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클로비스 백작 (1)
클로비스 백작성은 나라바 왕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마이어 강이 성의 측후면을 둘러싸며 흐르는 천혜의 요새였다.
물론 백작성의 정면으론 강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깊이 파인 해자와 높은 성벽을 보아 성 안으로 침투하는 것은 극도로 어려워 보인다고, 지글러 백작은 생각했다.
“과연 수비의 클로비스라 불릴 만하군.”
이번 전투에 직접 나선 지글러 백작은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로잘린의 예상대로, 그는 룽겔 공작의 사주를 받아 클로비스 백작성을 침공했다.
그러나 양 진영 모두 극소수의 사상자만을 냈던 첫 교전 이후, 지글러 백작은 단순히 클로비스 백작성의 정면을 틀어막고만 있었다.
그는 룽겔 공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클로비스 백작이 오토마이어 왕자가 돌아온 것을 눈치챈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 왕좌에 앉히려 할 것이오.’
‘지글러 백작. 당신의 임무는 클로비스 백작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놈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오토마이어 왕자는 이쪽에서 처리하겠소.’
오래전부터 룽겔 공작과 한배를 타온 지글러 백작은 그 요청을 수락했다.
룽겔 공작은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왕위를 노려 왔다.
그러나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이 젊었을 적엔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대단하여 감히 자신의 야심을 드러낼 수 없었고.
율켄마이어가 노쇠하기 시작한 후론 갑작스레 등장한 리샤르 때문에 일을 도모하지 못했다.
궁정 마법사 리샤르 세바스찬.
그는 다름 아닌 적마탑의 탑주 후보였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로 율켄마이어를 독살하다니.”
룽겔 공작은 리샤르 세바스찬이 검은 보석의 힘을 경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적마탑을 습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리샤르가 적마탑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룽겔 공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그래. 바로 지금이로군.’
왕은 늙었고, 무능해졌다.
자신의 첩이 보란 듯이 음식에 독을 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왕의 암살에 성공한 룽겔 공작은 이제야 자신이 왕좌에 앉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율켄마이어 왕의 적통 후계자, 오토마이어 왕자가 나타난 것이다.
“재미있군.”
지글러 백작은 겉으로 보이는 호전적인 면과 달리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룽겔 공작의 말을 따르며, 한편으론 왕국의 정세를 끊임없이 살폈다.
‘룽겔 공작은 늙었다. 20년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왕이 되기엔 너무 노쇠했지.’
지글러 백작은 룽겔 공작이 왕좌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기껏해야 5년 안팎으로 보았다.
‘룽겔 공작이 왕이 된다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 뒤를 봐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향후 그의 아들이 왕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룽겔 공작의 세 번째 부인은 지글러 백작의 누이였다.
그리고 룽겔 공작의 공식 후계자는 첫 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
룽겔 공작은 지글러 백작가에서 온 세 번째 부인을 가장 총애했지만 후계자 선정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능력을 따졌다.
그 바람에 룽겔 공작의 자식들은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가 되기 위한 갖은 암투를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첫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은 극도로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현 룽겔 공작의 후계자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지글러 백작가 역시 탐탁지 않게 여겼다.
‘녀석이 왕이 된다면, 지글러 가문은 지금과 같은 위세를 가질 수 없게 될 거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룽겔 공작과 척을 질 수는 없다.
확실한 대안이 나타날 때까지는 쥐 죽은 듯 엎드려 있는 편이 좋다.
지금의 룽겔 공작은 누구보다도 차기 왕에 가까운 사내였으니까.
‘오토마이어 왕자라.’
지글러 백작은 오토마이어 왕자를 알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백작위에 오른 그는 왕자와 그리 나이 차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글러 백작이 본 오토마이어 왕자는 왕의 그릇을 지닌 사내가 아니었다.
‘한데 룽겔 공작은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고 있지. 그 얼간이 왕자에게.’
지글러 백작은 그것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갈 감지했다.
그것이 룽겔 공작이 지닌 특유의 조심성 탓인지.
아니면 오토마이어 왕자에게 뭔가 특별한 면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상외로 재밌는 패가 될지도.’
지글러 백작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 * *
흐릿한 달빛이 클로비스 백작성을 비췄다.
그 아래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세 개의 인영.
마이어 강의 차가운 강물을 타고 온 그들은 물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떨며 육지로 올라왔고, 그중 한 명의 기억에 의지하며 발을 움직였다.
수풀 속으로 들어간 세 사람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카스피가 속삭였다.
‘뭐야 영주 나리. 개구멍이 있다면서.’
‘어? 어어어? 이상하다. 여기 있었는데. 정말이오! 여기 있었단 말이요!’
‘그게 언젠데.’
‘음…… 한 25년 전쯤?’
카스피가 오토의 목을 후려쳤다.
‘장난해? 25년 전이면 난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잖아! 그때 있던 개구멍이 아직 있겠냐고!’
카스피의 말이 옳았다.
오토는 15세 때 나바라 왕국을 탈출한 뒤 한 번도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사이 왕국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했다.
로잘린이 속삭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지글러 백작군의 눈에 띌 우려가 있습니다.’
지글러 백작 군영은 이곳에서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들은 성에서 쏘아진 화살이 닿지 않을 정도의 근거리를 유지해 진영을 꾸렸고, 오토가 개구멍이 있다고 말한 이곳과는 상당히 가까운 편이었다.
‘클로비스 백작군의 눈에 띄는 것도 위험합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지금은 전쟁 중.
성벽 아래 낯선 이들이 모여있는 게 발각됐다간 그 즉시 화살비 세례를 맞을 테니까.
