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51화 (151/425)

151. 적색의 마탑 (5)

“이 목걸이에 박힌 검은 보석. 아무래도 이번 적마탑 사건의 주모자는 이것을 통해 플라이웜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 같구나. 물론 보석이 지닌 본연의 힘은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바토리의 목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아틸라가 물었다.

“그럼 본연의 힘은 따로 있다는 건가.”

“그렇단다. 보석의 원래 주인은 명계의 존재가 아니다. 희미하게나마 익숙한 악마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을 게야.”

바토리의 눈이 디디에를 향했다.

“네가 이 보석을 처음 손에 넣은 것이 언제이더냐.”

“약 두 달 전…….”

“열흘 전이군.”

디디에의 눈이 또다시 부릅떠졌다.

‘대, 대체 뭐지 이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샤르 세바스찬의 이름을 알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보석을 손에 넣은 시기까지 정확하게 특정하다니.

아틸라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한 번만 더 속이려 들었다간 그 혀를 뽑아 버리겠다.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만 난 네가 말할 수 없는 몸이 되어도 충분히 원하는 답을 얻어 낼 수 있거든.”

흠칫 놀란 디디에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주절주절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열흘 전 궁정 마법사 리샤르 세바스찬이 널 찾아와 이 보석을 주었고, 자신의 말대로 하면 기사단장의 직위를 주겠다 말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원래라면 궁정 마법사에게 기사단장 보직을 임명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은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임과 동시에 귀족들의 권모술수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었고.

그 귀족들의 암투 끝에 왕위 계승자가 모두 병들어 죽거나, 실종되거나, 암살을 당한 상태였다.

즉, 나바라의 왕에겐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수많은 첩을 들이며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만 몰두했다.

젊었을 적의 용맹함과 현명함은 잃어버린 지 오래.

그곳에서 리샤르는 적마탑의 강력한 탑주 후보였다는 든든한 배경을 발판 삼아 차근차근 세력을 키웠다.

아니, 세력을 키웠다기보다는 왕국의 정세가 자연스럽게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제아무리 계략에 능한 귀족이라도 감히 적마탑의 탑주가 될 뻔했던 사내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리샤르는 나바라 왕국에서 왕 다음가는 권력자가 되었고.

그런 그에겐 충분히 지금의 기사단장을 해임하고 다른 이를 앉힐 만한 힘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기사단장은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말해 보거라. 열흘 전 이 보석을 처음 보았을 때도 지금 크기와 같았더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지 디디에는 말똥히 보석을 바라봤다.

그의 생각을 읽은 아틸라가 포박을 풀어 줬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디디에는 보석을 손에 올렸고, 잠시 후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작아…… 졌어……?”

그랬다.

그가 처음 보석을 손에 넣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마디와 크기를 비교했었기에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보석이 작아졌다.

“흐응. 역시 그런 게로구나.”

바토리가 아틸라를 바라봤다.

“이 보석은 ‘그림자’란다.”

“그림자?”

“그래. 이것은 본체에서 파생된 그림자에 불과하구나.”

“그림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데 바토리?”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카스피가 물어왔다.

바토리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림자는 빛이 드리우는 방향에 따라 본체와 닮은 형태를 만들기도, 혹은 완전히 다른 형태를 만들기도 한단다.”

드러나기 시작한 달빛이 달리는 다섯 마리 말을 비추었다.

그 아래서 하나로 뭉개진 그림자가 괴물처럼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바토리가 가만히 내려 보았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아틸라, 카스피, 오토도 그림자로 눈을 돌렸다.

“또한 그림자는 본체의 모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단편적인 모습만을 그려내지. 게다가 그 모양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불친절하기도 하단다.”

“그렇다는 건…….”

“이 보석은 진짜의 모습을 흉내 낸 가짜. 게다가 남은 수명이 그리 길지도 않을 듯하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아틸라가 디디에를 돌아봤다.

“보석은 모두 몇 개가 있지?”

“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저를 포함해 다섯 명의 와이번 기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궁정 마법사께서는 제 것보다 더욱 커다란 보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다섯 마리의 와이번을 소환해 정신 지배한 후, 저희에게 나눠 주셨죠.”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디디에가 이어 말했다.

“게, 게다가 궁정 마법사께서는 와이번이 아닌, 그보다 더욱 커다란 용족을…….”

아틸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 *

새벽의 여명이 적마탑을 비췄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외부의 침략을 허용한 적이 없는 고고한 적색의 마탑.

그곳은 지금 흉측한 속살을 드러내며 진동하고, 부서지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와이번 부대의 습격이다!”

“플라이웜들이 다시 돌아왔다!”

마탑에 고용된 병사들이 뿔나팔을 불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무기로는 하늘 위의 와이번과 플라이웜에게 자그만 피해도 입히기 힘들었다.

여기선 마법사들이 나서야 한다.

그러나 패영전 세계관에서 마법사는 희소한 존재.

아무리 적색 마탑이라 해도 상주하는 마법사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전력이 될 만한 마법사 중 상당수는 악귀와 혈귀 사건 조사를 위해 떠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적마탑의 탑주 클레르는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타, 탑주!”

“마법을 사용하실 상황이 아닙니다!”

