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다시 만난 소년
김도현은 오랜만에 말쑥한 옷을 차려입고 전신거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어젯밤 공들여 닦아 놓은 구두를 신고 현관문 앞에 섰다.
무료 연재 400회 만에 기적적으로 초 대박을 터뜨린 소설 패왕영웅전기.
연재 시작 후 일 년이 넘도록 최신화 조회수가 한 자릿수에 머무르던 소설이 어느 날 아침 다섯 자리 조회수로 늘어나 있던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기적이었다.
흡사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이 아니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기적.
그리고 오늘은 패영전의 게임화 계약을 체결하는 날이다.
야옹.
신발장까지 마중을 나온 고양이가 김도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힘든 시절, 길에서 다 죽어 가는 걸 발견해 키우게 된 녀석.
그래. 네가 있었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덜 외로울 수 있었겠지, 생각하며 김도현은 피식 웃었다.
자세를 낮춰 고양이의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올 때 맛있는 간식 사 올 테니.”
야옹, 앙증맞은 대답을 들으며 김도현은 집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
오늘따라 하늘은 더욱 화창해 보였고, 길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행복이 머무는 듯했다.
자신의 심리 상태에 따라 평소와 똑같은 풍경이 이렇듯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김도현은 사뭇 신비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김도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 중요한 날, 재수 없게 그런 개꿈을.’
김도현은 지난밤의 꿈을 떠올렸다.
너무도 현실처럼 생생해 지금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는 꿈.
그 속에서 김도현은 늘 지나는 낯익은 인도에서 맞은편 인도 위의 한 소년을 보고 있었다.
곱상한 얼굴과 아이답지 않게 조숙한 표정.
그것이 신경 쓰여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소년의 눈도 김도현을 바라봤다.
소년이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자신을 향해 반갑게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 고속으로 차도를 주행하던 커다란 트럭이 소년에게 들이닥쳤고, 김도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날려 소년을 구했다.
여기까진 딱히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꿈이었는데, 기분 나쁜 상황은 이후에 벌어졌다.
빌어먹을 꼬마가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별안간 괴수로 돌변해 자신을 습격한 것이다.
소년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입이 자신을 와그작와그작 씹어삼키는 그 실제 같은 감각을 되새기며 김도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신경 쓰지 말자.”
김도현은 훌훌 머리를 털어 내고 걸었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다.
계약을 마치는 대로 병원으로 달려가 이 기쁜 소식을 어머니께 전해드릴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김도현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과 얼마 전 대박을 터뜨렸다는 것, 그리고 전례 없이 좋은 조건으로 게임화 계약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김도현은 생각했다.
오늘은 어머니가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된 상태면 좋겠는데.
기분이 좋아진 김도현은 걷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잠시 후엔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주위 풍경을 질주하는 차창 밖 세상처럼 흐릿하게 만들었다.
밤도 아닌데 사방이 어두워졌다.
김도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어느새 검게 변한 풍경은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도시의 네모난 빌딩들이 아닌 무성한 초록빛 잎새와 나무, 들풀들이 보였다.
신기했다.
마치 사방을 돔처럼 채운 거대한 모니터 화면들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세공한 환술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오랜만이네요. 김도현 씨.”
그렇게 속삭이며 미소하는 상대를 향해 아틸라는 전력으로 달렸다.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야만전사야!”
바토리가 놀라 아틸라를 막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아틸라는 주위의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소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바토리는 자신의 마력과 체력을 깡그리 소모한 채였다.
동료들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았다.
크누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로 천둥벼락까지 시전하며 무리를 했고, 카스피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우웩우웩 구역질을 하고 있었으며, 펀치와 도롱뇽 역시 기진맥진한 얼굴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러던 중 환술 세계가 무너지자 그간 쌓인 피로가 일거에, 마치 해일처럼 그들을 습격한 것이다.
그건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몸에 쌓인 과부하로 말할 것 같으면 아틸라가 제일이었다.
환술 이동기를 너무 많이 사용했고, 거기에 더해 광폭의 권능을 발현하며 한계를 넘어선 힘을 소모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아틸라는 그런 것쯤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소년을 향해 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아틸라는 부웅 몸을 날렸다.
소년은 바닥에서 약 1미터 정도 몸을 띄우고 있었기에 그래야만 했다.
소년의 가슴을 향해 뻗어진 무휼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닥쳤고, 찌릿한 뇌전이 일었다.
그 충격으로 아틸라의 몸이 강하게 튕겨났다.
“크흐윽……! 크윽……!”
그러나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던 아틸라는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키며 재차 소년에게 돌진했다.
미소하는 소년의 눈동자에 서늘한 광채가 일었다.
그의 오른손에 마기가 일렁이며 검의 형태를 갖췄다.
“불같은 성질머리는 여전하네요. 김도현 씨.”
소년의 검이 무휼을 막아섰다.
아틸라의 검세는 강력했지만 평소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체력도 바닥났다.
