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나바라의 왕자 (4)
오토는 말머리를 돌렸다.
로잘린도 마찬가지였고, 어느새 달려온 카스피도 자신의 말 위에 뛰어올랐다.
그렇게 셋은 사나운 식인마(食人馬)들을 피해 도주를 시작했다.
사실 말머리를 돌리기 전 오토는 고민했었다.
저 식인마들을 두고 도망친다면, 분명 놈들은 새로운 인간을 찾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나바라 왕국.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백성들이 무고한 피해를 입을 것을 생각하자 오토는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1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만 말이다.
“으힉! 저, 저게 대체 뭐요! 그 와이번과 같은 놈들 아니요!”
꽁지가 빠져라 말을 달리며 오토가 소리쳤다.
“딱 보면 모르겠어 영주 나리? 발에서 검은 연기를 뿜고 있잖아! 당연히 같은 놈들이지!”
오토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저 많은 식인마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도주하는 편이 낫다.
방법은 그 뒤에도 찾을 수 있다.
한편 로잘린은 왕자의 이중적인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을 대할 때의 모습과, 저 카스피라는 살수를 대할 때의 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물론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소년이었던 왕자는 건장한 성인이 되었다.
특히 왕자가 보인 검술은 로잘린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왕자 전하께서 어떻게 저런 검술을.’
왕자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로잘린은 궁금했다.
그녀는 처음 관문에서 봤던 왕자의 일행을 떠올렸다.
그리고 흑빛 갑주를 입은 거구의 전사에게로 생각이 좁혀졌을 때, 그녀는 등 뒤에서 강한 살기를 느꼈다.
이히히히히힝!
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식인마 세 마리가 지척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제서야 떠올렸다.
발에서 검은 기운을 흘려내는 저 식인마들은 자신의 말들보다 두 배는 빨랐었다는 것을.
“전부 따라오진 않았어! 상대는 고작 세 마리! 각개격파하자 영주 나리!”
“아, 알겠수!”
오토와 카스피는 빙글 말머리를 돌렸다.
그보다 한발 앞서 로잘린이 말의 방향을 틀었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식인마의 이빨을 향해 검을 뻗었다.
콰득!
식인마의 주둥이에 검이 박혔다.
검은 핏물을 흩뿌리며 녀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로잘린은 식인마의 입속에서 빠르게 검을 빼냈다.
조금만 늦었으면 놈에게 검을 빼앗기거나, 최악의 경우엔 검의 반동으로 말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한편 카스피는 식인마의 입에서 뿜어지는 핏물을 보며 무언갈 직감했다.
그녀의 눈이 오토를 향했고, 오토 역시 자신과 같은 것을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피가 입가가 히죽 올라갔다.
“가자고! 영주 나리!”
카스피가 몸을 날렸다.
허공에 녹아든 그녀의 몸이 일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또 다른 식인마 한 마리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식인마의 목에 사슬낫이 감겼다.
카스피는 그대로 말의 머리에서 뛰어내리며 사슬을 당겼다.
식인마의 머리가 말끔하게 절단돼 바닥으로 떨어졌다.
퓨슈슛! 머리 잃은 식인마도 검은 핏물을 뿌리며 허수아비처럼 무너졌다.
카스피의 눈이 반짝거렸다.
‘역시 이 식인마들은 와이번과는 달라.’
카스피는 기억했다.
와이번들은 상처를 입었을 때 핏물이 아닌 검은 연기 같은 것을 쏟아냈었다.
게다가 놈들의 진짜 정체는 와이번이 아닌 닭.
평범한 닭이 검은 보석의 힘에 와이번의 형태로 변했던 것이다.
‘닭을 그 커다란 와이번으로 변이시킬 정도의 힘이었어. 잘은 몰라도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했겠지.’
그러나 눈앞의 식인마들은 달랐다.
놈들은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아닌 핏물을 쏟았다.
물론 그것이 붉은색이 아닌 불길한 검은색이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의 공격에 머리가 잘린 식인마는 별다른 형상 변화 없이 숨이 멎었다.
