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죽일 수 없는 괴물
‘뭐?’
아틸라는 다시금 메시지를 확인했다.
[ 북쪽의 괴물은 죽일 수 없습니다. ]
고개를 갸웃했다.
임무 내용은 괴물을 쓰러뜨리라는 것인데 죽일 수는 없다니.
‘불사체라는 뜻인가? 관조자나 언데드처럼?’
하지만 이상했다.
그렇다면 관조자나 언데드를 처리하라는 이전 임무에서도 저 메시지가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아틸라는 생각했다.
관조자, 그리고 언데드.
그들 모두는 불완전한 불사체다.
실제로 아틸라는 그동안 관조자를 포함한 수많은 언데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까.
‘이번의 적은 완전한 불사체라는 뜻인가? 신(神)처럼?’
그러나 그것에도 오류는 있다.
신과, 그리고 신과 동등한 존재인 대악마와 고위악마조차 죽을 수 있다.
실제로 주신 전쟁과 악마 전쟁에서도 많은 신과 악마가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설마 신보다도 월등한 존재는 아닐 테고.’
생각을 털어 낸 아틸라는 피핀을 찾았다.
피핀은 자신의 검을 바닥에 꽂은 채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녹초가 된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피핀에게 다가간 아틸라가 투구를 벗었다.
“……아틸라.”
“발키리들은 파우스트를 완전히 멸할 때까지 아인하르트와 함께 싸울 거다.”
참전을 결정했을 때부터 정해 둔 일이었다.
피핀은 놀란 얼굴로 슈시아를 돌아봤다.
슈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인가……?”
“엘프들이 우리와 함께 싸운다고?”
병사들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불사의 언데드들과 싸움을 이어 가며 그들의 육체와 정신은 한계에 부딪쳐 있었다.
그러던 중 언데드 상대에 특화된 것으로 보이는 저 가공할 실력의 엘프들이 자신들을 도와 싸우겠다니.
새로운 활력이 병사들 사이에서 번졌다.
그제서야 그들은 승리가 실감 나는 모양이었다.
“그, 그래. 우리가 이겼어!”
“아인하르트가 승리했다!”
“피핀 대장군 만세!”
“우와아아아아!”
때마침 얼마간의 체력을 회복한 제롬이 말을 달려왔다.
아틸라의 얼굴을 확인한 제롬의 눈동자에 경악이 맺혔다.
“아틸라……!”
병사들은 피핀에 이어 제롬, 그리고 흑기사와 발키리들에게도 아낌없는 찬사를 퍼부었다.
슈시아를 포함한 발키리들은 그 어색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소란이 잦아들 때쯤 아틸라가 말했다.
“북쪽의 괴물에 대해 설명해 봐라, 피핀.”
피핀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기사와 병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자리엔 아틸라와 피핀, 제롬만이 남았다.
“아틸라. 네 목적은 무엇인가.”
“목적?”
“설마 이제 와서 샤를을 돕기라도 할 셈인가.”
“글쎄.”
“목적을 똑바로 밝혀라. 넌 샤를의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적도 아군도 아닌 것 같군.”
“네가 노르드에서 그런 일을 벌였음에도 샤를은 여전히 널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
“녀석의 생각 따위 관심 없다. 북쪽의 괴물에 대해서나 설명해라. 제롬, 네가 해 보든지.”
그러나 제롬은 아는 것이 없었다.
피핀이 한층 날을 세우며 으르렁댔다.
“목적을 밝혀라 아틸라. 넌 샤를을 도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위해를 가하려는 것인가!”
언성을 높인 피핀이 쿨럭쿨럭 핏물을 뱉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보던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지금의 난 샤를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난 샤를을 돕는다. 북쪽의 괴물이라는 놈을 쓰러뜨리고, 이참에 파우스트의 잔당들까지 모조리 처치할 생각이다.”
“그 말이 사실인가. 아틸라.”
“그래.”
피핀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아틸라를 노려봤다.
잠시 후 거친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북쪽 전선에 등장한 괴물은.”
그의 눈이 칼날처럼 빛났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다.”
* * *
“나도 함께 갈래 아틸라. 바토리와 영주 나리를 구할 거야.”
“나 역시 그렇네. 자네는 아르게스의 봉인이 풀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황금바위산의 재앙을 막았지. 이젠 내가 도움을 줄 차례네.”
물론 아틸라는 그럴 생각이었다.
“몸 상태는 어때. 싸울 수 있겠나.”
“물론이지! 아주 쌩쌩하다고!”
“드워프의 체력을 우습게 보는 겐가. 체력이 완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네.”
슈시아가 다가왔다.
“아틸라.”
슈시아를 처음 본 카스피가 은근슬쩍 그녀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러고는 아틸라 곁에 바짝 다가섰다.
아틸라가 슈시아를 바라봤다.
“슈시아.”
“엿들으려던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다. 북쪽에 데스나이트가 출현했다는.”
엘프는 시력뿐 아니라 청력도 인간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데스나이트의 강력함은 엘프들 역시 잘 알고 있다.
물론 이 자리의 엘프들은 데스나이트를 직접 경험하진 못했겠지만.
“그래.”
“내가 도움이 되고 싶군.”
아틸라는 고민했다.
슈시아가 지닌 발키리의 마력은 언데드를 상대할 때 무엇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상대는 데스나이트.
‘슈시아의 힘은 분명 도움이 된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
‘죽음의 기사’, 혹은 ‘사령기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그들은 리치(Lich)와 함께, 한때는 패영전의 지성 종족이었던 자가 타락해 만들어질 수 있는 언데드 중 가장 강력한 종이다.
