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격동의 징조
지면과 공기를 울리던 충격파가 사그라졌다.
자욱했던 흙먼지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프스스스슷…….
맑아지는 시야 속에서 전사가 몸을 일으켰다.
전사의 한 손엔 투구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엔 와이번의 등에서 뽑힌 검은 뿔이 쥐여 있었다.
그는 지친 모습이었다.
그것을 증거하듯 굳게 다문 입술과 경직된 피부, 그리고 투구를 벗어 드러난 그의 검고 긴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황야처럼 메마르고 거칠었다.
그런 전사의 모습을 보며 마법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라면 역시 전사가 보인 압도적인 무력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나바라 왕국과, 그와 인접한 타국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사는, 적마탑 마법사들로 하여금 더욱더 고대의 용맹한 인간 전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투박한 날붙이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지하의 마수들을 베어 무찔렀다는 그들의 신화적인 용맹과, 영광을.
전사의 눈동자가 마법사들을 향했다.
“라일.”
그 말과 함께 전사의 손에 들린 검은 뿔이 파스슷, 흩어졌다.
저 멀리 적마탑 곁에 널브러진 거대 와이번도 오래된 사체처럼 풍화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라일이 아틸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단은 휴식이 먼저겠군. 아틸라.”
* * *
일행은 적마탑 하층의 널찍한 방으로 안내됐다.
무너진 상층과는 반대로, 하층의 내부는 직전의 전투가 무색하리만치 멀쩡한 모습이었다.
“날개 달린 것들의 습격이다 보니 하층은 별 피해가 없었던 것 같군.”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라일이 말했다.
“회복의 마력이 방을 둘러싸고 있다.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바토리 에르제베트에겐 더할 나위 없는 휴식처가 되겠지.”
“신경 써 주어 고맙구나.”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건 이쪽이다. 덕분에 적마탑은 멸망을 면했고 탑주님 또한 생존하실 수 있었지. 고맙다 아틸라. 바토리. 그리고 모두들.”
라일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디디에의 심문을 위해 나가 보겠다. 나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탑주님과 원로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까.”
이번 전투에서 리샤르를 포함한 와이번 기수는 모두 죽었다.
단 한 명 살아남은 것이 아틸라가 생포한 디디에.
일행은 적마탑으로 이동하는 동안 디디에를 통해 적마탑 습격 사건의 전모를 들었다.
“원하는 만큼 편히 쉬도록. 심문을 마치는 대로 돌아오지. 그리고 이건.”
라일의 품에서 술병이 꺼내어졌다.
“아틸라, 네가 좋아할 것 같아 탑주님 방에서 몰래 가져왔다. 나름 애주가이시니 괜찮은 술일 테지.”
“오. 널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마음에 들려 하는군.”
“농담하는 건가. 아틸라.”
“아니. 진담인데.”
엷게 눈썹을 찌푸리던 라일이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방의 요모조모를 구경하며 강아지처럼 돌아다니던 오토와 카스피가 조르르 달려와 말했다.
“마, 마법사들은 다 이렇게 훌륭한 곳에서 사는 거요? 저 창문과 가구들 좀 보시오! 이 세상 방이 아닌 것 같소!”
“세상에! 방에서 구린내가 조금도 나지 않아! 어떻게 이런 자연스러운 향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흐에엣! 저 은은한 조명 좀 봐! 저게 그 빛을 내는 마법석인가 뭔가 하는 건가?”
“아이고 어디 놀랄 일이 그뿐이요! 벽에 걸린 검과 방패 좀 보시오! 아니 대체 마법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저렇게 훌륭한 무구를 갖고 있어도 되는 거요!”
펀치의 등에서 뒹굴대던 도롱뇽이 배를 잡고 웃었다.
“케헷헷헷헤! 돌대가리 종복 미물 새끼. 저 검과 방패는 장식용이다. 네가 가진 드워프 강철검과 방패가 백만 배는 더 좋은 물건이라고. 이건 뭐 거의 뇌 없는 플라이웜과 비슷한 지능 수준을 가지고 있네. 멍청한 새끼. 케헷헷헷헤!”
“조, 종복 미물이라 하지 마라 이 요망한 도마배…… 히이이이익!”
오토는 발끈했지만 자신을 향해 크게 입을 벌리는 도롱뇽을 보자마자 카스피 뒤에 숨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도롱뇽의 하품이었고, 그래서 오토는 카스피에게 목을 얻어맞았다.
“이 비겁한 영주 나리! 숨을 곳이 없어서 가냘픈 여자 뒤에 숨어?”
“가냘프긴 누가 가냘프다고 케헥! 목 좀 그만 때리소!”
“그러게 누가 맞을 짓을 하래?”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입가를 올리던 아틸라가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의 표정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것이 할망구라 불린 것에 대한 토라짐인지, 아니면 격렬한 전투 후에 찾아온 피로인지 아틸라는 알지 못했다.
물론 심안을 통해 살펴보면 바토리의 심중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심안을 시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건 오토와 카스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아틸라는 그들을 자신의 동료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이들의 마음을 훔쳐보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피곤하면 누워 쉬어라 할망구.”
“그럴 셈이었단다.”
바토리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틸라의 생각보다 바토리의 피로는 심했다.
그녀는 무너지는 적마탑을 막기 위해 많은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 바토리의 기분을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건, 자신의 마력이 생각보다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무너지는 적마탑을 들고 버티는 아틸라를 돕기 위해 그녀는 붉은 마력의 실을 뽑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토리는 당황했다.
‘마력이 벌써 바닥났다고?’
자신은 아틸라를 큰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바토리는 카르타고를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아직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화가 났으며,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의문했다.