그 말은 곧.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변이한 게 아니야. 이놈들은 처음부터 말이었고, 와이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검은 보석의 영향을 적게 받았어.’
아마도 추격을 위해 발 쪽에만 힘을 전달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그리고 발에만 힘을 전달받은 말이 어떻게 식인마가 될 수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식인마들이 지금의 우리로서도 상대 가능한 수준의 괴물이라는 거지.’
물론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로잘린!”
로잘린의 측면을 기습하던 세 번째 식인마의 목에 드워프 강철검이 꽂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식인마의 주둥이를 방패로 막아 낸 오토가 녀석의 목에 재차 검을 찔러 넣었다.
이히히히힝!
식인마의 숨통이 끊어졌다.
그사이 로잘린은 자신이 맡은 식인마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역시 그녀는 관문 경비대장으로 머무르기엔 아까운 실력자였다.
그사이 저 뒤에 있던 식인마들이 일행에게 달려왔다.
“말 한 마리를 버리고 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게 외친 로잘린이 카스피의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말의 엉덩이를 발로 차 식인마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불쌍하게도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녀석은 식인마들에게 붙잡혀 가죽이 벗겨지고, 근육이 뜯기고, 내장을 파먹혔다.
“좋은 작전이었어 경비대장 아줌마.”
로잘린의 등 뒤로 내려앉으며 카스피가 속삭였다.
로잘린과 오토는 서둘러 말을 몰았다.
뒤를 돌아본 로잘린은 자신의 말을 흔적도 없이 씹어 먹은 식인마들이 이번엔 죽은 동족 세 마리를 게걸스럽게 먹는 광경을 봤다.
그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편에서 아침해가 떠올랐다.
추격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나바라 왕국의 남서쪽엔 인간이 쉬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 오래된 숲이 있다.
‘그 숲을 향한 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아.’
‘사악한 마녀의 마법이 깃든 숲이거든.’
‘아니, 내가 듣기론 고대의 마수 한 마리가 숨어 산다고 하던데?’
‘그 숲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물이라는 말도…….’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퍼져 나갔고, 인간의 손길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숲은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렸다.
대신 그곳은 ‘은밀한 숲’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흐응. 은밀한 숲이라. 인간들은 이 아름다운 숲에 참으로 어리석은 이름을 지어 놓았구나.”
앞서 걷는 아틸라를 졸졸 따라붙으며 바토리가 물었다.
“여기서 명계의 흔적을 찾아보겠다는 말이더냐.”
“그래.”
“한데 말은 왜 두고 온 것이더냐.”
아틸라는 본격적으로 숲에 진입하기 앞서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말 위에서 빤히 자신을 내려 보는 바토리를 들어 내린 뒤, 두 마리 말을 나무 그늘 아래 고정시켰다.
“녀석이 말발굽 소리를 듣고 도망칠 수 있으니까.”
“녀석?”
“현자의 돌을 꺼내 봐라.”
바토리는 품 안에서 돌을 꺼냈다.
그것을 받아 잠시 살펴본 아틸라는 다시 바토리에게 돌을 넘겼다.
“이 숲엔 노움이 살고 있다.”
“현자의 돌을 수리하려는 것이더냐.”
“그래. 라히샤 에스테르는 돌을 제대로 수리하지 못했으니까.”
후마이야의 왕, 테헤누트 하토르 안에 잠자고 있던 라히샤의 영혼은 현자의 돌을 완벽하게 수리하지 못했다.
돌의 완전한 수리는 오직 노움 연금술사의 손에서만 가능하다.
그것도 파울루 정도의 장인급 실력을 지닌 노움만이.
그리고 이 ‘은밀한 숲’에 살고 있는 노움은 파울루 못지않은 장인이다.
‘파울루와는 다소 다른 방식의 연금술을 쓰긴 하지만.’
“야만전사야.”
“왜.”
바토리는 아틸라에게 현자의 돌이 지닌 ‘억제’의 힘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질문을 본능이 가로막았다.
