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메피스토펠레스 (1)
메피스토펠레스, 아니 라일이 웃었다.
그의 실눈이 벌어지며 날카로운 안광이 드러났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네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흐응. 인간의 탈을 쓴 뒤로 영 눈치가 없어진 줄 알았더니.”
“언제부터 의심하기 시작했지?”
“후마이야 왕국에서 처음 내 앞을 가로막았을 때부터.”
“호오. 이유는?”
“아틸라와 난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새벽녘에 은밀히 후마이야 왕실을 떠났다. 그런데 넌 우리 앞에 너무도 빨리 모습을 드러냈지. 마치 우리가 그 시각에 왕실을 떠날 것과, 이동 경로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작 그런 이유라. 그리 흔치는 않겠지만 탐지 능력이 발달한 마법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텐데.”
“나 역시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넌 우리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더구나. 그뿐 아니라 너와 동행하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악귀들이 출현했지.”
“속 보이는 행동이었나?”
“어린아이라도 알겠더구나.”
라일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바토리의 눈빛이 변했다.
“게다가 넌 아틸라의 몸에서 발하는 특별한 기운을 알아봤다. 심지어 그 내용을 보란 듯이 내 귀에 흘리기까지 했지.”
바토리는 모닥불 앞에서 말고기를 먹으며 라일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난 기상전에서 아틸라, 너를 만났다. 그리고 의심했다. 네가 지닌 불가사의한 힘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니까.’
‘마치, 마기(魔氣)처럼.’
“나는 궁금했다. 그 말을 했을 때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
“반응은 흥미로웠더냐.”
“네 몸에서 피어나는 살기가 가시처럼 날카롭더군.”
라일은 그날의 대화가 정말 재밌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바토리는 눈앞의 상대가 악마가 아닌, ‘진짜’ 인간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변했구나. 메피스토펠레스.”
“부정하지 않겠다. 인간이 되고 나니 많은 것이 변하더군.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바토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인간이 된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틸라의 손에 리베르가 구슬이 되고, 그 여파로 강제로 인간이 된 뒤 그녀는 무력감에 빠졌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관조자였을 때 지녔던 강대한 마력을 잃었지만, 또한 그녀는 관조자가 되며 잃었던 인간의 많은 감각을 되찾았다.
그녀는 그 감각을 사랑했다.
눈부신 태양.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흔들리는 풀잎.
모닥불에서 느껴지는 온기.
밤하늘의 별무리.
그리고.
‘그 아래서 빛나는 검은 눈.’
“불멸의 삶을 살던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대악마가 된다는 염원을 뒤로한 채 한낱 인간의 삶을 택하다니. 네 심경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이더냐.”
“그것이 궁금한가.”
“그래. 궁금하구나.”
라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허공을 바라봤다.
“질려 버렸거든. 허울 좋은 불멸의 삶에.”
“질려?”
“나는 원래 중간계의 힘을 손에 넣어 대악마의 간섭에서 벗어나길 원했지. 그러던 어느 순간 깨달은 거다. 설령 내가 대악마와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힘을 얻는다 해도 염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게 무슨 소리지?”
“대악마 역시도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은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흐응. 아포스톨로스의 존재를 말하고 싶은 것이더냐.”
“스스로를 ‘신과 악마의 관찰자’라 칭하는 그들이 있는 이상, 내 염원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
“인간의 삶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이더냐.”
“그렇다. 나는 알아 버렸거든. 나의 ‘또 다른 자아’를 통해.”
“……뭐라?”
“알고 싶은가. 바토리 에르제베트.”
라일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사건은 야만전사 아틸라가 일리시아의 환술을 깨뜨린 직후 벌어졌다.”
일리시아의 환술.
그것은 본래 ‘망자의 저주’에 걸린 일리시아가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을 역이용해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망자의 저주가 일리시아의 생기를 앗아 가는 대신, 역으로 그녀에게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을 선사했기 때문.
일리시아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마력과 자신의 마력을 융합하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발키리의 힘을 지키기 위한 환술 결계가 생성됐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우연이 발생했다.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나의 ‘또 다른 자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내 환술에 빠진 일리시아가 그것을 비틀어 또 다른 환술을 생성했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탄생한 나의 새로운 자아는 환술 속에 침투한 너희를 발견했고 바토리 에르제베트, 네 정신세계에 침투해 오르피나의 힘을 갈취하려 했다.”
“아틸라 덕분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네 말대로 아틸라는 일리시아의 환술을 깨뜨렸다. 그 와중에 넌 과거의 일리시아가 그랬듯 내 힘의 일부를 흡수했지.”
“그것이 네가 나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적확한 인과가 되었을 테고 말이다.”
라일은 엷은 미소를 띠는 것으로 긍정의 뜻을 표현했다.
“일리시아의 환술이 깨지는 바람에 나의 또 다른 자아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본체로 돌아왔지.”
바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그 ‘또 다른 자아’를 흡수했다는 말이더냐.”
“그렇다. 녀석의 회귀 본능은 본체인 나를 찾아냈다. 그렇게 흡수된 자아는 나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 나는 느꼈다. 야만전사 아틸라와 필멸자가 된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리고 풋내기에 불과하던 서리나무의 어린 엘프가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수많은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고, 고통받고, 성장하는 모습을.”
