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서리거인 (3)
아틸라는 투구를 내팽개쳤다.
내지른 흑철검이 예티의 귀에 박혔다.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손이 아틸라의 몸을 붙잡아 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와중에도 아틸라는 예티의 목에 박혀 있던 방패를 쥐었고, 그것을 이용해 낙하의 충격을 완화했다.
아틸라가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예티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늑대처럼 포효하며 방패를 뻗었다.
퍼엉!
비명을 지르며 한 걸음 물러선 건 예티 쪽이었다.
눈에 띄는 상처가 없는 아틸라에 비해 예티의 몸은 수많은 마력 화살에 관통됐고, 목과 발목에도 치명상을 입었다.
“화, 화살을 매겨라!”
교관 발키리의 명령에 어린 발키리들이 활을 겨누었다.
그러나 쏠 수 없었다.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 일변도로 나선 아틸라의 움직임은 대단히 빨랐고, 어린 발키리들은 그런 아틸라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예티만을 공격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하지 못했다.
아틸라가 들짐승처럼 자세를 낮췄다.
그러고는 기습적으로 예티의 발목에 박힌 무휼을 손에 쥐었다.
그동안 쌓인 성력을 개방한 무휼의 날이 눈부신 빛을 뿜었다.
아틸라는 무휼의 형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절삭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의 팔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악다문 어금니에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투트트틋……!
무휼의 날이 예티의 질긴 가죽과, 강인한 근육과, 단단한 뼈를 부쉈다.
절단된 예티의 발목이 하늘로 솟았다.
방어구관통, 향상된 공격력과 무기 숙련도, 도롱뇽의 강인한 송곳니, 그리고 축성의 인장으로 쌓인 성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티의 몸이 기울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무휼이 맞은편 다리를 공격했다.
퍼걱! 종아리에 무휼이 틀어박힌 예티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한 번에 절단되진 못했고, 그래서 아틸라는 양손으로 무휼의 칼자루를 쥔 채 온 힘을 다해 예티의 뼈와 근육을 공격했다.
예티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의 두 주먹이 머리 위로 들어 올려졌다.
양손으로 무휼을 쥔 아틸라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방어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믿었다.
“쏴라!”
38인의 발키리가 쏘아 낸 마력 화살이 예티의 가슴과, 양팔에 무더기로 박혔다.
놈의 주먹이 아틸라를 공격하는 대신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심장을 가렸다.
그 사이 아틸라는 목적을 달성했다.
뿌드드드득……!
예티의 종아리가 절단됐다.
이제 놈은 기동성을 잃었다.
아틸라는 남은 체력을 확인했다.
자신의 가정을 확신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틸라!”
크게 원을 그리며 예티를 몰고 온 슈시아가 지척에 있었다.
핏물 가득한 아틸라의 입가가 짐승의 미소를 그렸다.
오른손엔 흑철검, 왼손엔 무휼을 들고 슈시아의 예티를 향해 돌격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아틸라의 몸을 스친 슈시아가 빙글 돌아 활시위를 당겼다.
흑철검과 무휼, 그리고 슈시아의 손끝에서 쏘아진 다섯 발의 화살이 성난 예티의 심장을 관통했다.
* * *
서리나무의 발키리들은 시체가 되어 널브러진 두 마리 예티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 정말로 우리가 예티를 잡았어.”
슈시아의 지휘는 대단했다.
심지어 중간에 튀어나온 예티를 단독으로 맡아 상대했던 그녀의 신기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 못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발키리들은 아틸라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코 예티를 잡아내지 못했을 거란 진실을 인정했다.
자신들이 큰 위험 없이 예티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건, 아틸라가 두 마리 예티의 무자비한 공격을 한 몸에 받아 냈기 때문이니까.
‘저자가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시뻘건 핏물을 뒤집어쓴 아틸라의 얼굴.
그 사이로 드러난 파릇한 흰자위와 검은 눈.
야수 같은 송곳니.
“후우…….”
아틸라는 바닥의 눈덩이를 손에 들어 얼굴을 닦았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선 별다른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레벨업이군.’
펀치와 도롱뇽도 몇 단계씩 레벨업했다.
그 정도로 예티는 강력한 적이었고, 상당한 경험치를 제공했다.
아울러 레벨업을 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몸이 개운한데?”
“나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슈시아를 포함한 모든 발키리들이 레벨업을 했다.
기여도에 따라 얻는 경험치는 달랐지만, 어린 발키리들은 대부분 펀치와 도롱뇽처럼 몇 단계의 레벨업을 했다.
그들은 자신이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는 것을 감각했다.
그러고는 지금의 모든 상황을 예견했던 아틸라와 슈시아를 다시 한번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다.
‘슈시아 님의 말이 맞았어.’
‘전사 아틸라는 함께 싸우는 동료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대단하군 아틸라.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도 괴물이었는데, 그때보다 더욱 강해지다니.”
슈시아의 말에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어도 네 성장은 못 따라갈 것 같은데.”
말도 안 된다며 슈시아가 웃었지만 아틸라는 진심이었다.
오늘의 슈시아는 아틸라의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아틸라는, 두 번째 예티를 몰고 오던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에서 낯익은 감각을 포착했다.
얼마 전, 오토에게서 느꼈던 것과 동류의 것.
‘슈시아는 영웅의 면모를 개화하고 있다.’