이유는 몰랐다.
“왜 불러 놓고 말이 없냐.”
“아무것도 아니다. 오랜만에 둘만 있게 되니 좋아서 불러 봤느니라.”
“싱겁기는.”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의 옆얼굴을 올려보며 바토리도 웃었다.
조금씩이지만, 아틸라가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바토리는 느끼고 있었다.
끼아옹! 펀치가 자신도 있다며 입을 벌렸고, 벌어진 입 사이에서 도롱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킁킁, 콧구멍을 발름대던 도롱뇽이 말했다.
“냄새가 난다. 야만 미물.”
“무슨 냄새.”
“명계의 썩은 냄새.”
“안내해.”
그 말에 펀치가 조르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펀치의 입에서 기어 나와 펀치의 동그란 머리 위에 오른 도롱뇽이 앞발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다 곰탱이.”
끼아옹!
“아니 거기 말고 저기라니까. 야, 근데 왜 이리 빨리 달리는…… 뭐라? 자리를 비켜 줘? 아 진짜 쟤들 둘이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도롱뇽이 그러거나 말거나 펀치는 방방대며 앞으로 달렸다.
“엥? 뭐라? 케헷헷헷헤! 아 나 이런 미친 곰탱이 새끼. 인간이 무슨 너 같은 산짐승인 줄 아냐. 인간들은 이런 곳에서 안 한다니까?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쟤들 둘이 그런 사이 아니라고!”
버럭 성을 내던 도롱뇽의 눈이 커졌다.
“피해! 곰탱이!”
도롱뇽이 펀치의 머리털을 잡아당기며 바닥으로 뛰었다.
그 바람에 달리던 펀치의 발이 아주 약간 느려졌고, 언제나 촉촉하게 젖어 있던 펀치의 코에서 습기가 사라졌다.
화르르르르르!
뜨거운 불길이 펀치의 코를 스치며 날아갔다.
도롱뇽이 급히 멈춰 세우지 않았다면 분명 펀치의 머리를 통째로 불태웠을 것이다.
끼아옹! 놀란 펀치가 뒤돌아 달렸다.
펀치의 발에 짓밟힌 도롱뇽이 죽는소리를 냈다.
“꾸에에엑! 저 미친 곰탱이 새끼가! 내가 살려 줬는데! 내가 살려 줬는데!”
그러나 소리칠 틈 같은 건 없었다.
어디선가 또 다른 화염이 두 환수를 향해 쏘아졌기 때문이다.
펀치는 재빠르게 피했지만 도롱뇽은 넘어져 있던 바람에 한발 늦었다.
“으아아악! 꼬리이이! 내 꼬리가아!”
꼬리에 불이 붙은 도롱뇽은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그것을 날름 입에 물었다.
“으아아악! 혀어어! 내 혀가아아!”
다행히 꼬리의 불은 꺼졌다.
도롱뇽은 혀와 꼬리에서 아릿한 감각을 느끼며 펀치의 뒤를 쫓았다.
낌새를 느낀 펀치가 도롱뇽을 입에 물었다.
등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펀치는 자신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는 아틸라를 봤다.
“펀치!”
아틸라는 흑철방패를 손에 들었다.
마주 달려오는 펀치를 뛰어넘은 아틸라가 날아오는 화염을 향해 방패를 뻗었다.
파드드드드듯!
화염방사기처럼 뿜어지는 불꽃을 흑철방패가 가로막았다.
바토리가 무언가 마법을 시도하려 했지만 아틸라가 제지했다.
아틸라는 방패를 쥔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 마법을 막아 내는 용도로는 흑철방패보다 무휼이 적합하다.
무휼이 지닌 특별한 힘, ‘대마법병기(對魔法兵器)’는 웬만한 마법 공격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그러나 아틸라는 무휼 대신 흑철방패를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저건 마법이 아니니까.’
아틸라는 저 무시무시한 화염을 내뿜는 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또한 이렇게 사전 경고도 없이 화염을 쏘아 내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화가 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