라일은 감격한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보았다. 한낱 주신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여겨지던 필멸자들이 지닌 강력한 ‘자유의지’를. 그리고 깨달았다. 하찮은 불멸 따위에 기대는 것이 아닌, ‘자아(自我)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주신과 대악마, 아포스톨로스, 그들 모두는 나와 같은 존재의 자유를 억압하고 갈취했다. 난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틸라의 강인한 의지 속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것이 정녕 불멸의 삶을 버리면서까지 취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더냐.”
“난 불멸을 원한 적이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였을 뿐.”
“라일의 몸은 언제 빼앗은 것이더냐.”
“라일 플라마는 원래 죽을 운명이었다. 녀석은 적마탑의 명령으로 마귀를 조사하던 중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 그 탓에 녀석의 의지는 크게 약해졌고, 그래서 내가 놈의 몸에 빙의해 그곳을 탈출했다. 결국 난 녀석을 죽을 운명에서 구해 준 셈이지.”
“인간의 육체는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더냐. 지금의 네 모습은 평범한 빙의처럼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 역시 아틸라가 일리시아의 환술을 깨뜨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곳에서 탄생한 내 새로운 자아는 아틸라가 지닌 특별한 힘과 접촉했고, 공명했다. 그 힘이 다시 나에게로 융합됐지. 난 이전보다 더욱 깊이 있게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이라는 종(種)과 친밀해졌다. 물론 아틸라의 힘이 나의 자아를 변화시켰다는 것을 당시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일의 몸으로 너와 아틸라를 추격했다. 인간의 그릇에 담긴 채로 너희와 동료가 되어 본다면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더냐.”
“믿지 못하겠지만 난 너희와의 짧은 여정 동안, 진심으로 너희를 동료라 생각했다.”
“흐응. 믿지 못하겠구나.”
“지금의 난 아틸라가 지닌 이능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다. 녀석은 다름 아닌 내 환술 속 세계선을 붕괴시킨 당사자니까 말이야. 그래.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납득이 가더군. 녀석이 어떻게 내 자아와 공명하고, 또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결국 자유로운 삶을 위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더냐.”
“그렇다.”
“역시 ‘이단(異端)의 악마’라 불리는 존재 다운 발상이로구나. 그래. 넌 그렇게도 늘 자유롭기를 갈망했다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군.”
“내게 그것에 대해 알려 준 존재가 있었다.”
바토리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틸라와 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지닌.
자신에게 잊지 못할 기억과 의지를 심어 주었던 특별한 존재를.
또한 바토리는 알고 있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아인하르트 왕국이란 거대한 공간 위에 환술을 부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또 부추긴 자.
‘붉은 눈의 귀공자’에 대해.
“아인하르트 왕국에 환술을 부여한 건 무엇 때문이더냐.”
“이쯤 되면 너도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 인간이 된 너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었던 게지. 그러나 바뀌어 버린 네 야망 속에서 파우스트는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했을 테고, 그래서 넌 아틸라와 샤를 아인하르트의 힘을 이용해 파우스트를 말살하려 했다.”
“과연. 훌륭한 추리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오르피나의 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 힘이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새롭게 태어난 나의 왕국이 그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어리석구나. 붉은 눈의 귀공자가 그리 말한 것이더냐.”
라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러고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말을 받았다.
“어떻게 아직까지 나의 환술을 견딜 수 있는 거지?”
라일은 그것이 정말로 궁금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인간이 되며 많은 힘을 잃었다.
물론 자신 역시 인간의 몸을 사용하며 고위악마였을 때 지녔던 마력을 상당 부분 잃었지만, 바토리를 환술에 빠뜨려 왼팔의 마력을 갈취할 정도는 충분하다 여겼다.
오르피나의 마력은 강제로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
환술의 힘을 통해 그녀 스스로 내주도록 해야 한다.
‘파멸의 신 오르피나가 스스로의 의지로 바토리에게 힘을 넘겨주었듯이.’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오래전, 강대한 힘을 지닌 어느 악마의 힘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뭐라고?”
“그리고 그 힘이 네가 지닌 환술에 강한 억제제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던 나는, 다시금 그 힘을 조우했을 때 품에 갈무리해 두었지.”
바토리의 품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졌다.
그러고는 형태를 드러냈다.
그것은 고서(古書)였다.
테헤누트 하토르에게 금기의 지식을 전하고, 또한 그녀를 악귀로 변모시키려 했던 악마의 고서.
‘그건 뭐 하러 들고 왔냐.’
‘조금 살펴본 뒤 파기할 셈이니 염려 말거라. 그리고 이게 사라져야 테헤누트가 기억을 되찾지 못할 게 아니겠느냐.’
라일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것은……!”
그러나 잠시였고, 라일은 원래의 여유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손이 고서를 향해 뻗어졌다.
“꽁꽁 숨겨 두어도 모자랄 그 힘을 그리도 쉽게 내 눈앞에 보이다니. 어리석군 바토리 에르제베트. 저항은 이제 포기한 것인가.”
“아니니라. 다만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게 되었구나.”
바토리의 입술 끝이 길게 찢어졌다.
그 모습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라일은 이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자의 기척을 감지했다.
“서, 설마!”
우드득!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어이 라일. 내가 전에 말했었지.”
살기 어린 미소를 드러낸 야만전사의 검은 눈이 라일을 노려봤다.
“모가지 조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