그렇다고 왕자의 신분을 내세워 성문을 두드리는 것도 불가했다.
이런 전시에 성 안의 사람들이 곧이곧대로 믿어 줄 리도 만무했고, 혹여 사실 확인을 위해 문밖에서 대기라도 한다면 상황을 깨달은 지글러 백작군이 물밀듯 들이닥칠 테니까.
‘이상하다. 분명 있었는데. 분명 있…… 앗! 찾았다! 찾았수 살쾡이 암살자!’
‘지, 진짜?’
카스피와 로잘린이 놀란 눈으로 달려갔다.
‘이것 보시오! 역시 내 기억은 틀림없었다니까! 으하하하하!’
과연 그곳엔 어린아이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법한 작은 구멍이 있었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 한 명 말이다.
그것도 어린 날의 오토처럼 아주아주 작은 아이.
의기양양해하는 오토의 목을 후려갈기며 카스피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곳으로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야! 내가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어도 여긴 못 지나간다고!’
‘케헥! 모, 몸이 자란 걸 잠시 잊었소! 하도 오랜만에 찾은 고향이라……!’
로잘린은 왕자의 변한 모습을 적응하기 힘들었다.
지금의 푼수 같은 모습이나.
적과 싸울 때 드러나는 베일 듯이 날카로운 모습이나.
씩씩대던 카스피가 성벽을 올려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올라가겠어.’
특급 살수의 경지에 오른 카스피에게 이 정도 성벽을 오르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올라간 뒤가 문제였다.
남몰래 성문을 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또한 클로비스 백작의 도움을 받으러 온 처지에 너무 무례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카스피가 먼저 성벽을 오른 뒤, 오토와 로잘린이 따라 올라온다.
그러고 나서 가급적 높은 신분의 사람을 찾는다.
그중엔 분명 오토나 로잘린을 알아보는 자가 있을 테니까.
‘밧줄로 쓸 만한 거 있어?’
카스피가 물었지만 일행에게 그런 것은 없었다.
결국 카스피는 자신의 사슬낫과 일행의 옷가지, 망토 등을 묶어 조잡하면서도 기다란 끈을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밧줄을 구해 오는 건데. 빌어먹을 영주 나리 같으니.’
‘미, 미안하오.’
‘보지 마! 이 음흉한 아저씨!’
‘아, 아무 것도 안 봤소!’
긴 끈을 만들기 위해 카스피도 제 옷을 벗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당히 헐벗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토와 로잘린은 갑옷이 있어 어느 정도 몸을 가릴 수 있었지만, 얇은 가죽옷을 입은 카스피는 달랐다.
‘……추워.’
‘그…… 살쾡이 암살자 옷은 올라간 뒤에 벗어서 묶으면 되는 거 아니요?’
‘영주 나리 진짜 바보야? 올라가서 묶는 동안 경비병이 오면 어쩔 건데?’
카스피는 귀를 기울였다.
성벽 위를 걷는 병사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멀어졌다.
때마침 달빛이 구름 뒤로 숨어들었다.
‘지금이야.’
카스피는 날렵한 동작으로 성벽 등반을 시작했다.
벽은 기름칠이 되어 미끄러웠고, 마땅히 손이나 발을 디딜만한 곳도 없었건만 카스피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성벽을 올랐다.
로잘린이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오토 님.’
‘맞소. 참으로 대단한 엉덩이……가 아니라 살수! 살수요! 암암!’
‘뭐, 뭐야? 다 들었어 영주 나리! 이따 올라오면 뒈지게 처맞을 줄 알아!’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일까.
성벽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방금 저 아래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그래? 난 못 들었는데.”
“한 번 가 보자고.”
‘흐에에엣!’
다급해진 카스피는 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밑에 있는 두 사람이 보기엔 동일한 상황이었지만 로잘린은 그 광경에 이를 악물며 손에 땀을 쥐었고, 오토는 콧구멍을 발름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한 카스피가 성벽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어?”
그녀는 두 명의 병사와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뭐, 뭐, 뭐야.”
“치,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빌어먹을. 속삭이듯 내뱉은 카스피의 몸이 성벽을 넘었다.
* * *
“야만전사야.”
“왜.”
“카스피가 제법 당혹스러운 일을 겪고 있는 모양이구나.”
으적으적 토끼 고기를 씹던 아틸라가 눈동자만을 굴려 바토리를 쳐다봤다.
사람을 먹고 다니는 미친 식인마들을 처리한 뒤라, 그는 잔뜩 허기가 져 있었다.
“무슨 일.”
“카스피가 말이다. 지금 한 꺼풀 한 꺼풀 옷을 벗고 있단다.”
“……그런 말을 내게 왜 하는 거냐. 쓸데없이 남 관음하지 말고 토끼나 먹어라.”
바토리가 아틸라를 새초롬히 쳐다봤다.
“흥미롭지 않은 것이더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고 있다는데.”
“흥미롭긴 뭐가 흥미로워. 목욕이라도 할 셈인가 보지.”
“그게 아닌 것 같구나. 속곳만 입은 채로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 아, 이제 보니 철혈귀검도 옷을 벗고 있구나.”
“뭐?”
“흐응. 둘이 가깝게 지내는가 싶더니, 이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 몰랐느니라.”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바토리가 눈을 굴려 아틸라의 표정을 살폈다.
아틸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모닥불의 온기를 맞으며 토끼를 씹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뭘.”
“카스피와 철혈귀검의 사이 말이다.”
“내가 알 바냐.”
무심한 얼굴로 고기를 씹으며 아틸라가 물었다.
“일행이 하나 늘었다면서. 걘 뭐하고 있는데.”
“옷을 벗고 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