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적색의 마탑 (1)
라일의 눈이 부릅떠졌다.
“탑주께서?”
믿을 수 없었다.
적마탑의 탑주가 누구인가.
남부 대륙을 통틀어 화속성 마법에 가장 통달한 마법사.
그 위세 등등한 중앙 마탑에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력자.
그것이 바로 적마탑의 탑주 ‘클레르 플라마’다.
놀란 건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클레르 플라마가?’
아틸라는 클레르 플라마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전성기의 바토리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의 마력은 웬만큼 강력한 관조자보다도 강력하다.
인간 마법사로서는 거의 정점에 근접한 존재.
‘지금의 제롬보다도 훨씬 강할 테지.’
그런 그녀가, 그것도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적마탑에서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니.
라일이 경비대장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적마탑이 누구에게 습격당했다는 것인가.”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적마탑에 폭격을 가했다는 것밖에. 그 때문에 왕께서 엄명을 내리셨고, 저희는 놈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관문 경비를 더욱 삼엄하게 유지하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소문이 사실이라면 놈들이 하늘 위로 도주할 우려도 있지만…….”
라일은 질문을 바꿨다.
“말을 빌릴 수 있겠나?”
“아, 물론입니다. 이봐 거기! 날랜 말 다섯 필을 가져……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잠시 후 경비대장은 한눈에 봐도 건강한 말 다섯 필을 끌고 왔다.
일행은 히죽 웃으며 말에 올라탔지만, 라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찌할 셈이더냐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속삭였다.
라일과 적마탑까지 함께 이동할 것인지, 아니면 이만 헤어질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적마탑으로 간다.”
“흐응. 귀찮은 일은 늘 꺼려 하던 네가 무슨 바람이 불었더냐.”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 머지않아 거대한 변화가 현세를 덮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대격변의 시대가 너희 앞에 찾아올 것이다.
클레르 플라마를 위중하게 만들 정도의 습격자.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말했던 ‘대격변’과 적마탑 습격 사건이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틸라 일행이 동행한다는 것에 라일은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메피스토의 기억 속에서 아틸라 일행의 실력을 봤다.
적마탑을 습격한 자들의 정체는 아직 특정할 수 없고, 든든한 지원군의 존재는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고맙다. 아틸라.”
“출발하지.”
다섯 마리 말이 관문 도시를 넘어 나바라 왕국의 초원을 달렸다.
이곳에서 적마탑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전력으로 달린다면 내일 해 질 녘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 * *
실눈처럼 가느다란 달은 구름 뒤에 숨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오토는 알아서 땔감을 구하고 있었다.
사실 모른 척 가만히 있었어도 아틸라가 시켰을 것이다.
아무튼 오토는 주섬주섬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카스피가 고양이처럼 다가왔다.
“영주 나리.”
“으힉! 깜짝이야! 기척을 좀 내시오 살쾡이 암살자! 내 간 떨어질 뻔했소!”
“헤헤. 재밌잖아.”
헤실헤실 웃으며 카스피가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런 거야?”
“뭘 말이우.”
“아까 관문에서, 그 여자 경비대장하고 얼굴 안 마주치려고 숨었었잖아.”
“내, 내가 말이우? 참나 내가 언제 그랬다고.”
“아닌데. 분명 그랬는데.”
“잘못 본 거유.”
“그래? 내가 짐작하기엔 그 경비대장과 아는 사이 같던데? 얼핏 나이도 비슷해 보이고.”
“뭐? 비슷?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 여자가 나보다 다섯 살은 더 먹었……!”
“거봐. 아는 사이 맞네.”
“…….”
“어떻게 아는 사인데? 뭐 숨겨 둔 약혼녀라든지, 뭐 그런 건가?”
“이 나이에 숨겨 둔 약혼녀는 무슨.”
“그럼 뭔데?”
“뭐, 그냥 어릴 적에 일면식이 있었을 뿐이우.”
“흠.”
“옆에서 방해만 하지 말고 왔으면 거 땔감이나 좀 주우쇼. 맨날 연장자 부려먹지 말고.”
“나이 많은 게 무슨 유세라고. 그래봐야 영주 나리도 바토리에 비하면 갓난아기 축에도 못 끼지 않아?”
“그래도 댁보단 많이 먹었수!”
발끈하던 오토가 문득 물었다.
“근데 몇 살이우?”
“응? 나 말이야?”
“그럼 여기 살쾡이 암살자 말고 또 누가 있수.”
“스물둘. 딱 예쁜 나이지? 헤헤.”
“지금 스물둘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스물이었겠수.”
“뭐, 그렇지. 우와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네. 그럼 아틸라도 이제 열여덟 살인가? 여전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지만.”
카스피가 실실 웃자 오토도 피식 웃었다.
“난 계속 보다 보니 점점 애새끼처럼 보이…….”
“누가 애새끼라고?”
“힉!”
깜짝 놀란 오토가 뒤를 돌자 토끼 다섯 마리의 귀를 한 손에 움켜쥔 아틸라가 서 있었다.
“아이고 아틸라 님. 그게 아니고요.”
“됐고, 다 주웠으면 가자. 오늘은 토끼들이 아주 실하군.”
아틸라가 씩 입가를 올렸다.
잠시 후 일행은 잘 피워진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토끼고기를 씹고 있었다.
카스피가 말했다.
“아틸라.”
“왜.”
“아까 그 경비대장이 영주 나리의 숨겨 둔 약혼녀래.”
게걸스럽게 고기를 씹던 오토가 푸학! 입안의 것을 뿜었다.
“또, 또또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내 분명 아니라 말하지 않았소!”
“흐응 약혼녀라. 그게 사실이더냐 철혈귀검아.”
“오. 정말이냐? 오토, 너 나바라 왕국 출신이었냐?”