물론 리치와 데스나이트의 힘은 개체별 차이가 크다.
생전에 얼마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와, 언데드로 변하며 얼마큼의 힘을 추가 획득했는지에 따라 지닐 수 있는 힘이 구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할리가 녹마탑의 마법사들을 되살려 만든 리치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그들이 패영전 역사에서 그렇게까지 강력한 마법사가 아닌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할리가 그들을 급조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언데드는 사령술사의 능력과, 그들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는 힘을 갖게 되니까.’
그러나 지금 북쪽에 출현했다는 데스나이트는 보통내기가 아닌 듯했다.
피핀의 간략한 설명을 통해서도 그랬고, 임무창에서도 드러났다시피.
[ 샤를 아인하르트와 함께 북쪽의 괴물을 쓰러뜨리십시오. ]
‘샤를과 함께’라는 단서가 더욱 그 생각을 단정 짓게 만들었다.
둘이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만큼 강한 상대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의아한 점은 원작에서의 파우스트는 데스나이트를 만들어 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데스나이트는 리치보다 만드는 방법이 까다롭지.’
고민하던 아틸라는 슈시아를 바라봤다.
“슈시아. 넌 발키리들을 이끌어야 한다.”
“교관급의 발키리가 넷이다. 내가 없어도 발키리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아. 게다가 오늘의 전투로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수많은 구울을 사냥하며 발키리들은 다시금 몇 단계씩 레벨업을 했다.
슈시아도 레벨이 올랐다.
잠시 슈시아를 응시하던 아틸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안 되겠군 슈시아.”
“뭐라고?”
“이곳에 남아라.”
“이유를 알고 싶군.”
“아무래도 난 서둘러 가야 할 것 같다.”
슈시아의 얼굴에 불쾌함이 어렸다.
“그날의 내기에 대해 말할 셈인가.”
이전에 아틸라와 슈시아는 노움 연금술사 파울루를 찾으러 가는 길에 승마술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유목민의 승마술’을 탑재한 아틸라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내기에 진 슈시아는 벌칙으로 일행을 떠날 때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난 이전보다 승마술이 나아졌다. 더 이상 네 말을 쫓지 못하는 일은 없을걸. 나보단 오히려 저 드워프가 발목을 잡지 않을까 주의해야 할 거다.”
크누트의 눈썹이 꿈틀대며 슈시아를 노려봤지만, 슈시아는 그저 오만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아틸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냐.”
동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나는 말을 타고 이동하지 않아. 그보다 빠르게 갈 거다.”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서 의지를 발현해 빠른 이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아틸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술에 빠진 동료들과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
그건 서리나무숲을 찾으려는 길에 펀치와 도롱뇽을 데리고 이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증명됐다.
‘펀치와 도롱뇽이 가능하다면 카스피와 크누트도 될 거다.’
그러나 슈시아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에 있지 않다.
아틸라는 이곳으로 오기 전 슈시아 모르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이 있었고, 실패했다.
‘문제는 북쪽의 전장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는 것과, 특정했다 한들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
아틸라는 아인하르트 왕국의 모든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여러 차례 이동을 하자니 부작용이 마음에 걸렸다.
‘이동술을 펼칠 때마다 영 컨디션이 좋지 않단 말이지. 머리도 어지럽고. 시야도 흐릿해지고.’
그래서 아틸라는 피핀에게 들은 위치와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이동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도 말을 타는 것보단 빠를 것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니. 정확한 설명을 해 주었으면 좋겠군. 아니면 내가 지닌 발키리의 힘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가.”
“아니. 네 힘은 도움이 될 거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렇다면 왜.”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군. 아까도 말했듯 빠른 이동을 위해서다. 내가 떠나고 나면 너도 이해할 수 있겠지.”
아틸라의 눈짓에 도롱뇽을 입에 문 펀치가 아틸라의 어깨로 뛰어올랐다.
아틸라는 카스피와 크누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카스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크누트는 당황한 얼굴로 헛기침을 해댔다.
슈시아를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미안하군 슈시아. 하지만 널 데려가지 못하는 건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아쉬운 일이라고.”
“말장난을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나를……!”
발끈하던 슈시아가 말을 멈췄다.
“……뭐야 이건. 또야?”
상황을 파악한 슈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뱉었다.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 * *
샤를은 쉼 없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금사자의 제3기사단이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제3기사단장 앙드레가 말했다.
“이제 멀지 않은 듯합니다. 폐하.”
“그런 것 같군.”
샤를의 눈빛이 변했다.
북쪽 전선에 등장한 데스나이트.
녀석은 단신으로 금사자의 기사단 하나를 괴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사의 말을 따르자면, 놈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샤를은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견했다.
“폐, 폐하!”
“저것은……!”
시체의 산이 보였다.
그곳의 정상에 우뚝 선 유령마와, 그 위에 올라탄 검붉은 갑주의 전사.
“저, 저자가 바로……!”
“데스나이트!”
달빛을 등진 전사의 몸은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그가 착용한 검붉은빛의 갑주와 투구 너머로 보이는 적색 머리칼, 그리고 전신에서 발산하는 흑빛 오러는 새벽에 가까워지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존재가 말했다.
- 그대가 샤를 아인하르트인가.
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 음성 때문이 아니다.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데스나이트는 한 번도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검을 뽑아 겨누며 샤를이 말했다.
“아인하르트 왕국의 군주, 샤를 아인하르트다. 정체를 밝혀라.”
검붉은 투구 속에서 푸른 안광이 번득였다.
- 나의 이름은.
이어진 그의 말에 샤를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 버서커(Berserker) 카르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