“자칫 마력이 역류한다면 돌아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마법사들의 만류에도 그녀는 전투에 나섰다.

마력의 역류.

마법을 연구하는 이라면 누구나 가장 두려워하는 일.

그럼에도 클레르는 전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 역류해 죽으나, 불바다가 된 마탑에서 타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

게다가 클레르는 직감했다.

지난번 마탑을 침공했던 와이번과 플라이웜.

그리고 그 어떤 개체보다도 커다란 몸뚱이를 움직이며 적마탑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혔던 괴물.

그 괴물 위에 타고 있던 자가,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내라는 것을.

‘리샤르.’

클레르는 리샤르가 강한 야심을 지닌 사내라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클레르와의 정당한 경쟁에서 밀려 도태됐고, 나바라 왕국의 궁정 마법사가 되었다.

이후 리샤르는 클레르와 딱히 반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께 적마탑에서 연구하던 시절만큼 돈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날을 세우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클레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리샤르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할 사내가 아니다.

클레르가 적마탑을 사랑하는 것만큼 리샤르도 적마탑을 사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제 손으로 그것을 부숴 버릴 자가 아니다.

“모든 마법사들은 저를 따르십시오! 지금부터 우린 목숨을 걸고 적마탑을 수호합니다!”

아직 마력을 운용하기도 전이었건만, 클레르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 정도로 그녀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보호막이 남아 있었다면.’

지난번 전투에서 마탑을 보호하던 마력장은 모두 사라졌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적일지라도 마탑의 보호막은 그리 쉽게 부술 수 없다.

적마탑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리샤르이기에, 그리고 그가 일반적인 마력이 아닌 ‘어떤 불길한 힘’을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

하늘을 메운 거친 날갯짓을 바라보며 클레르는 생각했다.

‘무슨 연유로 와이번과 플라이웜이 속세에 나타난 것인가.’

보통의 사람은 일생 동안 단 한 마리의 용족을 만나 보기 힘들다.

용족은 대륙의 그 어떤 종족보다도 은밀한 존재다.

‘오래전의 사건으로 대부분의 용족은 중간계에서 종적을 감췄다.’

리샤르의 변심에 이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클레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입에서 강력한 화속성 주문이 영창됐다.

하늘을 겨눈 손에서 불의 화살비가 쏘아졌다.

퍼퍼퍼퍼펑!

그것을 신호로 마법사들이 각자의 마법을 하늘 위로 뿌렸다.

클레르의 것을 닮은 불화살.

태양처럼 타오르는 화염구.

길쭉한 불의 창날.

그것들이 날개 달린 수십 마리의 적을 노리며 쇄도했고, 상대는 그것을 피하거나, 스치거나, 때론 정통으로 맞았다.

화염 마법에 적중 당한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와이번의 모습은 없었다.

지난 전투와 마찬가지로, 와이번들은 마법사의 공격에 쉬이 당하지 않았다.

“약삭빠른 놈들!”

젊은 마법사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 정도로 와이번들의 몸놀림은 재빨랐다.

무슨 이유에선지 원래 다섯 마리였던 와이번이 네 마리로 줄어 있었지만 마법사들에게 그리 큰 위안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녀석이 등장했다.

“나, 나타났다!”

“죽음의 와이번!”

그어어어어어!

시커먼 기운을 흩뿌리며 등장한 거대 와이번.

아니, 와이번이라기엔 모양이 조금 달랐다.

녀석에겐 날개가 존재하지 않았다.

“날개가 없는데 어떻게 날고 있는 것인가!”

거대 와이번이 등장하자마자 클레르는 탑을 올랐다.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해 그녀는 원로들에게 지휘를 부탁해 두었다.

마탑에 아직 남아있는 상승의 마력이 탑주의 마력과 결합해 그녀의 몸을 최상층으로 이동시켰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그 시간이 클레르에겐 영겁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상대 역시 그녀가 올 것을 짐작한 것처럼 탑의 최상층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리샤르.”

“역시, 당신이라면 알아볼 거라 생각했소.”

복면 사이로 흐르는 리샤르의 음성에 클레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오.”

“계시라고요?”

“그렇소. 난 위대한 존재에게 간택되었고, 그분의 의지에 따라 적마탑을 취할 것이오.”

“그렇게 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모르고 있소. 이 세계는 변할 것이오. 우리는 준비해야 하오. 그분의 의지를 따라야 하오.”

클레르의 낯빛이 무생물처럼 굳어졌다.

지금의 리샤르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어어어어! 날개 없는 와이번이 입을 벌렸다.

지옥의 들목과도 같은 입구멍에서 불길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클레르는 욕지기가 이는 것을 삼키며 리샤르를 노려봤다.

“병력을 물리십시오. 리샤르!”

“그러지 않겠소.”

“적마탑을 파괴하고 나면 당신에게 무엇이 남는단 말입니까! 중앙 마탑은 결코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순간 클레르는 리샤르의 뒤편에서 기묘한 광경을 봤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로 새까만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간?’

그 인영은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그 아래서 날갯짓하는 와이번의 등 위로 벼락처럼 착지를 시도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파아아아아앙!

가공할 충격파가 적마탑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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