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나바라의 왕자 (1)
카스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뭐, 뭐라고? 왕자?’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자 전하.
경비대장은 분명 오토를 그렇게 불렀다.
카스피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냐. 그럴 리가.’
카스피는 오토가 ‘사, 사람 잘못 봤수!’ 하고 외치며 호들갑을 떨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토는 부복한 경비대장을 내려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시오. 로잘린 란틴크 경.”
그 말에 경비대장, 로잘린이 몸을 일으켰다.
둘은 네모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연 건 로잘린이었다.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관문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대 같은 이가 관문의 경비대장 일을 하고 있는 거요.”
그렇게 묻던 오토는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때’의 사건으로 좌천된 거겠지.”
로잘린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했다.
“날 원망하고 있소?”
로잘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왕자 전하를 탈출시키려는 계획에 동조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바니까요.”
“이제 와 묻는 것도 우습지만 확인하고 싶소.”
잠시의 틈을 두고 오토가 말했다.
“내 어머니는 어찌 되셨소.”
로잘린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빛을 보며 오토는 상황을 짐작했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가신 거로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왕자 전하.”
“아니오. 모든 것은 비루한 이 한 몸 지키고자 벌어진 일. 잘못이 있다면 내 쪽이겠지.”
“아닙니다! 왕자 전하는……!”
“그들 셋은 살아 있소.”
로잘린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입니까?”
“그렇소. 정식 기사가 되어 발루아 왕국 가스코뉴 공작령에서 지내고 있지.”
로잘린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아아. 정말 잘 되었습니다. 아론. 로버트. 던컨. 셋 모두 견습 기사 신분이었음에도 왕자 전하를 구하겠다며 목숨을 걸고 나선 충성심 깊은 아이들이었지요.”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고 말이오.”
“왕자 전하.”
“말씀하시오.”
“완전히 돌아오신 거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로잘린은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변방의 경비대장 일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한때 촉망받던 기사였다.
당연히 그녀를 따르는 이는 아직 왕국에 남아 있었고, 그들과 힘을 합쳐 장성한 왕자를 왕성으로 모셔간다면 왕은 당장이라도 왕위를 물려주려 할 것이다.
로잘린은 왕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창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카스피는 낯설다고만 여겼던 오토의 어투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떠올랐다.
대도시 리옹에서 오랜만에 아틸라를 조우한 뒤, 야영지에서 바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토는 전에 없던 진중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한때 일국의 공주였던 신분에 정말 고생이 많소.’
그 사실을 상기한 카스피가 ‘헉!’ 하는 숨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로잘린의 눈빛이 변했다.
“누구냐!”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와장창! 창문을 깨고 나간 로잘린이 카스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스피는 날렵하게 상체를 움직여 그것을 피했다.
로잘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살수!’
“룽겔 공작이 보낸 자인가!”
로잘린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살기에 휩싸인 그녀의 검을 오토의 목소리가 막았다.
“멈추시오 로잘린!”
카스피의 얼굴을 확인한 오토가 후우, 한숨을 뱉었다.
“내 동료요.”
* * *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옆엔 이제 살쾡이 한 마리가 끼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영주 나리.”
“…….”
“저, 정말 나바라 왕국의 왕자인 거야?”
“…….”
“그 영주 나리 졸졸 따라다니던 세 아저씨 기사들이 여기서 도망칠 때 도움을 준 견습기사들이고?”
“…….”
“아 답답해! 뭐라 말을 좀 해 보라고! 딱따구리처럼 쉴 새 없이 입을 놀릴 땐 언제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거야!”
“무엄하다! 감히 왕자 전하께 무슨 말버릇이냐!”
듣다 못한 로잘린이 검을 뽑아들며 호통쳤다.
오토가 한 손을 들어 로잘린을 제지했다.
로잘린은 분한 한숨을 내쉬며 검을 갈무리했다.
“로잘린. 잠시만 자릴 비켜 주겠소?”
로잘린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방 밖으로 나갔다.
자리엔 오토와 카스피, 둘만 남았다.
오토가 카스피에게 얼굴을 가져가 귀엣말을 했다.
‘사, 살쾡이 암살자! 그, 그렇게 갑자기 막 질문을 퍼부으면 어쩌잔 말이오!’
원래대로 돌아온 오토의 말투에 내심 반가움을 느끼며 카스피도 귀엣말로 외쳤다.
‘그러게 누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있으래? 내가 계속 물어보는데도 멍하니 있던 건 영주 나리잖아!’
‘마, 말투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그랬소! 살쾡이 암살자에게 근엄한 말투를 쓰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조금 전까지 한껏 무게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원래 말투로 돌아오면 로잘린이 날 어찌 보겠소!’
‘뭐야? 그 여자 눈치는 왜 보는데? 실은 정말로 약혼녀인 거 아냐?’
‘아이고! 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오! 로잘린은 단지 그 뭐시냐 그…….’
‘단지 그 뭐! 말을 해야 알지!’
답답해진 카스피가 오토의 목을 후려쳤다.
‘꾸에엑!’ 목을 붙잡으며 버둥대던 오토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로잘린은……, 아니 로잘린 란틴크 경은 내 검술 스승이었소.”
카스피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엥? 검술 스승? 정말? 스승님이었다고?”
카스피는 조금 전 창문을 깨며 달려들던 로잘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납득했다.
