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128화 (128/425)

128. 서리거인 (1)

상대에 따라 건방지고 어이없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아이리스도, 슈시아도 그 말을 비웃지 않았다.

“그대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함께이지 않군요.”

“조금 전 슈시아에게도 말했지만, 잃어버렸소.”

“잃어버려요?”

“슈시아와 발키리들의 참전은 내가 바토리를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오. 또한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면 파우스트를 상대로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화살이 되겠지.”

“우리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보다 확실히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요.”

서리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발키리들은 아직 전장에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이리스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슈시아를 돌아봤다.

슈시아가 자신을 어머니라 부른 건 일족에 복귀한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아이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 세월 서리나무 엘프를 이끈 왕이었음에도, 그녀는 역시 한 명의 어머니였다.

“말해 보려무나.”

“아틸라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슈시아의 눈에 결의가 어렸다.

“일족의 발키리들과 함께, 제가 파우스트를 멸하겠습니다.”

“슈시아. 그건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아틸라에겐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아틸라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진면목을 봤습니다. 제 직관의 힘은 결코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슈시아의 동공에 보랏빛이 서렸다.

그건 지금껏 아틸라가 본 중 가장 강렬한 직관의 빛이었다.

아틸라는 웃었다.

그래. 그사이 더욱 직관을 발전시킨 거로군. 슈시아.

“아틸라에겐 함께 싸우는 동료들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족의 어린 발키리들도 아틸라와 전쟁에 참여한다면 충분히 그의 수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발키리들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아이리스의 눈에서도 엷은 직관이 빛이 새어 나왔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아이리스는 만족했다.

그간 아이리스는 슈시아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슈시아가 지닌 직관의 힘은 호어프로스트 가문의 특별한 능력.

아이리스는 직관의 힘을 통해, 일족에서 추방당했던 슈시아가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사 아틸라와의 여정을 마친 뒤 상당히 호전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슈시아의 성정엔 불안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등장한 아틸라의 존재는 아이리스의 마음에 새로운 빛으로 스며들었다.

‘어쩌면 슈시아의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완전히 치유할 기회인지도 모른다.’

아이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불씨가 꺼져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졌어야 할 몸. 에르윈의 가호가 억지로 지탱하고 있었을 뿐.’

슈시아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일족을 통치해야 한다.

게다가 그녀는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 세이나자르.

일족의 모든 발키리를 이끌어야 할 발키리들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리스는 슈시아를 시험했다.

여기선 왕인 자신의 의견보다는, 미숙한 발키리들을 이끌고 직접 전장에서 싸워야 하는 슈시아의 결의가 중요하다.

그리고 슈시아는 스스로의 의지로 답을 내놓았다.

아이리스는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슈시아. 그리고 전사 아틸라.”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발키리의 출정을 허가합니다.”

* * *

성을 나서며 아틸라가 물었다.

“서리왕이 말했던 ‘다른 사정’이란 게 뭐지?”

그 말에 슈시아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예티.”

“예티라고?”

예티(Yeti).

칼날 산맥 중턱에 서식하는 강력한 괴수.

“그동안 서리곰의 존재는 우리에게 작지 않은 위협이었지. 그런데 너와 바토리가 서리곰의 동굴 하나를 초토화시킨 후, 근방에 예티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서리거인’이란 이명을 지닌 예티는 그 이름과 다르게 인간보다는 거대한 고릴라를 닮았고, 보통 단독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홀로 산맥을 돌아다닌다고 하여 만만히 볼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다.

예티는 무려 서리곰을 잡아먹고 사는 무시무시한 종이었으니까.

아틸라의 눈빛이 변했다.

“먹이를 찾아 내려왔다는 건가.”

“그래. 초토화된 서리곰의 동굴은 사실 예티의 먹이 숙성고였던 거지.”

서리곰보다 강력한 예티가 근방에 나타났다는 것은 서리나무 엘프에겐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예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발키리들이 미숙한 건 사실이다. 이대로 파우스트와 격돌한다면 경우에 따라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 있지.’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 시나리오의 두 번째 임무를 떠올렸다.

[ 서리나무숲을 찾아 그곳의 발키리들을 이끌고, 파우스트의 관조자 ‘루이제’의 구울 군단을 물리치십시오. ]

루이제.

파우스트의 관조자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지닌 사령술사.

녀석이 소환한 구울은 좀비나 스켈레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 이 임무엔 특별한 조건이 따릅니다. ]

[ 조건 1: 반드시 서리나무 발키리들과 공격대를 구성해야 합니다. ]

[ 조건 2: 관조자 루이제가 완전한 전투불능이 되는 순간, 발키리들의 전투 기여도가 70%를 넘어서야 합니다. ]

조건을 보면, 얼마 전처럼 단독으로 용아병과 두 관조자를 쓰러뜨리는 방식은 적합지 않다.

발키리들의 활약이 필수적으로 병행돼야 하는 상황.

