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적색의 마탑 (6)
등 뒤를 울리는 강렬한 감각에 리샤르 세바스찬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건 무슨!’
흑빛의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전사.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그 전사가 와이번 한 마리의 척추를 꺾어 버리고 있었다.
그오어! 그오어어어!
기괴하게 등이 접힌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와이번 기수는 한눈에 봐도 당황한 모습으로 검을 뽑았다.
그의 가슴에 흑철검이 꽂혔다.
“크헉……!”
복면 아래로 주르르 피가 흘러나왔다.
아틸라는 빙글 몸을 돌려 와이번 기수의 목을 잘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오어어어어!”
인간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괴성이 잘린 머리통에서 터져 나왔다.
이어 머리와 몸의 절단면에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어졌다.
그렇게 와이번 기수는 길고 시커먼 목을 지닌 기괴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고, 아틸라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게 바토리가 말했던 그림자의 힘이라는 건가.’
아틸라는 흑철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편 그 광경을 본 클레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리샤르에게 소리쳤다.
“리샤르!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것입니까!”
“말하지 않았소.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이라고.”
“당신은…… 당신은 정말로!”
클레르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의 양손에 강력한 화속성 마력이 피어났다.
리샤르도 클레르를 향해 강력한 공격을 발현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아틸라는.
긴 목을 뱀처럼 움직이며 달려드는 와이번 기수의 이마에 흑철검을 꽂는 것에 성공했다.
“키에에에에!”
와이번 기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척추가 꺾였던 와이번은 믿을 수 없는 재생력으로 몸을 복구했고, 다시금 몸을 상승시키고 있었다.
아틸라는 기수의 이마를 꿰뚫은 흑철검을 그대로 내려 와이번의 등판에 박았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와이번 기수가 이리저리 사지를 뒤틀었고, 그러자 근육과 뼈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그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변했다.
“그림자의 힘에 완전히 장악된 거로군.”
아틸라는 무휼을 꺼내 와이번의 목에 꽂아 넣었다.
핏물 대신 시커먼 무언가가 녀석의 몸에서 흩어졌다.
비명을 지르던 와이번은 조금 전의 기수처럼 목을 길게 늘여 아틸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것을 흑철방패가 막았다.
이어 무휼의 날이 와이번의 머리에 몇 차례 박혔고, 그러는 동안 아틸라는 도약 스킬의 쿨타임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이만 바닥에 찌그러져 있어라.”
퍼어어엉! 흑철검을 회수한 아틸라의 몸이 하늘 위로 솟았다.
부상을 입은 와이번은 아틸라의 발길질을 견뎌내지 못하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아틸라는 다음 와이번에게 착지를 시도하기엔 다소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최종 목표는 리샤르 세바스찬이 타고 있는 거대 와이번.
그곳까지 징검다리처럼 펼쳐져 있는 플라이웜들을 보며 아틸라는 목표물에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계산했고, 답을 찾았다.
“그래. 다음은 너로군.”
[ 타점을 특정합니다. ]
아틸라의 신형이 타점이 된 플라이웜의 척추에 내리꽂혔다.
* * *
바토리는 지면으로 낙하하는 와이번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틸라에게 받은 임무는 추락한 와이번과 플라이웜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것.
물론 플라이웜은 도롱뇽의 포식 스킬로 해치워야만 했기에, 그녀의 실질적인 임무는 네 마리 와이번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흐응. 첫 번째 먹잇감이 내려오는구나.”
바토리는 말을 달렸다.
도롱뇽과 펀치를 말 등에 태운 카스피가 그녀의 오른편을 달렸고, 왼편엔 오토가 있었다.
라일은 적마탑의 마법사들을 돕기 위해 따로 움직였다.
“라일! 라일이 아닌가!”
“라일 플라마가 돌아왔다!”
“그런데 저자들은……!”
아틸라 일행에 대한 원로들의 질문에 라일이 답했다.
“적마탑을 돕기 위해 온 자들입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그렇습니다. 저들 모두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이미 하나의 와이번과 여덟 마리의 플라이웜을 처치했으니까요.”
“무, 무어라?”
“이야기는 나중에. 지금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라일의 입에서 주문이 영창됐다.
이어 그의 양손에서 강렬한 화속성 마력이 샘솟았고, 플라이웜의 가슴에 명중했다.
화르르 불타는 플라이웜의 몸뚱이가 추락했다.
그 모습을 본 적마탑 마법사들은 크게 놀랐다.
‘라일이 언제 저런 성취를……!’
‘빼어난 소질을 지닌 마법사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마법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라일이 강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그릇이었던 그는 고위악마의 강대한 마력을 수없이 경험했고, 그 고위악마의 일부인 ‘메피스토’를 몸에 품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아틸라의 파티원에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 아틸라가 플라이웜과 와이번을 쓰러뜨렸을 때 레벨업을 했다.
‘이상하군.’
아울러 라일은 플라이웜을 적중시키며 주문의 관통력이 더욱 증가한 것을 느꼈다.
이유는 있었다.
[ 야수 사냥꾼의 외침 ]
[ 야수를 상대로 관통력이 10% 증가합니다. ]
플라이웜은 용족이지만 야수에도 속한다.
아울러 최근 스킬 레벨이 증가한 ‘야수 사냥꾼의 외침’은 사정거리가 더욱 길어졌다.
라일은 마음으로 메피스토를 불렀다.
‘메피스토.’
‘버서커 아틸라의 이능이 발휘됐다.’
‘이능이라고?’
‘그렇다. 그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 네 마법은 더욱 강한 면모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는 이능이라면 충분히 이용하면 그만이다.
라일의 손에서 기다란 불의 창날이 쏘아졌고, 또 다른 플라이웜의 가슴을 꿰뚫었다.
