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나바라의 왕자 (3)
로잘린이 처음 오토마이어 왕자를 만났을 때, 그는 열두 살의 비쩍 마른 소년이었다.
그녀가 본 왕자의 첫인상은 이랬다.
‘열두 살이라고? 아홉 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왕자는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항간의 소문을 증거하듯 매우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로잘린을 올려다보는 왕자의 눈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자그만 눈동자에선 언뜻 동경의 기색을 엿볼 수 있었는데, 머지않아 로잘린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왕자는 검술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했다.
“나는 훌륭한 검사가 될 거야. 그래서 아버지처럼 멋진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나바라 왕국을 지키는 수호기사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할 때의 왕자는 별처럼 빛나는 눈을 뜨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잘린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검술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그에 걸맞은 무재가 부족한 아이.
‘체격이 왜소한 것이 너무 치명적이다.’
“수호기사라니요. 그것은 저 같은 평범한 기사들의 임무입니다. 왕자 전하께서는 왕국의 후계자 중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난 왕이 되고 싶지 않은걸.”
왕자의 눈에 그늘이 드리워졌지만 잠시였다.
“어차피 나보다 훌륭한 형님들과 누님들이 계셔. 내가 정식 후계자가 되는 일은 없을걸?”
왕자는 왕의 후계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고, 그의 위엔 남은 형제들이 많았기에 자신이 정식 후계자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아니 어쩌면 그저,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로잘린. 오늘 가르쳐 줄 내용은 뭐야?”
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왕자는 로잘린을 누님처럼 따랐다.
로잘린 역시 왕자를 남동생처럼 여겼다.
물론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 탓에 표면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로잘린이 왕자의 검술 스승이 되고 3년이 지난 어느 날.
왕자의 어머니 ‘이본 클로비스’가 은밀히 로잘린을 찾았다.
“로잘린 란틴크 경.”
클로비스 백작가는 란틴크 가문이 오래전부터 섬기던 가문.
로잘린이 오토마이어 왕자의 교육을 맡게 된 것도 이본이 클로비스 백작가의 영애였기 때문이다.
“왕비 전하.”
“룽겔 공작이 왕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듯합니다.”
로잘린은 놀라지 않았다.
이본과 로잘린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그간 왕자의 주변을 예의주시했었다.
“역시 룽겔 공작입니까.”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자에게서 얻어 낸 정보이니 가능성은 상당하겠지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왕자를 국외로 도피시키겠습니다.”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왕국의 후계자를 국외로 말입니까? 폐하께서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실 겁니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아무리 왕비 전하라도…….”
“그분은 언제나 우직하게 정면으로 달릴 줄만 아시지요. 그래서는 룽겔 공작의 음흉한 마수로부터 왕자를 보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왕비 전하.”
“난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본의 눈빛은 결연했다.
“로잘린 경이 표면으로 나서선 안 됩니다. 룽겔 공작은 누구보다 경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또한 그대는 훗날 왕자가 왕국으로 돌아왔을 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다른 기사들……, 그래.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 못한 견습기사들이 좋겠습니다. 그중 충성심이 강하고 빼어난 실력을 지닌 이들을 추려 주십시오.”
로잘린은 조건에 맞는 세 명의 견습기사를 구했다.
이본은 상단을 고용해 상인과 용병들 틈에 왕자와 세 견습기사를 섞어 넣은 뒤 인적이 뜸한 새벽녘에 남쪽으로 달리도록 했다.
“추, 추격대입니다!”
상황을 눈치챈 룽겔 공작의 추격대가 뒤를 쫓았다.
머지않아 추격대와 용병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전투는 팽팽했다.
룽겔 공작은 뒤가 구린 일이었기에 많은 전력을 내보내지 못했고, 상단의 용병들은 나름 나바라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기 때문.
견습기사 아론, 로버트, 던컨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던 중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자각했다.
‘우리 임무는 오토마이어 왕자를 국외로 도피시키고, 보호하는 것.’
견습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의 혼란을 틈타 왕자의 신병을 확보해 말을 달렸다.
그들의 과감한 결단 덕에 왕자는 전장을 벗어나 남쪽 관문에 도달했다.
“이쪽입니다.”
미리 심어 둔 이본의 측근이 샛길을 통해 왕자와 세 견습기사를 탈출시켰다.
그러나 룽겔 공작의 마수는 이곳까지 닿아 있었다.
“잡아라!”
경비병으로 변장한 룽겔 공작의 기사들이 왕자를 쫓았다.
세 명의 견습기사는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정식 기사의 실력을 이겨 낼 수는 없었고.
“왕자 전하! 달리십시오! 이곳은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방패 삼아 어떻게든 왕자만이라도 탈출시키려 했다.
그때 구원의 빛이 찾아왔다.
“오토마이어!”
왕자의 이름을 외치며 말을 달려온 이는 원래는 이번 작전에서 빠져 있기로 했던 로잘린.
그녀는 룽겔의 기사들을 상대로 엄청난 무력을 선보였다.
“어서 달리십시오! 왕자 전하!”
“로잘린!”
왕자가 국경을 넘으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소리치는 로잘린의 살기 어린 얼굴이었다.
세 견습기사와 남쪽을 향해 말을 달리며 오토마이어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로잘린……!”
어깨가 들썩이며 뜨거운 것이 두 뺨을 흘렀다.
그날 오토마이어는 맹세했다.
살아남겠노라고.
또한 언젠가 로잘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자신이 그녀를 지켜 주겠노라고.
