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버서커 (6)
아기의 울음소리에 카스피는 눈을 떴다.
‘……뭐지.’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매우 작아졌다는 것을 감각했다.
‘왜.’
입을 열자 응애응애, 아기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다.
그녀는 갓난아기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기억을 더듬은 끝에 카스피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키클롭스의 감옥에 있었다는 것과, 그곳을 탈출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빛이 시야를 장악했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환술? 메피스토펠레스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피는 자그만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끌어안은 자를 바라봤다.
그는 다급히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그 탓에 카스피의 몸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그래서 아직 발달하지 않은 아기의 시야는 상대의 얼굴을 또렷이 감별하지 못했다.
다만 낯익은 냄새가 났다.
상냥하고, 또 온화한.
그러던 중 상대의 얼굴이 카스피를 내려 봤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카스피의 눈에 떨어졌고, 그녀의 시야를 부옇게 만들었다.
* * *
부연 시야 속에서 카스피는 두통을 느꼈다.
그녀는 지면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뭐야. 이건 또.’
강렬한 통증이 그녀의 정신을 깨우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을 반추했다.
그래.
난 거대화한 펀치를 타고 데스나이트에게 달려갔고.
녀석의 검을 피하고.
또 소멸로 등 뒤를 잡아……
‘아니. 그전에.’
그러니까 펀치의 등을 짓밟고 도약하기 바로 직전에, 하늘을 향해 연막술을 펼쳤었다.
가능할 거란 확신은 없었다.
하싸씬의 연막술은 고효율의 스킬인 만큼 준비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까.
하지만.
‘될지도 몰라.’
카스피는 일말의 가능성에 걸기로 했다.
‘나는 아틸라를 구해야 해.’
카스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무서운 경험을 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공포를 재생산하며 확장하고 있었고, 카스피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자신을 그곳에서 꺼내 준 게 아틸라였다.
‘이번에는 내가 구해야 해. 아틸라를.’
가능성은 있다.
그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빠른 이동기를 펼치며 싸우는 아틸라를 보며 자신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줄곧 생각해 왔다.
그리고.
- 그렇지만 궁금하군. 어떤 힘이 메피스토펠레스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세계선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단 말인가.
카르타고가 내뱉은 이 말은 그녀의 머릿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덧붙였다.
그래서 그녀는 도롱뇽에게 외쳤다.
‘도롱뇽! 너 지금 변신해 봐! 얼마 전에 크게 변신했다고 자랑했었잖아!’
‘하, 하지만 살쾡이 미물! 그건 메피스토펠레스의 세계선이……!’
‘바보야! 방금 저 데스나이트가 말했잖아! 세계선의 경계가 무너졌다고!’
그 순간 카르타고의 오러에 적중당한 샤를이 뒤로 날아갔고.
아틸라 역시 비슷한 공격에 당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야, 야만 미무우우울!’
그것을 발견한 도롱뇽이 저도 모르게 날개를 뽑아내고 몸을 부풀리며 아틸라에게 날아갔다.
그것으로 카스피의 가정은 확신이 되었다.
‘펀치!’
카스피는 조금 전 도롱뇽에게 한 것처럼 펀치를 독촉해 거대화시킨 뒤,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도롱뇽이 저 괴물 같은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는 동안 그곳으로 달리며 하늘에 연막술을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저, 정말로 됐어!’
이어 카스피는 하얗게 변한 하늘 위로 사슬낫의 머리를 집어던졌다.
- 여기까지로군.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즈음 도롱뇽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틸라의 어깨로 떨어졌고, 카르타고의 검날이 카스피를 발견했다.
- 귀살의 일족.
카스피는 날아드는 오러 공격을 도약으로 피했다.
그 사이 펀치가 아틸라의 덜미를 덥석 물었고, 재차 날아오는 오러 공격을 카스피는 소멸로 회피했다.
상대의 등 뒤를 잡은 카스피의 단검이 카르타고를 습격했다.
그러나 상대는 보기 좋게 그것을 피했다.
- 너는 불필요한 존재다. 지금 죽여 두는 편이 좋겠군.
하지만 카스피에겐 최후의 일격이 남아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달려 펀치! 반드시 아틸라를 구하는 거야!”
고속으로 회전하는 카스피의 신형이 연막의 하늘로 던져놓았던 사슬낫을 회수했다.
단두대처럼 추락한 그것이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강타했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카스피의 몸이 지면에 박혔다.
- 과연 귀살의 일족이로군.
머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을 견디며 카스피는 고개를 들었다.
두 발로 지면을 디디고 선 데스나이트가 그곳에 있었다.
“피했…… 다고……?”
카르타고의 투구에선 공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카스피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등 깊숙이 사슬낫이 박혀 쓰러진 유령마가 보였다.
그랬다.
상대의 투구를 가격했다 여긴 건 카스피의 착각이었다.
카르타고는 그 상황에서도 놀라운 민첩성을 발휘해 빙글 몸을 회전시키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와중에 곡예하듯 카스피의 후두부를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슬낫은 카르타고를 가격하지 못했다.
단지 그의 유령마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카르타고의 손짓에 유령마는 모래알처럼 부서져 지면으로 흡수됐다.
위험하다.
카스피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손상된 뇌는 그녀의 몸이 똑바로 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다리가 풀린 카스피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생각지도 못한 카스피의 존재를 보며 그녀의 성장 가능성을 탐지했다.
명계에서 돌아온 카르타고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다.
베일에 싸인 실력자인 하싸씬의 단주.