아틸라는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펀치와 도롱뇽과 합류하긴 했지만, 나머지 동료들의 상황에 대해 그는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동료들은 생사를 오가는 역경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바토리.’

아틸라는 바토리가 신경 쓰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낯익은 감촉이 툭툭 종아리를 두드렸다.

헥헥 혀를 내민 펀치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아틸라는 펀치의 겨드랑이를 잡아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예티와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발키리는 얼마나 있나.”

“뭐라고?”

아틸라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 냈다.

어차피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라도 빨리 시나리오 임무를 완료해 동료들을 조우하는 것.

[ 보상: 잃어버린 동료를 같은 세계선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

[ 불러들일 수 있는 동료와 인원은 무작위로 선정됩니다. ]

그리고 그러려면, 발키리들의 성장은 필수적이다.

“어린 발키리들도 슬슬 실전 훈련에 들어가야겠지.”

“정신이 나간 건가 아틸라! 상대는 예티다!”

“나와 함께 예티를 사냥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발키리들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너라면 분명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슈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틸라와 함께 싸우며 레벨업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후우, 슈시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를 제외한다면 교관급의 발키리가 넷. 나머진 아까 보았던 미숙한 아이들뿐이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날 믿어라 슈시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도록 할 테니까.”

“총원은 몇이면 되겠나.”

“지금부터 그걸 알아내려고.”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군.”

“함께 싸우는 이들을 강화시키는 힘에도 한계치가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원에서.”

“인원?”

“그래.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아틸라는 슈시아와 함께 발키리들의 훈련장으로 갔다.

마침 그곳엔 발트가 있었고, 그래서 아틸라는 발트와 가볍게 검을 부딪으며 전투 상황을 만들었다.

그 뒤 슈시아는 아틸라에게 언질 받은 대로, 아틸라와 힘을 합쳐 발트와 결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도록 어린 발키리들을 독려했다.

발키리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다른 이도 아닌 슈시아 세이나자르의 명이었기에 그 말을 따랐다.

이어 아틸라의 눈앞에 수많은 발키리들의 파티 요청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예상했던 메시지.

[ 경고 ]

[ 파티 시스템의 최대 인원이 초과되었습니다. ]

[ 더 이상 파티원을 추가할 수 없습니다. ]

아틸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펀치와 도롱뇽은 파티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아틸라는 자신과 두 환수를 포함해 모두 10인의 파티원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번엔 공격대 시스템을 가동했다.

[ 공격대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

떠오르는 파티 요청을 모두 수락했다.

머지않아 아틸라는 공격대에 포함시킬 수 있는 총 인원이 40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인 파티를 다섯 개 운용할 수 있다, 이 말이군.’

아틸라는 계획을 정했다.

그의 계획에 맞춰 슈시아가 38인의 발키리를 선별했다.

* * *

한편 서리나무숲의 진입로를 찾기 위해 수일간 고생하던 제롬은.

서리나무숲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순 없다. 기사와 병사들은 언데드에게 그리 좋은 카드가 아니니까. 나라도 샤를 님을 도와야 한다.’

제롬은 바토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엘프의 영역으로 통하는 틈새는 공간 상의 절대적 좌표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란다.’

“그 말의 의미를,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스승님.”

제롬은 샤를에게 돌아갈 채비를 했다.

큰 짐은 없었기에 채비랄 것도 없었다.

그러면서 제롬은 파우스트의 마수가 이곳 서리나무숲 근처로는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에 의구심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 파우스트와 전면전을 벌였던 종족은 인간이 아닌 엘프였으니까.

마음을 정한 제롬은 말을 몰아 길잡이 숲을 벗어났다.

얼마간의 시간 차를 두고 숲의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명의 흑기사와, 서른아홉 명의 발키리.

“내가 길잡이를 맡지.”

슈시아가 앞장섰다.

그녀와 거의 나란히 어깨를 두며 아틸라가 달렸고, 38인의 발키리가 유령처럼 뒤를 따랐다.

발키리들에겐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예티를 만나면 슈시아 님이 아닌, 저 인간 전사와 함께 싸우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이유가 무엇이지? 하지만 이건 슈시아 님의 명령.’

‘반드시 따라야만 해.’

서리나무의 어린 발키리들이 슈시아에게 갖는 선망과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슈시아의 말에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머지않아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일행은 새하얀 눈의 평원을 달렸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도 미끄러지는 엘프는 없었다.

그들의 종족 특성, 바람 걷기 덕분이다.

“나타났다. 아틸라.”

슈시아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 서리곰의 동굴 앞에 멀거니 선 예티 한 마리가 보였다.

“가자. 슈시아.”

예티의 공략법은 이미 충분히 전달해 두었다.

거리를 가늠하던 아틸라가 돌진을 시전했다.

내뻗은 흑철방패가 놈의 허벅지와 부닥쳤다.

그 정도로 예티의 덩치는 컸다.

그때였다.

“아, 아틸라!”

슈시아의 외침이 들렸다.

아틸라는 곧바로 이유를 파악했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동굴 안에서 또 다른 예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구 속 아틸라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