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은밀한 숲의 연금술사 (2)
아틸라와 바토리는 알키미야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어차피 해도 기울었고, 오염된 숲의 정화는 내일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아침해가 뜨자마자 알키미야가 소리쳤다.
“다 퍼질러 잤으면 빨리 내놔! 내 ‘알키미야의 불’을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자의 돌 배합식!”
밤새 바토리의 현자의 돌을 연구하며 아틸라의 수면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알키미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동동 발을 굴렀다.
“빨리! 빨리빨리! 네 말대로 해 뜰 때까지 숨소리조차 죽이며 기다렸다! 빨리! 빨리빨리빨리빨리!”
늘어지게 하품을 한 아틸라는 알키미야에게 종이와 펜을 요구했다.
그러고는 무언갈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키미야가 중얼댔다.
“어, 어디 보자. 금풀, 황다래기, 은다수열매, 다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 응? 사엽초? 빌어먹을. 사엽초도 필요한 거야?”
“왜 놀라지?”
아틸라가 알키미야를 쳐다봤다.
사엽초는 은밀한 숲에 그리 흔하진 않아도,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식물이다.
더구나 이 숲에서 백 년을 살아온 알키미야라면 더욱이 어렵지 않을 일일 터.
이유는 알키미야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숲이 오염됐다고 말했었지. 그 오염은 주로 사엽초의 서식지에서 발생했다.”
“사엽초가 오염된 건가?”
“아니. 오염된 건 사엽초 주변의 풀과 나무들이다. 사엽초는 ‘검은 마법사’들이 깨끗하게 뜯어갔지.”
“아까부터 말하는 검은 마법사가 누구냐.”
아틸라는 알키미야가 잘 모르는 것이나 현상에 대해 제멋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검은 마법사’란, 말 그대로 검은 옷을 입은 마법사를 칭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부터 숲에 찾아온 불청객들이다. 꼭 인간 마법사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진짜 마법사 같진 않더군. 아무튼 놈들이 다녀가기만 하면 숲이 오염됐다. 알키미야의 불로 쫓아낸 적도 있지만 다음날 다시 찾아오더군.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인간인 것은 확실한가?”
“모르겠다. 내가 본 건 로브뿐이었으니까. 얼굴을 직접 본 건 아냐.”
아틸라는 처음엔 ‘검은 마법사’가 당연히 디디에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엔 큰 오류가 있었다.
디디에는 검은 옷이 아닌, 붉은색의 복면과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리샤르 세바스찬 외에도 ‘검은 보석’을 손에 넣은 자가 있는 모양이구나.”
바토리도 오토와 카스피처럼 리샤르의 최후를 목격했다.
그리고 그녀는 리샤르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군……. 그분의 종복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건가…….’
바토리는 리샤르가 최후에 내뱉었던 말을 아틸라에게 전했다.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었군. 근데 왜 그걸 이제 말하냐.”
“물어본 적이 없지 않았더냐.”
“뭐야. 그럼 사엽초가 없으면 나의 ‘알키미야의 불’이 반영구적인 힘을 가질 수 없다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지.”
“빌어먹을! 무효다! 전부 무효야! 이 돌을 가지고 얼른 꺼져 버려!”
화가 난 얼굴로 알키미야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렇겐 못하겠는데.”
“뭐?”
“넌 이미 현자의 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것에 대한 배합식도 네게 건네준 상태지. 한 번 시작한 일을 무르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제공한 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무언갈 넌 나에게 줘야만 해.”
“무슨 그런 억지가! 이 배합식은 아직 읽어 보지도 않았어! 게다가 생명의 보석이라고? 서리나무 엘프의 보물인 그것을 어떻게 구하라는 거야! 고로 이 계약은 무효다! 무효라고!”
“호오. 배합식을 읽지도 않았는데 배합을 위해 생명의 보석이 필요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
“알키미야, 너도 현자의 돌을 계속 연구하고 싶잖아. 네가 자랑하는 ‘알키미야의 불’도 완전체로 만들고 싶을 테고.”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잔말 말고 연구나 계속해라. 사엽초는 내가 어떻게든 구해다 줄 테니.”
“그걸 어떻게 구한다는 거야! 사엽초는 나바라 왕국에서도 오직 이곳 은밀한 숲에서만 나오는 귀중한 약재다!”
“검은 마법사라는 놈들이 가져갔다며.”
“그래!”
“그럼 그놈들에게 다시 돌려받으면 되겠군.”
아틸라는 장비를 착용하고 출입문을 향했다.
물론 연구실은 노움의 키에 맞게 천고가 낮았기에, 아틸라는 네 발 달린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기어가야 했다.
“일단은 숲의 오염부터 처리해 주지. 바토리. 현자의 돌 갖고 나와라.”
“알겠다. 먼저 나가 있으려무나.”
아틸라가 나간 것을 확인한 바토리가 알키미야에게 현자의 돌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 말거라. 숲의 난쟁이 노움아.”
바토리는 알키미야에게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틸라의 뒤를 따라 연구실을 벗어났다.
알키미야는 난생처음으로 인간 여자의 미소가 무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 * *
아틸라는 은밀한 숲을 걷고 있었다.
원래는 알키미야가 오염된 장소들을 안내하겠다 했지만, 아틸라는 굳이 그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저쪽이다. 야만 미물.”
아틸라에겐 도롱뇽이 있었으니까.
“흠. 이건 좀 심하군.”
오염지역에 도달한 아틸라는 주변을 둘러봤다.