그래. 그 정도면 평범한 수준의 검사는 아니었지.
“자세히 말해 봐. 내가 모르는 거 싹 다. 아니, 갑자기 여길 다시 찾아온 이유부터.”
오토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거 기억하우? 리샤르 세바스찬이 죽기 전에 했던 말.”
아틸라에게 당해 지면으로 추락한 거대 와이번.
온몸을 감싸던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드러난 건 원래 무엇이었는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괴생명체였다.
그 안에 기괴하게 얼굴만 붙어 있던 리샤르는 취한 것처럼 중얼거렸었다.
‘내가 죽으면…… 나바라 왕을 보호하던 자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군……. 그분의 종복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건가…….’
거기까지 말한 리샤르는 비명 같은 웃음을 터뜨렸고,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라일이 이런 말을 했수.”
오토는 라일과 아틸라 간에 오간 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때 카스피는 잠들어 있지 않았었고, 그래서 둘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었다.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던 카스피가 물었다.
“음. 그러니까 영주 나리는 나바라의 왕이 되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우. 왕국을 떠난 지 벌써 20년도 넘게 흘렀고, 애초부터 왕의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게 아니잖수.”
“그래? 듣자 하니 지금 왕도 그리 잘난 인물은 아닌 것 같던데?”
오토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말실수를 깨달은 카스피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 미안. 그래도 영주 나리의 아버지였지?”
“괜찮수. 어차피 부자간의 정이 돈독한 것도 아니었으니.”
오토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다.
이미 오래전에 잊혔다 생각했건만 오토는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아버지를 봤다.
빛나는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채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모습.
‘등을 보이지 마라! 오토마이어!’
‘일어나거라! 검을 들어라!’
‘형편없는 녀석! 넌 장차 나바라의 후계자 중 하나가 될 사내다! 그래가지고 왕국의 든든한 기둥이 될 수 있겠느냐!’
그의 아버지, ‘율켄마이어 나바라’는 오토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그는 왕국의 후계자들이 강하게 성장하길 원했다.
그러나 평소 병약했던 율켄마이어의 넷째 부인은 칠삭둥이로 오토를 낳았고, 그래서 오토는 다른 자식들보다 몸이 약했다.
심지어 오토가 태어났을 때, 그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토가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거라 말했다.
“헉! 그래서 그때 황금바위산에서 그런 요상한 노래를 불렀던 거야?”
황금바위 드워프족에 숨은 악귀를 찾기 위해 크누트가 술판을 벌였던 날.
칼춤을 추던 오토가 불렀던 노래가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날을 떠올리며 흥얼거렸다.
내 이름은 오토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칠삭둥이
사람들은 날 보며 곧 죽을 거라 말했다네
하지만 난
악착같이 살아남았지
“그,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었수?”
“그럼. 이런 괴상한 노랠 누가 잊겠어. 분명 아틸라와 바토리도 고대로 기억하고 있을걸?”
카스피의 채근에 오토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내게 아버지는 선망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수. 아버지를 우러러보면서도 한편으론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지. 만약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분명 난 견디지 못해 죽었거나, 어디론가 도망쳤을 거요.”
“결국 도망쳤다면서.”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소.”
율켄마이어는 무력이 뛰어난 호전적인 왕이었다.
그래서 그는 국경을 침범하려는 타국의 적병이나 반란군들을 진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는데, 어느 날 함께 토벌을 나선 그의 첫째 아들이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둘째, 셋째, 넷째…….
계속해서 후계자들이 죽어 갔다.
때론 전장에서 전사하고.
때론 병에 걸려 급사했으며.
까닭을 알 수 없는 자살까지.
율켄마이어는 깊은 분노와 함께 초조함을 느꼈다.
그래서 남은 후계자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검을 가르쳤다.
그러나 오토는 몸이 약했고, 그런 율켄마이어의 가르침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오토의 어머니는 율켄마이어에게 간청했다.
오토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다른 검사에게 검술을 배울 수 있도록.
율켄마이어는 마지못해 그 청을 수락했고.
그렇게 오토가 만나게 된 것이 바로 나바라의 촉망받는 젊은 기사, ‘로잘린 란틴크’ 경이었다.
“와, 왕자 전하!”
로잘린이 다급한 얼굴로 벌컥 문을 열었다.
“크,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룽겔 공작의 기병대가……! 아니 일단 이곳에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 *
그 시각, 아틸라는 여전히 술병을 홀짝이고 있었다.
오토와 카스피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났건만 바토리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펀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으며, 시끄럽게 조잘대는 도롱뇽은 펀치의 인벤토리에 처박아 버렸다.
뒤늦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며 탑주와 원로들이 다녀갔지만 아틸라에겐 그저 귀찮은 일이었다.
결국 아틸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음주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그는 카르타고를 상대하며 개방됐던 권능, ‘광폭(狂暴)’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기억했다.
지구에 있던 그가 패영전 세계로 떨어지던 날, 그 빌어먹을 꼬마가 했던 말을.
‘광폭의 권능이라.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에요. 김도현 씨.’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소년을 만났을 때는.
‘그건 그렇고 김도현 씨. 마침내 광폭의 권능을 습득했더군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걸맞은 표현일까요? 정말로 당신은 새로운 권능을 ‘습득’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