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58화 (158/425)

158. 나바라의 왕자 (2)

아틸라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년이 했던 말의 의미를 고민하던 그는 상태창에 떠오른 권능, ‘광폭’으로 눈을 돌렸다.

아틸라에겐 현재 세 가지의 권능이 있다.

첫 번째 권능, 용력(勇力).

두 번째 권능, 심안(心眼).

세 번째 권능, 광폭(狂暴).

그리고 이 권능들은 쓰임새뿐만 아니라 발동 방법도 달랐다.

‘용력은 패시브 스킬.’

그 말대로, 용력은 언제나 아틸라의 몸에 지속되는 스킬이었다.

이 권능을 통해 아틸라는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무덤을 뚫고 일어설 수 있었고, 이후 닥쳐온 많은 시련을 극복했다.

‘심안은 액티브 스킬.’

언제나 몸에 지속되는 용력과 달리, 심안은 필요할 때 시전을 통해 발동하는 스킬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일단 발동이 되면 과연 ‘권능’이라 일컬을 만한 사기적인 기술.

‘마지막으로 광폭은.’

[ 광폭(狂暴) ]

[ 시전자를 극도의 흥분 상태로 몰아넣어 비약적으로 공격력을 상승시킵니다. ]

광폭의 효과.

그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틸라는 광폭의 권능을 발현한 뒤 데스나이트들을 순식간에 절멸시켰고.

동료들과 드라칼리온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그 무시무시한 강자 카르타고마저 한시적으로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

[ 이 권능은 ‘특별한 조건’이 갖춰지면 스스로 발동합니다. ]

[ 발동한 권능은 시전자의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

‘특별한 조건이라.’

상태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건 ‘광폭’이 패시브 스킬도, 액티브 스킬도 아니라는 거다.

아틸라가 해석한 권능 ‘광폭’은, ‘심안’처럼 특별한 조건이 갖춰지면 ‘용력’처럼 저절로 발동되는 기술이라는 것.

그리고 지난 며칠간 아틸라는 광폭을 발동시키기 위한 저 ‘특별한 조건’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었다.

[ 이 권능엔 강한 부작용이 따릅니다. ]

[ 그것은 자칫 시전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

‘빌어먹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스킬이 다 있어.’

조건이 갖춰지면 저절로 발동하지만 강한 부작용 탓에 죽을 수도 있다니.

그런 무지막지한 부작용이라면, 적어도 심안처럼 시전자가 스킬을 시전할 수 있는 선택지를 줘야 하는 것 아닌가?

[ 부작용을 줄이려면 시전자의 정신력과 체력이 큰 폭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

정신력과 체력은 이미 충분하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큰 폭으로 성장해야 한다니.

“야만전사야.”

거의 사흘 만에 눈을 뜬 바토리가 아틸라를 불렀다.

침대 옆으로 다가간 아틸라가 바토리를 내려 보며 말했다.

“깼냐.”

“흐응……. 푹 자고 일어나니 제법 몸이 회복된 것이 느껴지는구나.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셈이더냐.”

아틸라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바토리가 미소했다.

“카스피와 철혈귀검이 보이질 않는구나.”

“오토는 일 보러 갔다.”

“일? 무슨 일 말이더냐.”

“내가 아냐.”

“흐응? 왜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게냐 야만전사야.”

“토라지긴 무슨. 헛소리 그만하고, 깼으면 일어나 밥이나 먹어라.”

“카스피는 어딜 간 것이더냐.”

“오토 쫓아갔다.”

“뭐라? 카스피가 철혈귀검을?”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바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쿡쿡,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카스피에게 반지를 건네준 모양이구나.”

“원래 걔가 갖고 있던 거니까.”

“철혈귀검과 카스피를 걱정하는 것이더냐.”

“잠꼬대 계속할 생각이면 마저 자라.”

“혹 카스피에게 오토를 따라가라 말한 건 네가 아니더냐.”

대답 없는 아틸라를 보며 바토리가 웃었다.

“걱정 말거라. 철혈귀검과 오토는 널 떠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상관이냐. 떠나든 말든.”

“언제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생각이더냐.”

아틸라는 흠칫 놀랐다.

바토리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끝을 조심스레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틸라가 바토리를 쳐다봤고, 그 시선을 바토리가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틸라의 손끝을 지나, 손등을 간질였다.

아틸라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혼돈에 빠진 아틸라를 구한 건 라일이었다.

“이런. 내가 방해를 한 모양이군.”

문을 열고 선 라일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가려는 걸 아틸라가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냐 라일.”

“들어가도 되겠나. 아틸라.”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바토리의 눈빛이 조금 무서워서 하는 말이다.”

“뭐?”

아틸라는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는 어색할 정도로 환히 미소하고 있었다.

“난 라일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

아틸라의 손짓에 라일이 들어와 탁자 앞에 앉았다.

아틸라와 바토리도 침대를 벗어나 라일의 앞에 마주 앉았다.

바토리는 아틸라가 먹다 남긴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고, 그 탓에 홍조를 띠게 된 그녀의 얼굴을 아틸라는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라일이 입을 열었다.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이 서거했다.”

* * *

오토, 카스피, 로잘린은 말을 달리고 있었다.

왕의 서거 소식은 이곳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그러나 오토가 지금 급히 말을 달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룽겔 공작의 기병대는 발이 빠른 것으로 유명하니까요.”

그들은 룽겔 공작의 기병대에게 쫓기고 있었다.