“그…… 나바라 왕국 출신인 건 맞소. 하지만 그 여자가 내 약혼녀인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살쾡이 암살자가 또 장난을……!”
“장난이라기엔 그 여자 나이도 정확하게 알고 있던데?”
“나이 아는 거와 약혼녀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소! 내 말하지 않았소! 어릴 적에 두어 번 얼굴 마주친 사이에 불과하다고!”
“여자의 직감을 무시하지 말라고 영주 나리. 분명 뭔가가 있어. 단순히 인사나 하는 사인 아닌 거 같았다니까?”
그러자 바토리도 거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생각이 나는구나. 경비대장의 눈을 피해 숨던 철혈귀검의 생쥐 같은 모양새가 말이다.”
“새, 생쥐라니!”
카스피와 바토리가 몇 번 더 캐물었지만 오토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라일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말없이 고기를 씹었다.
적마탑이 걱정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라일은 상당히 적은 양의 고기만을 먹었다.
“안 먹을 거면 내가 먹지.”
아틸라가 말하자 라일은 순순히 고기를 내주었다.
아틸라는 라일의 토끼를 들어 절반은 펀치에게 주고, 나머진 자신이 먹었다.
‘진짜 라일이 맞긴 한 모양이군.’
말고기를 맛있게도 뜯어먹던 이전의 라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펀치의 고기를 몰래 훔쳐먹는 도롱뇽을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어이. 도롱뇽.”
“힉! 왜!”
“이 검은 언제 다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거냐.”
아틸라는 허리에서 드라칼리온을 뽑아들었다.
단검처럼 자그매진 전설의 검.
그러나 그가 처음 도롱뇽에게서 이 검을 받았을 땐 카르타고마저 놀랄 정도의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는 검이었다.
“아 그거. 아무래도 이몸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인 것 같다.”
“그래? 카르타고와 싸울 땐 멀쩡했잖아.”
“그거야 뭐 메피스토펠레스 녀석의 환술 때문이었겠지. 환술 속에서 야만 미물, 네 의지와 결합해 본래에 가까운 모습을 찾았고, 환술이 사라진 지금은 다시 이런 모습이 됐고.”
앞발로 턱을 괴며 무언갈 생각하던 도롱뇽이 이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드라칼리온은 내 어금니를 뽑아 만든 특별한 검이다. 따라서 드라칼리온은 나의 일부나 마찬가지지. 분명 내가 힘을 회복하면 검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다. 그 가능성은 얼마 전 황금바위성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나.”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바위성의 첨탑 지붕에서 아틸라가 도롱뇽에게 해방 스킬을 시전했을 때, 드라칼리온은 잠시나마 지금보다 크기가 커졌었다.
‘도롱뇽 녀석 레벨업을 좀 신경 써야겠군.’
도롱뇽이 가장 빠르게 레벨업하는 방법은 물론 포식이다.
게다가 꾸준히 상승하던 포식 스킬은 얼마 전의 보상으로 단숨에 10레벨이 되며 중하위종의 동족도 삼킬 수 있게 되었다.
‘중하위종 용족 녀석들 어디 하늘에서 뚝 안 떨어지나.’
생각에 잠긴 아틸라의 옆구리를 바토리가 콕콕 찔렀다.
아틸라와 눈이 마주친 바토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흐응. 잠이 오는구나 야만전사야.”
“그럼 자라.”
“마땅히 베개로 쓸 만한 것이 없구나. 다른 건 몰라도 드워프들이 만든 베개는 그들의 무구만큼이나 훌륭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었으면 하나 가져오지 그랬냐.”
“그럴 마음도 있었지만, 내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느니라.”
“왜.”
아틸라의 물음에 바토리가 배시시 웃었다.
“네가 팔베개를 해 주면 되지 않느냐.”
“뭐?”
“뭐?”
아틸라와 카스피가 동시에 외쳤다.
그 모습에 바토리의 두 뺨이 살짝 붉게 물들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바토리는 끝까지 얼굴에 철판을 깔 셈인 모양이었다.
“그게 무어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 놀란 기색이더냐. 자, 이리 누워 한쪽 팔만 내주면 되느니라. 나머진 내 알아서 할 테니.”
“뭐, 뭐뭐뭐야 지금. 서, 설마 바토리, 아틸라와……!”
카스피의 물음에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 생각 그대로란다 카스피.”
“흐에에에엣!”
“뭐야 잠깐.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대체 뭔 헛소릴 하고 있는 거냐 할망구.”
“이참에 동료들에게도 말해 두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야만전사야.”
“그러니까 뭘.”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느냐. 짓궂은 사내. 날 너무 부끄럽게 만들지 말거라.”
아틸라는 어이가 없었다.
옆을 돌아보니 카스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그래진 눈만 내놓은 채 무어라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오토는 붉어진 얼굴로 고기를 입에 문 채 굳어 있었다.
라일만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아틸라와 바토리를 바라봤다.
아틸라는 다시금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는 반은 기대하는 얼굴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겁에 질린 소녀같은 얼굴로 아틸라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순간의 정적이 찾아왔고, 그 정적을 깨뜨린 건 도롱뇽이었다.
“야, 야만 미물! 위다! 머리 위를 봐!”
일행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달빛마저 가려낸 두꺼운 구름 위로 새와 닮은 무언가가 비행하는 것이 보였다.
“저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것과, 날아가는 방향이 일행의 목적지인 적마탑과 같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행은 라일과 경비대장의 대화를 떠올렸다.
‘적마탑이 누구에게 습격당했다는 건가.’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적마탑에 폭격을 가했다는 것밖에.’
라일의 눈이 아틸라를 향했다.
“아틸라.”
“출발한다.”
고개를 끄덕인 일행이 서둘러 말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