아틸라는 직감했다.
지금의 슈시아라면, 머지않아 타리엘을 뛰어넘는 위대한 전사가 될 것이다.
* * *
예티의 목을 들고 돌아온 아틸라와 발키리들은 서리나무 엘프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서리나무의 발키리는 완전하게 부활했다!”
“위대한 서리나무 발키리의 수장, 슈시아 세이나자르!”
“무적의 인간 전사 아틸라!”
“우와아아아!”
발키리들이 파우스트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동안 아틸라는 서리왕을 찾았다.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군요 아틸라.”
“그렇소.”
아이리스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의 몸엔 사악한 환술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메피스토펠레스의 마술이겠지요.”
“그것만이 아니오.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은 ‘아인하르트 왕국’이라는 거대한 공간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소.”
“공간에 환술을 부여한다라.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소. 게다가 바토리를 포함한 내 동료들은 다른 세계선으로 떨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지. 제아무리 메피스토펠레스라 해도 이 정도의 광범위한 환술을 유지하는 덴 큰 무리가 따를 거요.”
“메피스토펠레스를 지원하는 존재가 있을 거란 뜻입니까.”
“짐작 가는 자가 있소?”
“붉은 눈의 귀공자.”
아틸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붉은 눈의 귀공자.
원작자인 아틸라로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저 역시도 특별히 아는 것은 없답니다. 다만 천공섬의 요정들은 그와 같은 존재들을 통틀어 ‘아포스톨로스’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죠.”
아포스톨로스.
아틸라는 마음속으로 내뱉었다.
그래. 결국 요정섬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다, 이 말이로군.
“전사 아틸라. 그대의 말대로라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겐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목적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대륙의 모든 생명들에게 바람직한 형태는 아닐 테지요.”
메피스토펠레스의 새로운 목적.
아틸라 역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원작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야망을 깨뜨려 주십시오. 그것이 대륙의 모든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대륙의 생명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됐소. 난 나와, 나의 목적을 위해 놈을 처단하도록 하지.”
아틸라의 솔직한 답변에 아이리스는 웃었다.
“슈시아와 서리나무의 발키리들을 부탁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겠지요.”
* * *
휘둘린 검날이 구울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힐 만큼 깊지 않았고, 검은 피를 주룩주룩 흘리던 구울은 자신을 공격한 병사를 향해 아귀처럼 입을 벌렸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병사가 사지를 허우적댔다.
오래지 않아 시체처럼 늘어졌다.
식사를 마친 구울이 몸을 일으켰다.
녀석의 목엔 조금 전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
씻은 듯이 상처를 회복한 구울이 다른 먹잇감을 향해 움직였다.
놈의 입에 검날이 박혔다.
검날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구울의 머리를 절단했다.
아래턱만 남은 입으로도 구울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가해자를 찾아냈다.
상대를 향해 어금니를 내밀었다.
그러나 시커멓게 드러난 목구멍으로 재차 검날이 박혔고, 몇 번의 칼질 끝에 놈은 생명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검날을 회수해 검은 피를 털어 낸 피핀은 이 정도로는 구울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겨어어억!”
그의 외침에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달리고, 검을 뻗었다.
구울의 썩은 살점과 인간의 붉은 육편이 허공을 수놓았다.
진득한 핏물의 향연 속에서 피핀은 북쪽의 전장을 떠올렸다.
그곳에 등장한 괴물.
그것은 아인하르트의 북쪽 병력을 개미 밟듯 짓뭉개고 있다.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샤를이 나섰다.
새벽이 오기 전에 그 괴물은 샤를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
피핀은 피식 입가를 올렸다.
“너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길은 정말로 고되구나.”
마귀 크라켄을 쓰러뜨리고 백작이 된 샤를.
샤를은 여세를 몰아 아스투리아 왕국을 침공했고, 정복에 성공했다.
이어진 노르드 왕국과의 전쟁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타난 아틸라와 여섯 드워프가 샤를을 방해했다.
이를 악물며 퇴각한 샤를은 한동안 검 수련에 매진했고, 머지않아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후마이야 왕국을 정복하겠노라 선포했다.
척박한 대지의 후마이야는 정복의 대가가 크게 떨어지는 나라지만, 그곳엔 전투 코끼리 부대가 있다.
그것을 손에 넣는다면 향후, 더욱 안정적으로 북벌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판단한 샤를은 거침없이 후마이야로 진격했다.
전투 코끼리와 기수들은 강했다.
후마이야의 왕, 테헤누트 하토르는 직접 선두에 서서 기수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샤를이었다.
샤를의 무력과 제롬의 마법을 앞세운 아인하르트는 후마이야의 전투 코끼리들을 완벽하게 각개격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샤를이 테헤누트의 목을 베어 냈을 때, 이 전쟁의 결과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파우스트.’
사악한 악마의 힘을 이용해 죽은 자를 불러일으키는 사령술사.
그들은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자들이었고, 그들의 손짓에 몸을 일으킨 괴이들은 언데드라 불리는 불사체였다.
북서쪽의 후마이야 왕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피핀은 알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섬멸하는 것.
그러나 구울은 스켈레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죽어 자빠졌다.
피핀은 샤를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이 전장을 지켜 낼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하늘빛이 일순 밝아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피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부신 빛을 내는 수많은 화살이 온 하늘을 메우며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