룽겔 공작은 나바라 왕국에서 리샤르 세바스찬 다음가는 위세를 지닌 권력자로, 오랫동안 왕의 자리를 탐하던 귀족 중 하나였다.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로잘린은 그동안 왕의 후계자를 차근차근 제거한 배후가 룽겔 공작일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또한 이번에 율켄마이어 나바라 왕을 시해한 배후 역시도.

“룽겔 공작이라면 왕자 전하의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겁니다.”

오토가 로잘린을 만나기 위해 경비병에게 건넸던 증표는 목걸이였다.

경비병은 그것에서 무언가 낌새를 느꼈고, 근처에 주둔 중이던 룽겔 공작의 기병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룽겔 공작은 무섭고 치밀한 사람입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는 왕자 전하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문에 첩자를 심어 놓다니요.”

룽겔 공작의 기병대가 때마침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것 역시 숨겨진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쉬이 납득이 가진 않았다.

룽겔 공작은 오토마이어 왕자가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인가.

로잘린의 의문을 해소시킨 건 오토였다.

“리샤르 세바스찬을 오염시켰던 검은 보석. 그것이 리샤르 외의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소.”

오토는 로잘린에게 적마탑 사건의 전모를 알려 줬다.

리샤르 세바스찬이 죽기 전에 했던 말 역시도.

‘그렇군……. 그분의 종복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건가…….’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설마 룽겔 공작이……!”

만약 룽겔 공작이 리샤르가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보석을 손에 넣었다면, 적마탑을 습격한다는 리샤르의 비밀스러운 행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잘린은 엄습하는 위기감에 더욱 말에 박차를 가했다.

분명했다.

자세한 인과는 알 수 없지만, 룽겔 공작의 기병대는 오토마이어 왕자가 이곳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왕자를 노리고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관문의 경비대장을 맡아 왔건만, 믿을 만한 부하 하나 만들지 못했다니.’

로잘린은 자책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변방의 관문 따위, 왕은 물론이거니와 리샤르의 관심에도 벗어나 있던 곳.

자연스레 수도를 제외한 많은 구역은 룽겔 공작의 입김이 크게 미치는 구역으로 변질됐다.

카스피가 물었다.

“근데 방향이 이상한데? 어디로 가는 거야 영주 나리. 적마탑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적마탑으론 가지 않소.”

“응? 아틸라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야? 아틸라라면 검은 보석의 힘이니 뭐니 한 방에 그냥 콱.”

“그것 때문에라도 더더욱 갈 수 없소.”

“왜?”

“이건 나바라 왕국의 일이오. 아틸라 님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

오토가 카스피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틸라 님에게 돌아가시오. 괜히 나 때문에 불필요한 일에 휘말릴 필요 없소.”

오토의 눈빛은 진중했다.

그런 오토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카스피가 오토에게 말머리를 붙였다.

그러고는 주먹으로 힘차게 목을 후려쳤다.

“케헥! 켁! 크허억……! 이번엔 진짜 제대로 맞았다!”

오토가 목을 부여잡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로잘린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뭐, 뭐 하는 짓이냐! 역시 너는 룽겔 공작의 첩자……!”

“첩자는 무슨! 이 딱따구리 영주 나리는 이렇게 한 번씩 패 줘야 정신을 차린다고! 뭐? 아틸라에게 돌아가? 내가 그럴 것 같아? 영주 나리가 물불 안 가리고 날 도와줬던 걸 내가 잊었을 거 같아?”

카스피가 재차 오토의 목을 때리려 하자 로잘린도 더는 참지 않았다.

그녀의 검이 카스피에게 쏘아졌고, 무언가에 부닥치며 카앙! 날 선 소음을 발했다.

“이봐. 경비대장 아줌마.”

로잘린은 자신의 검을 가로막은 두 자루 단검을 발견했다.

“내 상대가 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상대의 붉은 두 눈을 본 로잘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뭐지. 이자는.

‘평범한 살수가 아니다.’

그때 뒤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거친 흙먼지를 일으키며 기병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칫.”

카스피는 로잘린의 검을 밀쳐내고 단검을 갈무리했다.

붉게 변해 가던 두 눈도 원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일단 튀자고 영주 나리.”

세 마리 말은 다시 달렸다.

그러나 기병대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이상한데? 말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어?”

카스피의 말은 타당했다.

일행이 타고 있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기병대는 놀랍게도 일행의 말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추격을 해 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적들과 조우하는 건 시간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도 기병대의 투구 모양이 명확하게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달리는 기병대의 말이, 정확히 얘기하자면 말의 발끝이 시커먼 기운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영주 나리. 저건.”

“아무래도 룽겔 공작이 검은 보석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은 맞은 것 같소.”

로잘린이 나섰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오토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로잘린이 뒤돌아 말을 달렸다.

그녀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자, 검술 스승이자, 보호자였다.

그리고 로잘린이 기억하던 오토는 뛰어난 무재(武才)가 아니었다.

‘성정이 너무 유약하셨지. 신체 조건도 그렇고.’

소년 시절의 왕자를 떠올리며 로잘린은 웃었다.

지금의 왕자는 제법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훌륭한 검사로 성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선 자신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왕자 전하를 지켜야 한다.

‘그날, 그랬었듯이.’

우렁찬 기합을 터뜨리며 그녀의 말이 기병대에게 쇄도했다.

그러나 룽겔 공작의 기병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세 명의 기병을 낙마시키는 것을 끝으로 로잘린은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창날이 쏘아졌다.

어디선가 날아든 검이 그것을 막았다.

오토의 검.

“왕자 전하……!”

“로잘린 란틴크 경.”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회전한 오토의 검이 기병의 목을 잘랐다.

“이번엔 내가 그대를 지켜 줄 차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