나무와 들풀, 심지어 토양까지 검게 물든 것이 보였다.
“바토리.”
“알겠느니라.”
바토리의 입에서 고대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오염지역을 정화하는 동안 아틸라는 주변을 살피며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이번엔 저쪽이다 야만 미……, 아 이 미친 곰탱이 새끼 말 좀 들으라고!”
도롱뇽을 태운 펀치의 동그란 뒤통수를 쫓으며 아틸라와 바토리는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아틸라가 문득 물었다.
“카스피는 뭐하고 있냐.”
“흐응. 별달리 관심 없는 것이 아니었더냐.”
“카스피 뭐 하냐고.”
바토리는 반지에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전투는 무사히 마친 모양이다. 카스피도, 철혈귀검도 딱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구나.”
“그렇군.”
“걱정되는 것이더냐.”
“걱정은 무슨.”
“그런데 일행이 하나 늘어난 것 같구나. 그리고 북쪽으로 이동 중이다.”
“북쪽이라고?”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언제까지 머무를 건지, 떠나실 거면 어느 쪽으로 갈 건지만 좀 알려 주쇼. 내 꼭 뒤쫓아갈 테니.’
그렇게 말했던 오토가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니.
‘볼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찾으러 가 보겠느냐.”
바토리의 물음에 아틸라는 고개를 저었다.
카스피는 시공추적의 반지를 가지고 있다.
“됐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이후 몇 개인가의 오염지역을 추가로 정화시킨 일행은 해가 기울어갈 때쯤, 숲의 입구에 묶어 두었던 말을 데리고 알키미야의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튿날, 아틸라는 새로운 오염지역에서 처음으로 단서를 발견했다.
‘이건.’
주변 나무들에 불탄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알키미야가 검은 마법사들을 쫓아냈다던 장소인 듯했다.
아틸라가 발견한 건 불에 타다 만 옷자락이었다.
옷자락엔 희미하게 어느 귀족 가문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틸라는 그 문양의 주인을 알았다.
‘룽겔 가문.’
룽겔 공작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귀족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심을 이루지 못한 채 샤를의 군대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는다.
패영전 원작에선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
그러나 역사는 바뀌었고,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카르타고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리샤르 세바스찬을 오염시킨 명계의 검은 보석이 중간계를 침범했다.
라일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쳤다.
‘리샤르 세바스찬은 보기와 달리 왕의 편에 섰던 자다. 그가 있었기에 귀족들은 왕의 불성실한 행태에도 표면적인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러나 리샤르는 죽었고, 이제 왕국은 왕위를 쟁탈하기 위한 귀족들의 전쟁이 벌어질 거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던 이야기.
그러나 아틸라는 라일의 말을 떠올리며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율켄마이어는 시해당한 것인가. 범인은 룽겔 공작이고? 오토는 왜 북쪽으로.”
왜 지금 오토가 떠오르는 것인지는 몰랐다.
룽겔 공작의 영지가 이곳에서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가.
그러나 지금 아틸라가 있는 곳은 나바라 왕국의 최남단 지역.
룽겔 공작의 영지뿐 아니라 수많은 것들이 북쪽에 있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은밀한 숲의 모든 오염지역을 정화한 일행은 알키미야에게 현자의 돌을 맡겼다.
추가 단서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일단 룽겔 공작의 영지로 향할 생각이었다.
“사엽초를 가지고 돌아오지. 그리고 이건.”
아틸라는 품에서 빛나는 보석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도롱뇽이 키클롭스의 감옥에서 빼내왔던 ‘오르피나의 첫 번째 성물’이었다.
성물을 본 알키미야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허억! 헉헉! 이건 뭐지?”
“바토리의 현자의 돌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는 재료다. 배합식을 두고 갈 테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완성해 놓도록.”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아니, 돌아왔는데 사엽초가 없으면? 그럼 내 알키미야의 불은 완성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무엇에 쓸 생각인진 몰라도 룽겔 가문의 불청객은 상당량의 사엽초를 채집해 갔다.
그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쓸 상황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러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낫겠지.
바토리를 말 위에 올려 주며 아틸라가 말했다.
“현자의 돌이 없으니 잡기술 외의 마법은 쓰지 마라.”
“내 알았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느냐. 너도 참 했던 말을 반복하는 데 재주가 있구나.”
아틸라도 말에 올랐다.
도롱뇽을 입에 문 펀치가 아틸라 곁에 뛰어 올라왔고, 그 즉시 두 사람은 말을 달렸다.
* * *
며칠 후 오토 일행은 클로비스 가문의 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추격자는 만나지 않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클로비스 백작령은 이웃 영지인 ‘지글러 백작령’과 전쟁 중이었다.
“뭐야 영주 나리. 정말 전쟁이 벌어졌잖아?”
일행은 이곳까지 오는 도중 몇 개의 마을을 거쳤고, 클로비스 백작령과 지글러 백작령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글러 백작은 룽겔 공작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분명 룽겔 공작의 명령으로 지글러 백작이 먼저 공격했을 테지요. 물론 지글러 백작군 안엔 룽겔 가문의 병사와 용병들이 다수 섞여 있을 겁니다.”
로잘린의 말에 오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바라의 정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만큼, 그는 로잘린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클로비스성을 주시하며 오토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저 성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런 오토의 옆얼굴을 보며 로잘린이 물었다.
“성 앞엔 지글러 백작군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뻔하지 않소.”
“역시 강행돌파입니까.”
로잘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차앙!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며 오토가 말했다.
“내가 아는 개구멍이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