지금 그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건 오직 눈앞의 상대를 향한 강렬한 증오였다.
아틸라는 계속해서 무휼을 뻗었다.
그러나 소년은 여유 있게 막았고, 그러는 사이에도 환술 세계는 끊임없이 붕괴를 이어 갔다.
“왜 이렇게 흥분한 건가요 김도현 씨. 지금 내게 이럴 시간은 없는데.”
그렇게 말한 소년의 왼손이 어딘가로 뻗어졌다.
잠시 후 자석에 끌린 쇳덩이처럼 메피스토펠레스의 조각 난 자아가 소년의 왼손에 틀어잡혔다.
저 작은 손으로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는 작아져 있었다.
- 너……. 붉은 눈의 귀공자…….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소년의 가슴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일렁댔다.
이어 톱날 같은 이빨을 지닌 거대한 아가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김도현의 꿈속에서 그를 씹어삼켰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너 이 새끼……!”
그것이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를 씹고 찢어발겼다.
조각 난 자아를 통해 섬뜩한 비명이 뿜어져 공간을 울렸고, 잠시 후 조용해졌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틸라를 보며 말했다.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거예요. 지금의 당신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자아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으니까요.”
“개소리 집어치우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해!”
“호오. 이제야 대화를 해볼 생각이 든 건가요?”
소년이 키득키득 웃으며 아틸라의 공격을 밀쳐 냈다.
“그건 그렇고 김도현 씨. 마침내 광폭의 권능을 습득했더군요.”
소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걸맞은 표현일까요? 정말로 당신은 새로운 권능을 ‘습득’한 걸까요?”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나……!”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라. 정말로 당신은 지구로 가고 싶은 건가요? 이유가 뭐죠?”
“미친 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당신은 지구가 당신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뭐라고?”
파캉! 소년의 검에 튕겨난 드라칼리온이 허공을 날아 지면에 박혔다.
“많은 힘을 잃긴 했지만, 저건 여전히 위험한 무기거든요.”
그 순간 아틸라는 어마어마한 중력이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는 것을 감각했다.
아틸라는 양 다리에 힘을 주며 그것을 버텼다.
“호오. 쓰러지지 않는 건가요. 역시 대단하군요 당신은.”
소년의 말대로 아틸라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의 양팔이 지면을 향해 떨구어졌다.
“의도치 않게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네요. 김도현 씨.”
그 순간 아틸라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소년의 뒤편, 부서지는 환술의 조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누군갈 발견했다.
아틸라는 소년을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너 이 씨발새끼……!”
“하하하. 정말 성질머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네요. 아니, 오히려 더 거칠어진 걸까요?”
환술의 조각은 이제 눈사태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틸라는 양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는 하체로 모여진 힘을 상체로 끌어올렸다.
무휼을 쥔 그의 팔이 소년에게 겨눠졌다.
소년도 이번만은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뭐야. 움직일 수 있다고요?”
무휼이 소년을 습격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강한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파캉! 그것을 막은 소년의 눈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겠군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이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복귀하기로 했으니까. 뭐, 중간계에 이 이상의 개입을 하는 것도…… 응?”
일그러졌던 소년의 눈에 당혹의 감정이 서렸다.
“이건…… 무슨.”
어디선가 나타난 드라칼리온이 소년의 덜미를 뚫고 비죽 목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소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눈을 뜨며 드라칼리온의 날을 소년의 목에 꽂아 넣은 아틸라의 마지막 동료가.
“당신은.”
소년의 몸에서 마기가 방출됐다.
그와 동시에 아틸라는 소년이 자신에게 걸어 놓은 주박이 완전히 풀린 것을 감각했다.
아틸라의 입에서 송곳니가 드러났다.
“피해! 오토!”
아틸라는 무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빠르게 몸을 빼는 오토와, 그를 향해 마기를 방출하려는 소년의 심장에 힘차게 무휼을 꽂아 넣었다.
부드득, 무휼에 관통된 소년의 몸이 아틸라와 함께 무너졌다.
소년의 입에서 검은 핏물이 흩어졌다.
소년을 배밑에 깔고 상체를 일으켜 세운 아틸라는 상대의 목에 꽂힌 드라칼리온을 잡아 뽑았다.
주먹을 들어 소년의 얼굴을 내려쳤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 바위를 내리치는 것처럼 단단했다.
한두 번 갈기는 걸로는 꿈쩍도 않을 듯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쉼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단단했던 소년의 얼굴이 점점 물렁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입에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크흑……! 쿨럭……! 컥……!”
동료들이 그런 아틸라의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봤다.
광폭화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아틸라가 저렇게까지 분노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코뼈가 무너지고, 안구 한쪽이 뭉그러졌으며, 고르게 자란 이도 박살이 나 지면에 흩어졌다.
피거품을 흘리는 소년의 목을 움켜쥐며 아틸라가 말했다.
“이제 말해 보시지. 내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