그래서 오토는 그렇게 했다.
로잘린을 향해 날아드는 창날을 드워프 강철검으로 막고, 그림처럼 팔을 휘둘러 기병의 목을 잘랐다.
“이번엔 내가 그대를 지켜 줄 차례요.”
오토는 드워프 강철방패를 꺼내들었다.
측면에서 쇄도하는 창날을 쳐낸 뒤 검을 찔러 넣었다.
“크헉……!”
또 하나의 기병이 피를 뿜으며 낙마했다.
기병들이 소리쳤다.
“왕자가 돌아왔다!”
“으하하하! 멍청한 녀석! 살려 둘 필요 없다! 공작께서는 목만 들고 와도 상관없다 말씀하셨으니!”
로잘린이 쓰러뜨린 것을 포함해 도합 다섯 명의 기병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기병의 수는 많았다.
기병들은 오토마이어 왕자가 과거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군이 쓰러진 것 또한 그들이 방심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편 기병대를 이끌고 온 기병대장은 투구 사이로 드러난 왕자의 눈을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어릴 적의 왕자를 본 적이 있었다.
‘칠삭둥이 왕자 녀석. 어디서 우연히 좋은 무구를 손에 넣은 모양이군. 하긴 놈은 예전부터 훌륭한 무구에 욕심이 많았지.’
왕자의 검과 방패는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기병대장은 왕자가 그것을 믿고 까부는 것이라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기병대장은 기병의 목숨을 좀 더 아껴야 했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이 있을 때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왕자를 공격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지닌 편견 탓에 왕자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공격해라! 왕자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겐 포상을 내리겠다!”
“우와아아아!”
포상에 눈이 먼 기병들은 제대로 된 진을 이루지 않고 오토를 습격했다.
첫 번째 창날이 오토를 향해 쏘아졌지만 오토는 방패로 그것을 비껴 막은 뒤, 순간적으로 말을 박차 기병의 목을 잘랐다.
“어?”
그 바람 같은 움직임에 기병들은 조금 놀랐다.
그때라도 그들은 진을 갖춰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오토는 그들의 방심이 만들어 낸 빈틈을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콰쾅! 쾅! 콰아앙!
내뻗은 강철방패가 창날을 막았다.
힘으로만 막아 내는 것이 아닌, 기술을 겸비한 방어에 기병들은 점차 저 왕자가 듣던 것과 달리 상당한 실력을 지닌 검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왕자의 검이 두 기병의 목을 추가로 날려 버렸을 때 확신으로 변했다.
“가, 강하다!”
“듣던 것과 다르잖아!”
“진이다! 진을 이뤄 공격해!”
그러나 그들이 진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그렇게 둘 줄 알고?”
은신하고 있던 카스피가 기병들의 등 뒤를 기습했다.
생각지도 못한 왕자의 실력에 더해 갑작스러운 등 뒤의 습격에 기병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대장! 명령을……!”
그리고 그들의 혼란은 저만치 말 위에 앉은 기병대장의 목에서 콸콸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과.
그곳에서 떨어진 머리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변했다.
“히익! 대, 대장이!”
“대체 누가!”
“언제……! 언제 저렇게 된 거…… 으아악!”
카스피의 사슬낫에 기병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또 다른 타깃을 향해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카스피가 말했다.
“누가 그러긴. 내가 그랬지.”
카스피는 정면으로 뛰어드는 오토를 돕지 않았다.
그녀는 오토의 실력을 믿었고, 그래서 오토가 기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안 기병대장의 배후를 습격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왕자 전하께서 저런……!”
로잘린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토를 바라봤다.
지금의 왕자는 자신이 가르치던 허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해지셨다……!’
로잘린의 입술이 희열의 미소를 그렸다.
말 위에 올라탄 뒤 왕자의 사각지대를 보호하며 검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득 메운 피 냄새가 그녀를 더욱 흥분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로잘린은 기병들의 군마가 보통의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 * *
“야만전사야.”
바토리의 목소리에 아틸라는 말을 멈춰 세웠다.
“왜.”
“카스피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무슨 문제.”
아틸라와 바토리는 적마탑 남서쪽의 ‘은밀한 숲’을 향하는 길이었다.
이유는 리샤르 세바스찬이 디디에에게 통제되지 않는 플라이웜을 그곳에 버려두라는 명령을 내렸었기 때문.
아틸라는 그곳에서 검은 보석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셈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은밀한 숲을 찾아야 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잠시 반지에 정신을 집중하던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카스피가 전투를 치르고 있다. 철혈귀검의 기운도 느껴지는구나.”
“상대가 누군데.”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냄새가 나는구나.”
“그럼 됐다.”
아틸라는 다시 말을 움직였다.
그는 오토와 카스피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샤를 정도의 강자라면 모를까, 지금의 오토와 카스피는 인간을 상대로 쉽게 당할 자들이 아니다.
* * *
“저, 저건 무슨……!”
로잘린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으적. 으적.
기병들이 타고 있던 군마.
놈들이 기병의 시체를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었다.
“초식동물인 말이 어떻게……, 그것도 인간을……!”
살아남은 기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군마들이 그들의 뒤를 쫓았고, 산 채로 씹어 삼켰다.
“흐억! 끄억……! 케르르륵……!”
머리가 뜯기고, 허리가 동강난 기병들이 그렇게 말먹이가 되었다.
먹이를 선점하지 못한 군마들이 고개 돌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
그렇게 놈들의 주린 눈동자가 오토 일행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