먼 옛날 사라졌다고 여겨지던 귀살의 일족.
그들의 힘을 이어받은, 그리고 그들보다 강하게 성장할지 모를 그녀의 존재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더불어 카르타고에겐 달갑지 않은 변수였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승천의 잠재력을 지닌 이는 버서커 아틸라와 샤를 아인하르트, 둘이면 충분하니까.
카르타고의 검이 카스피에게 겨눠졌다.
그때였다.
시이이이잇!
등 뒤를 습격하는 섬뜩한 살기에 카르타고는 뒤를 돌았다.
그의 안광이 가늘게 좁혀졌다.
- 벌써 깨어난 것인가. 버서커 아틸라.
카르타고의 눈이 자신에게 질주하는 아틸라와, 그의 손에 쥐여진 흑빛 광채의 검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검.
- 그 검은.
멀리서 도롱뇽이 소리쳤다.
“그, 그건 내 어금니로 만든 엄청난 보물이다 야만 미무우우울! 원래는 내 힘을 되찾는 데 쓰려고 했지만! 크흑……!”
카르타고는 깨달았다.
들어본 적이 있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자신의 어금니를 재료 삼아 만들어 낸 전설의 검.
카르타고의 안광이 거칠게 흔들렸다.
- 드라칼리온(Drakallion)!
“단숨에 베어 버려! 야만 미무우우우울!”
짐승처럼 악다문 아틸라의 입모양이 변했다.
입꼬리가 위로 솟으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분수처럼 피가 치솟는 양팔과 양손이 드라칼리온의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한줌 남아 있던 그의 이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서 할망구가 도롱뇽을 구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였던 거로군.
- 버서커 아틸라!
흔들리는 카르타고의 푸른 안광에 흑빛이 덧씌워졌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내뿜었던 흑염의 브레스.
그것과 동일한 빛을 발하며 드라칼리온이 쏘아졌다.
퍼어어어엉!
휘둘린 검날이 눈앞의 것을 절단했다.
그러나 아틸라의 시야는 카르타고를 찾지 못했다.
아틸라의 이마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지면으로 쓰러졌다.
그런 아틸라의 뒤편에 카르타고가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길게 가른 상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은 오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발밑의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옆에 떨어진 전설의 검 드라칼리온에서 멈췄다.
검은 아틸라의 손에 쥐여 있을 때보다 작아져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카르타고는 시선을 돌려 저만치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샤를과, 이쪽을 바라보는 여러 생존자들의 떨리는 눈빛을 바라봤다.
이어 소멸한 데스나이트들의 자취를 좇던 그의 흉부가 쩌억 반으로 쪼개졌고, 검은 가루로 화해 지면으로 흩어졌다.
* * *
“파우스트 녀석들이 모두 당한 것 같군.”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는 사내.
그가 이어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놈’의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가더니.”
“그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간 건 그들만이 아니지 않느냐.”
사내의 눈이 목소리를 좇았다.
짙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곳엔 검은 사슬에 포박돼 허공에 매달린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비소를 머금었다.
“메피스토펠레스.”
사내의 목소리도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이제 그만 이것을 풀어 주는 게 어떻겠느냐.”
바토리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속박한 검은 사슬을 가리켰다.
“아틸라가 발현한 힘은 네가 만든 환술의 세계선을 무너뜨렸다. 게다가 부활한 카르타고마저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지.”
“긍정한다. 야만전사 아틸라는 예상치 못한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란 것은 바토리 에르제베트,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아틸라가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버서커의 힘은 강력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이 역시도 먼 옛날 카르타고를 관조했던 너라면 잘 알고 있을 터.”
바토리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직까지 생생했다.
사르데니야 왕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바토리의 염원.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오랜 세월 대륙을 관조하며 승천자의 자질을 지닌 자를 찾았다.
그렇게 발견한 것이 바로 카르타고.
그러나 신과 악마는 최초의 승천자가 될지 모를 인간 전사를 경계했고, 그것이 자신의 계획에 큰 차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메피스토펠레스가 칼을 뽑았다.
그는 강력한 환술을 이용해 카르타고를 함정에 빠뜨렸다.
그것을 깨달은 바토리와 리베르가 카르타고의 자취를 찾아냈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카르타고는 죽었다.
그 과정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상당한 힘을 소비했고, 파우스트 역시 엘프들과의 전면전을 병행하던 시기였기에 많은 힘을 소비했다.
그래서 그들은 격노한 바토리의 습격을 막지 못했다.
바토리는 파우스트를 괴멸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파우스트의 관조자들이 그녀가 쏘아 낸 마멸의 칼날에 구슬로 화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카르타고는 결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바토리는 아틸라를 만났다.
“야만전사 아틸라는 이곳을 찾을 수 없다. 이곳은 내가 만든 환술 세계의 중심부. 게다가 네 시공추적의 반지는 내 손안에 들어왔다.”
사내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붉은 보석의 반지를 바라봤다.
“반지의 마력은 차단되었다.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오르피나의 힘을 넘기는 것이 어떤가. 바토리 에르제베트.”
“한낱 인간의 몸으로 신의 마력을 감당할 셈이더냐.”
“너 역시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내의 입술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가 보아도 미남자라 여겨질 만한 그의 곱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
“나는 원래 신이었지.”
“허나 지금은 보잘것없는 인간의 몸이 되었고 말이야.”
“내 스스로의 의지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메피스토펠레스라 불러 줄 이유도 없겠구나. 그렇지 않느냐 라일 플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