카스피가 후려쳤고, 그 덕에 그는 더욱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
“후……. 변태 새끼. 침입자가 들어왔는데 공격할 생각은 안 하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다니.”
카스피는 병사가 기절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움을 구하러 온 처지에 성에 난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병사를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좋아. 두 녀석 다 잘 자고 있네.”
카스피는 주위를 확인하며 다른 병사가 없는지를 살폈다.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한 카스피는 병사의 옷을 벗겨 사슬낫의 끈을 더욱 길게 만들었다.
“윽. 냄새.”
코를 찌푸리며 카스피는 성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조심 사슬끈을 내렸다.
성벽 아래서 조마조마하고 있던 오토와 로잘린은 끈을 내리는 카스피의 얼굴을 보곤 안도했다.
‘훌륭하오! 살쾡이 암살자!’
병사의 옷가지를 추가로 이은 덕에 끈은 짧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병사의 옷이 아니었다면 오토와 로잘린은 끈에 손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병사는 처리했어야 했다는 이야기.
“휴. 이제야 올라왔…… 커헉! 켁!”
무사히 성벽 위에 오른 오토는 예고대로 카스피에게 목을 몇 대 얻어맞았다.
로잘린까지 성벽을 오르자 셋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드워프 강철로 만든 플레이트 아머는 인간이 제작한 것과 다르게 탈착이 손쉬운 편이었고, 그래서 오토는 생각보다 빠르게 갑주를 착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옷보단 시간이 걸리는 법.
카스피가 투덜댔다.
“그 갑주를 꼭 지금 입어야 해? 이러는 동안 병사들이 나타나면 어쩌려고.”
“황금바위산의 골든핑거 장인님께서 날 위해 제작한 이 드워프 강철 플레이트 아머는 내 피부와도 같소. 함부로 벗어 놓을 수는 없는 법이지.”
“후…….”
카스피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뱉었지만 로잘린의 생각은 달랐다.
‘왕자 전하께서는 최대한 갖춰진 모습으로 클로비스 백작을 만나야 한다.’
로잘린은 오토의 갑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것이 드워프 대장장이 중에서도 장인에 속하는 자의 작품이었다니.
‘왕자 전하께서는 뛰어난 검술뿐 아니라 훌륭한 무구까지 손에 넣으셨다.’
오토마이어 왕자는 정확히 24년 만에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행색이 번듯해야만 클로비스 백작과의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그렇다면 드워프 장인의 무구는 큰 도움이 된다.’
오토가 갑주를 입는 것을 도우며 로잘린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오토에게 왕위에 대한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미안하오 로잘린. 난 왕좌에 앉을 생각이 없소.’
오토는 그렇게 말했지만, 로잘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의 정세가 지속된다면 룽겔 공작이 왕좌를 차지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둘 순 없다. 절대로.’
로잘린은 룽겔 공작이 결코 성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자는 너무나도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것과 별개로 로잘린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주군, 오토마이어 왕자를 왕좌에 앉히고 싶었다.
또한 그것이야말로 옥중에서 독살 당한 이본 왕비의 한을 갚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쪽입니다.”
로잘린이 방향을 안내했다.
그녀는 클로비스 백작 가문을 섬기는 란틴크 가문의 기사였기에 백작성의 내부 구조라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세심한 안내로 오토와 카스피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성벽을 내려갔고, 내성에 진입했다.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병사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밤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로잘린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는 병사들을 살펴봤다.
그러나 아는 얼굴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이본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론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로잘린은 기사로 보이는 어느 중년의 사내가 경계 순찰을 도는 모습을 봤다.
그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에 살집이 붙고, 덥수룩한 수염이 과거의 얼굴을 상당 부분 가려 놓았지만 그는 분명 로잘린이 잘 알고 지내던 기사였다.
또한 지금 오토 일행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로잘린이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세이론 경.”
갑작스레 나타난 침입자에 병사들이 동시에 창검을 꺼냈다.
그것을 중년의 기사, 세이론이 막았다.
“로잘린.”
로잘린을 본 세이론은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금세 침착의 빛을 찾았다.
“이십여 년 만에, 그것도 이런 전시에 갑작스레 찾아오다니. 보아하니 정식으로 성문을 지나온 것 같지도 않구려.”
“그렇습니다 세이론 경.”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오. 허나 만약 이유가 타당치 않다면, 난 그대를 구속하고 백작께 보고드릴 의무가 있소.”
“먼저 병사들을 물러 주시겠습니까.”
세이론의 눈이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
상대의 머릿속을 읽으려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 로잘린을 훑었다.
“좋소.”
세이론은 병사들을 물렀다.
“말해 보시오. 로잘린.”
대답은 로잘린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론은 놀란 눈으로 밤의 어둠을 노려봤다.
‘이 내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세이론은 훌륭한 기사였고, 감이 좋았다.
그는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저만치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기척을 감지했었다.
그곳에서 로잘린이 나타났고, 기척은 사라졌다.
그래서 세이론은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이 숨어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세이론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어둠을 뚫고 등장한 사내가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세이론은 그의 얼굴 속에서 낯익은 소년의 얼굴을 봤다.
사내가 되어 돌아온 소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세이론 숙부.”
* * *
오토, 카스피, 로잘린은 회의실로 안내됐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클로비스 백작은 24년 만에 돌아온 외손주를 보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오토마이어 왕자는 클로비스 백작에겐 애증의 존재였다.
백작이 누구보다 사랑하던 딸, 이본 클로비스가 낳은 유일한 자식이자.
그녀를 죽게 만든 원흉이었으니까.
로잘린이 말했다.
“룽겔 공작이 왕자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백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룽겔 공작은 왕을 암살했다.
물증은 없지만 나바라 왕국의 귀족들은 모두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룽겔 공작이 24년 만에 왕국으로 돌아온 오토마이어의 소재를 발견했다.
당연히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오토마이어를 잡아야 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이든, 아니면 살려 두어 꼭두각시로 이용하든.
클로비스 백작은 그제서야 지글러 백작의 군대가 성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오토마이어의 귀환 소식을 접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군. 만약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도움을 주지 못하도록 성을 봉쇄한 것이고 말이야.’
클로비스 백작은 지글러 백작이 룽겔 공작과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작의 눈이 오토마이어의 플레이트 아머와, 검과 방패를 찬찬히 둘러봤다.
지금은 노쇠했지만 그 역시 평생 검을 쥐고 살아온 자.
‘예사로운 무구가 아니로군.’
또한 그는 오토마이어가 이전의 병약한 소년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했다.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전사의 눈이다.’
달라진 외손주의 모습을 보며 백작은 애정과 증오의 두 상반된 감정이 격류하는 것을 느꼈다.
그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백작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얼굴에서 왕자에 대한 애증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왕자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오.”
“룽겔 공작을 잡아 왕 시해의 죄를 묻겠습니다.”
“그 뒤에는?”
오토가 즉답하지 않자 백작이 다시 물었다.
“룽겔 공작에게 죄를 묻고 난 뒤엔 어쩌실 생각이오. 정통성을 내세워 왕좌에 앉으시겠소?”
“……그건 아닙니다.”
“룽겔 공작을 잡아 죄는 묻겠지만 왕은 되지 않으시겠다, 이 말씀이오?”
오토는 대답을 유보했지만, 백작은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룽겔 공작이 왕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