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북쪽으로 (2)
시시덕대는 오토의 얼굴을 보며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바토리와 카스피도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토가 카스피에게 조르르 달려가 물었다.
“내 말이 어떻소 살쾡이 암살자! 아 그렇지. 내 검 한 번 만져 보시겠수?”
“아이고 알았어, 알았다고. 며칠 내내 죽상을 하고 있더니 그새 애처럼 좋아하기는. 휴, 속 보인다 속 보여.”
“속이 좀 보이면 어떻소! 그만큼 내가 순수하다는 거요!”
“그건 좀 아닌 것 같구나 철혈귀검아. 분명 전에 리옹에서 날 업고 영주성으로 달려가며 하는 말이…….”
“뿌애애애액! 제, 제발 그 말 좀 하지 마시오! 아틸라 님이 들으면 어쩌려고……!”
“뭔데.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뭔가 수상한 소릴 하긴 했었지.”
“흐응. 궁금하더냐 야만전사야.”
“아, 아무것도 아니우! 아아무 일도 없었수! 정말이오! 아틸라 님!”
“근데 왜 이리 호들갑이야. 이거 점점 더 수상해지는데.”
“정말로 궁금하더냐. 한데 나는 혹 염려가 되는구나. 네가 그걸 알게 되면 철혈귀검의 목을 베어 버릴 수도 있을 거 같아 말이다.”
“히이이익! 그 무슨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거요 바토리 아가씨!”
“너 이 새끼.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자, 잘못했소!”
머지않아 화제는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오토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제 무구를 바라봤다.
히죽히죽 웃으며, 그리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검과 방패와 플레이트 아머를 살펴보는 그의 모습을 본 아틸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새끼. 저렇게 좋아 죽으니 굳이 사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골든핑거는 아틸라를 불러 슬쩍 말했었다.
‘미안한 말이네만 오토, 저 친구의 무구는 고순도 드워프 강철로 만든 것이 아니라네. 강철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고, 자네도 알다시피 고순도 드워프 강철은 중량이 상당하지 않은가. 그래서 드워프 중에서도 크누트나 라그나 정도의 장사가 아니라면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게고.’
즉, 오토의 힘으론 고순도 드워프 강철 무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기에 순도를 낮춰 무게를 줄였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드워프 강철은 드워프 강철이다.
결코 일반 강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와 경도를 자랑한다.
“오. 돌아왔나 아틸라.”
방에서 기다리던 라그나가 일행을 반겼다.
그리고 일행은 보름 만에 정신을 차린 라일을 볼 수 있었다.
“당신들은…….”
문 앞에 선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을 보며 라일이 말했다.
아틸라의 눈썹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
라일은 이전과, 그러니까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가 그의 육신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와 무언가 달랐다.
아틸라는 이내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재수 없는 실눈이 사라졌군.’
평범하게, 그렇지만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 일반인보다 깊은 눈을 뜬 라일은 전보다 더욱 미남자처럼 보였다.
“어머.”
카스피가 순간 놀라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저도 놀라 입을 가린 카스피가 오토에게 속삭였다.
“여, 영주 나리. 저 마법사가 원래 저렇게 잘 생겼었어?”
“잘 생기긴 무슨. 기생오라비처럼 생겼구만. 왜. 관심이라도 있수?”
“흐에에? 과, 관심은 무슨! 그리고 누가 그렇게 크게 말하래!”
카스피가 호들갑을 떨며 오토의 목을 후려쳤다.
“케헥! 왜, 왜 때리는 거요!”
“그렇게 철갑옷을 주렁주렁 입고 있으니 때릴 곳이 목밖에 더 있어?”
“왜 목을 때리냐는 게 아니고 왜 때리냐고!”
“맞을 짓을 했으니 때리지!”
카스피는 한 번 더 오토의 목을 주먹으로 때렸다.
비명을 지르는 오토를 무시하며 카스피는 아틸라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라일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바토리가 말했다.
“라일이 깨어났구나. 야만전사야.”
“그래.”
아틸라는 라일의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런 아틸라를 라일은 가만히 바라봤다.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나지 않는 건가. 라일.”
“아틸라.”
라일의 말에 아틸라는 아주 살짝 입가를 올렸다.
라일이 이어 말했다.
“……라고 하는군. 내 안에 있는 존재가.”
“그 존재의 이름을 알고 있나.”
“메피스토펠레스.”
그렇게 말한 라일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에겐 이름이 없다고 하는군. 이제 자신은 메피스토펠레스와 다른 존재라고.”
아틸라의 입가에 확연한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그랬던 거군.’
아틸라는 카르타고와의 대결을 떠올렸다.
광폭의 권능을 발현한 이후는 버서커의 광기에 물들어 있었기에 드문드문 기억이 누락돼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르타고는 내 몸을 장악한 버서커의 광기를 지웠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카르타고가 말한 대로 아틸라와 샤를은 그의 대적자고, 그래서 죽이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뿐.
그리고 광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아틸라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새로운 임무창이었다.
[ 네 번째 임무 ]
[ 메피스토펠레스의 야망을 무너뜨리고, 그의 염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
‘뭐?’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임무라 생각했다.
야망을 무너뜨리고, 또 염원을 이루라니.
‘뭐 이런 말장난 같은 임무가.’
그러나 임무창을 붙들고 고민할 시간 따윈 없었다.