“캬캬캬! 좋아좋아! 화법(火法) 미물 녀석이 잘 하고 있군!”
지면에 떨어진 플라이웜을 날름 포식하며 도롱뇽이 깔깔댔다.
“이번엔 저쪽이다 살쾡이 미물!”
“헤헤헤! 알았다고 도롱뇽!”
신이 난 카스피도 깔깔 웃으며 말을 달렸다.
펀치도 재밌는지 끼아옹! 포효를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 바토리는 아틸라가 추락시킨 와이번에게 주문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녀의 강력한 억류 마법에 와이번은 두 날개와 뒷다리를 파닥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검과 방패를 들고 사주경계하던 오토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는 오늘도 바토리의 수호 임무를 맡았다.
“히익! 저, 저게 대체 뭐요 바토리 아가씨!”
와이번의 몸에서 쉴 새 없이 검은 기운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듬성듬성 깃털이 뽑힌 커다란 새의 형상이 조금씩 드러났다.
게다가 놀라운 광경은 또 있었는데, 그것이 오토의 눈살을 더욱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와이번과, 와이번 기수의 몸이 하나로 융합돼 있었던 것이다.
“마계에서 명계로 이동한 검은 보석. 보석을 본떠 만든 명계의 그림자. 그것이 중간계로 넘어왔느니라.”
“그게 무슨……! 아, 알아듣게 좀 말해 주쇼!”
“중간계의 생명은 그림자의 힘을 쉬이 견딜 수 없는 법이지.”
바토리가 방출하는 주문의 힘이 더욱 짙어졌다.
그것이 와이번과 기수를 뒤덮은 그림자의 힘을 말끔하게 걷어 냈고, 그러자 보였다.
머리와 등에서 주룩주룩 피를 흘리는 거대한 닭.
그리고 그 닭과 척추를 공유하며 꿈틀대는 와이번 기수의 끔찍한 몰골을.
“내…… 내 몸이……!”
자신의 꼴을 확인한 와이번 기수가 비명을 질렀다.
“히익! 끼흑! 내 몸이……! 까흣! 내 몸이이이이!”
수 시간 전, 바토리는 도롱뇽의 브레스로 분쇄되던 와이번의 몸속에서 커다란 닭을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와이번은 진짜가 아닌, 그림자의 힘으로 만들어 낸 가짜라는 것을.
명계의 그림자는 닭을 재물 삼아 와이번의 형체를 그렸다.
그리고 점점 더 힘을 뻗쳐 와이번 기수까지 제물로 만들었다.
“우욱……! 우웨에에엑……!”
오토의 말에 묶여 있던 디디에가 토사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연히 이자들을 만나 생포되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눈앞의 기수와 같은 꼴로 전락했으리라는 것을.
“리샤르 세바스찬……. 당신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버르적대던 기수와 닭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하나가 된 두 생명이 사그라졌다.
바토리는 고개를 들어 적마탑 최상층에 떠오른 거대 와이번과, 그 위에 올라탄 리샤르 세바스찬을 바라봤다.
그는 가공할 화속성 마력을 뿜어내는 클레르 플라마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저 아이 역시 융합이 진행 중이겠구나.”
바토리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플라이웜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이동하는 아틸라.
허공에 떠오른 플라이웜은 충분히 많았기에, 자신의 도움 없이도 그는 차근차근 리샤르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 * *
플라이웜을 차례로 밟으며 전진하던 아틸라는 머지않아 두 번째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와이번과 기수는 이제 거의 한 몸처럼 동화돼 있었다.
적마탑을 향해 브레스(라기보다는 검은 가래침 같은 액체)를 쏘아 대던 와이번은 아틸라가 등에 오르자마자 거칠게 반응했다.
그어어! 그오어어어!
그 괴성이 신호였던 듯 좌우에서 두 마리 와이번이 합류했다.
놈들 역시도 기수와 상당히 동화가 진행된 상황.
아니, 기수의 모습 같은 건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래. 순순히 보내 주진 않겠다 이거냐.”
와이번들의 등 뒤로 십여 마리의 플라이웜이 합류했다.
놈들 역시 이곳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아틸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틸라는.
제 발로 찾아든 경험치 군단을 홀대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놈부터.”
아틸라는 축성의 인장으로 모아 둔 무휼의 성력을 개방했다.
눈부신 광채가 허공에 찰나의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아틸라가 올라탄 와이번의 몸체가 깔끔하게 둘로 쪼개졌다.
[ 도약(跳躍) ]
반으로 갈린 와이번을 짓밟으며 아틸라가 도약했다.
근접했던 또 다른 와이번의 등 위에 착지하자 그곳을 중심으로 가공할 충격파가 일었다.
파동에 휩싸인 플라이웜들과 와이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등을 짓밟힌 와이번이 몸을 비틀며 아틸라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저항은 길지 못했다.
성력을 내뿜는 무휼의 기다란 검신이 놈의 양날개를 절단했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와이번을 지르밟으며 아틸라는 몸을 날렸고, 저만치 보이는 플라이웜의 발목을 잡아 등에 올라탔다.
그렇게 몇 차례를 더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틸라는 마지막 남은 와이번의 날개를 붙잡는 것에 성공했다.
그오어! 그오어어어어!
지면을 향해 추락하는 동족을,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탄 아틸라를 보며 와이번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십여 마리의 플라이웜이 아틸라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날아들었다.
아틸라는 한 손으론 와이번의 살갗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흑철방패를 들어 놈들의 공격을 막았다.
점점 더 많은 플라이웜이 아틸라에게 몰려들었다.
아틸라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그가 도롱뇽에게 의지를 전했다.
‘튀어 올라와라. 도롱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