자신의 마력은 진정으로 바닥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 까닭에 대해 생각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현자의 돌.’
현자의 돌이 자신의 마력을 억제하고 있다.
물론 현자의 돌은 망가진 왼팔을 보호하는 필수적인 아이템.
그러나 바토리는 분명 그것에서 어떤 ‘억제’의 힘을 느꼈다.
그것이 현자의 돌이 지닌 고유의 힘인지.
아니면 한차례 망가졌던 돌이 완전히 수리되지 않아 생긴 부작용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고민하던 바토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엥? 벌써 잠든 거야 바토리?”
바토리 옆에 벌러덩 누워 헤헤거리던 카스피도 얼마 안가 잠이 들었다.
아틸라의 발치에 자리를 잡은 펀치 역시 꿈나라로 떠났고, 그 옆에서 도롱뇽이 골골골 코를 골았다.
아틸라는 라일이 두고 간 술병을 홀짝이며 육포를 뜯었다.
“나, 나도 좀 주쇼.”
아틸라는 오토에게 술병을 넘겼다.
꿀꺽꿀꺽 술을 마시며 주절대던 오토는 기절하듯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들었고, 라일의 목소리에 깨어났다.
눈을 뜬 오토는 아틸라 옆에 라일이 앉아 있는 것을 봤다.
바토리와 카스피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오토가 말했다.
“……아이고 아틸라 님. 내가 잠시 졸았던 모양이오.”
“뭔 헛소리냐. 너 잠든 지 이틀이 다 되어 간다.”
“엥? 뭐요?”
일행은 잠도 자지 못한 채 적마탑으로 달려와 힘겨운 전투를 치렀다.
그렇게 피로가 극에 달해 있던 차에, 전투가 끝났다는 안정감에 더해 회복의 마력으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오니 몸이 강제로 휴식의 스위치를 켰던 것.
라일이 말했다.
“나바라 왕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리샤르 세바스찬이 벌인 일과,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것 같더군.”
적마탑에서 나바라 왕성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리샤르 세바스찬은 보기와 달리 왕의 편에 섰던 자다. 그가 있었기에 귀족들은 왕의 불성실한 행태에도 표면적인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러나 리샤르는 죽었고, 이제 왕국은 왕위를 쟁탈하기 위한 귀족들의 전쟁이 벌어질 거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일.”
나바라 왕국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건 적마탑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적마탑은 나바라 왕국에서 막대한 지원금을 받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왕이 계속 왕의 자리에 머물러야만 유지되는 것이고, 거기에 더해 지금의 적마탑은 더욱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상황.
그러나 아틸라는 쓸데없는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라일을 자신의 동료라 인정하지 않았다.
라일도 그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원하는 만큼 편히 쉬라는 말을 남긴 채 방을 나갔다.
오토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여기 머무르실 생각이요 아틸라 님.”
“왜.”
“다녀올 데가 있어서.”
“갈 곳이 있으면 가라. 붙잡는 사람 없으니.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평소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게 무슨 소리요! 아이고 또 뭐가 어쩌고저쩌고…….’ 했을 법한 오토는 묵묵히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
“우린 사선을 함께 넘나든 동료 아니요. 언제까지 머무를 건지, 떠나실 거면 어느 쪽으로 갈 건지만 좀 알려 주쇼. 내 꼭 뒤쫓아갈 테니.”
아틸라는 잠든 바토리의 얼굴을 흘끗 쳐다봤다.
“바토리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떠난다. 일단의 목적지는 남서쪽의 ‘은밀한 숲’.”
“알겠수.”
오토는 바로 몸을 일으켰고, 장비를 챙긴 뒤 방을 나섰다.
잠시 후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안 자는 거 알고 있으니 일어나.”
카스피가 몸을 일으키며 헤헤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넌 잠들면 아주 우렁차게 코를 골거든.”
“그, 그게 무슨!”
“오토의 뒤를 밟아 봐.”
카스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어 배시시 웃음 지었다.
“뭐야 아틸라. 아깐 막 안 돌아와도 된다며 큰소리치더니. 영주 나리가 걱정되는 거야?”
“싫음 말고.”
“아니야. 안 그래도 영주 나리의 상태가 줄곧 신경 쓰였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쫓아가려 했어.”
“이거 갖고 가라.”
아틸라가 손가락으로 팅, 무언가를 튕겼다.
그걸 받은 카스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헤. 잘 돌아오라고 이런 것까지 빌려주는 거야?”
아틸라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가 탁자에 술병을 내려놓았을 때 카스피는 그곳에 없었다.
* * *
오토의 뒤를 쫓던 카스피는 한밤중이 돼서야 목적지에 도달했다.
“엥? 여긴?”
나바라 왕국의 국경 마을.
카스피는 옳다고나 손뼉을 쳤다.
“여,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영주 나리가 약혼녀를 만나러 온 거야!”
카스피는 말에서 내려 오토를 미행했다.
머지않아 그녀는 오토가 경비병과 대화하는 것을 봤다.
가벼운 실랑이 끝에 오토가 품에서 무언갈 꺼냈다.
‘오. 약혼의 증표 같은 건가?’
잠시 후 그것을 들고 사라졌던 경비병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오토를 어디론가 데려갔고, 카스피는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뒤를 쫓았다.
무장이 해제된 오토가 어느 나지막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스피는 고양이처럼 날렵한 움직임으로 지붕 위에 오른 뒤, 살금살금 기어 반대편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엔 오토의 약혼녀(로 추정되는) 경비대장이 서 있었고, 그녀는 다시 만난 오토를 보며 감정의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 당신은 역시……!”
경비대장이 오토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카스피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남쪽 관문 경비대장 로잘린 란틴크. ‘오토마이어 나바라’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