시공추적의 반지를 통해 바토리의 현 상황을 깨달은 그는 서둘러 그녀를 구해야만 했으니까.
아틸라는 동료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쓰러뜨릴 묘안을 떠올려 동료들에게 전한 뒤, 그들과 함께 마지막 환술 이동기를 시전했다.
그렇게 아틸라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메피스토펠레스의 야망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여전히 네 번째 임무는 완료되지 않았다.
아틸라는 라일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그는 확신했다.
지금 라일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분명.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던 ‘또 다른 자아’로구나.”
“그래.”
바토리의 말대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는 아틸라와 동료들, 그리고 붉은 눈의 소년이 발현한 시커먼 아가리에 당해 완전히 소멸했다.
그렇다면 지금 라일의 몸 안에 남아있는 건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만들어진 메피스토펠레스의 ‘또 다른 자아’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야만전사야.”
“답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할망구.”
“뭐라?”
“지난 보름 동안 라일의 머릿속을 몰래 훔쳐보지 않았냐. 어울리지도 않게 간호하는 척하며 말이다.”
“흐응. 눈치채고 있었더냐.”
“그래서, 네가 본 녀석의 속은 어땠지?”
“인간의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있더구나.”
“라일의 말대로, 지금의 녀석과 메피스토펠레스는 다른 존재인가.”
잠시 생각하던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됐다.”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메피스토펠레스의 ‘또 다른 자아’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면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다.
아틸라에겐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 임무를 완료하였습니다. ]
‘좋아.’
아틸라의 입가가 올라갔다.
네 번째 임무 완료를 위한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 메피스토펠레스의 야망을 무너뜨리고, 그의 염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
메피스토펠레스는 소멸했고 그렇게 그의 ‘야망’은 무너졌다.
또한 놈의 새로운 자아는 그의 ‘염원’대로 라일의 몸 안에서 인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메피스토펠레스가 애초에 원했던 삶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녀석은 원래 라일을 인간의 삶을 살기 위한 그릇으로만 사용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뒤 그곳의 왕으로 군림할 계획이었지만.
‘또 다른 자아’는 라일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한 채 수동적인 인간의 삶을 살게 될 테니까.
‘나쁘게 말하면 라일의 노예. 뭐, 좋게 말하면 친구쯤 될 테지.’
아틸라는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라일에게 심안을 시전한 그는 ‘또 다른 자아’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으니까.
“……메피스토.”
라일이 중얼대듯 말했다.
“자신을 ‘메피스토’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 말하는군. 내 안에 있는 존재가.”
아틸라도 심안을 통해 그것을 봤다.
그뿐 아니라 아틸라는 메피스토의 기억을 생생하게 공유할 수 있었다.
메피스토가 지닌 환술과 아틸라의 심안이 반응하며, 마치 영화처럼 녀석의 기억이 머릿속에 차올랐던 것.
그곳에서 아틸라는 붉은 눈의 귀공자, 아니 자신을 패영전 세계로 떨어뜨린 소년을 봤다.
‘당신의 염원을 이룰 수 있게 도와드리죠. 메피스토펠레스.’
소년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야망을 알고 있었고, 먼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접근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소년을 의심했지만, ‘신과 악마의 관찰자’라 불리는 막강한 존재가 자신의 허물을 들추기는커녕 오히려 도와주겠다고 하니 별다른 방도 없이 받아들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소년의 도움을 받아 아인하르트 왕국에 거대한 공간 환술을 부여했고, 환술의 세계선을 분할시켰다.
그러나 역시 소년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당신들이 지금까지 없던 강력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죠.’
소년은 파우스트의 관조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부여해 카르타고를 소환시켰다.
그리고 소년의 생각대로 카르타고는 자신을 소환한 파우스트의 관조자들을 제거하고 자유를 손에 넣었다.
카르타고는 자신의 내면을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을 통해 ‘그 존재’가,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를 이용해 자신을 소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서커 카르타고. 당신은 머지않아 두 명의 대적자를 만나게 될 거예요.’
그 말대로 카르타고는 샤를과 아틸라를 만났다.
카르타고의 강력함은 샤를 아인하르트의 숨겨진 힘을 표면화시켰고, 아틸라의 새로운 권능 ‘광폭(狂暴)’을 일깨워 환술 세계선을 부쉈다.
물론 카르타고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의 의지였다.
또한 소년의 뜻대로 아틸라는 동료들과 힘을 합쳐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를 라일의 몸 안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다.
-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다. 나 ‘이단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낱 인간의 힘에……!
그러나 거끼까지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강력한 고위악마.
아틸라와 동료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를 갈기갈기 찢었음에도, 마계로 돌아가는 것까지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소년이 힘을 드러냈다.
당시의 아틸라는 알지 못했지만 소년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마계로 달아날 수 없도록 환술의 세계선을 조작했다.
그것은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에 소년의 마력이 강하게 개입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제서야 메피스토펠레스는 소년의 의중을 깨달았다.
붉은 눈의 귀공자는 처음부터 자신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샤를 아인하르트와 버서커 아틸라의 각성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그래. 결국 너도 이용당했다는 거냐. 메피스토펠레스.’
아틸라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정황은 파악했다.
이제 남은 건.
[ 보상이 주어집니다. ]
달콤한 보상의 시간.
[ 새로운 전투 스킬이 개방됩니다. ]
[ 도약(跳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