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흑기사 (3)
제롬은 긴장했다.
땅에서 불쑥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마법이라니.
흑빛 갑주의 전사는 제롬을 등진 채, 그리고 한 손에는 투구를 든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칼날 산맥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전사의 긴 머리칼과 망토를 흔들었다.
금속 부딪는 잔잔한 소음이 공기 중에 퍼져 나갔다.
문득 제롬은 전사의 갑옷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마법사인 그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눈앞의 갑주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대장장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역작인지를.
그 순간 전사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제롬은 전사의 투구 아래 빼꼼 드러난 자그만 짐승의 발을 보지 못했다.
* * *
아틸라는 서리나무숲의 입구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인하르트의 전장 한복판에서 이곳 길잡이 숲까지 도달하는 것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덕에 그는 의지를 발현해 먼 지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이 물어왔다.
“그러니까 야만 미물. 네 말은 우리가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로 들어온 건 맞지만, 또한 현실 세계 속에 있기도 하다는 건가.”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도롱뇽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아틸라와 의견을 교환하며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래.”
아틸라는 용아병과 스켈레톤을 소환했던 파우스트의 두 관조자를 쓰러뜨린 후 깨달았다.
이들 모두는 환술이 아닌 현실 속의 존재다.
‘환술 속 대상은 그렇게 사실적으로 죽지 않지.’
이전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도 아틸라는 수많은 적을 쓰러뜨렸다.
그들 모두는 죽을 때 검은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결코 실제처럼 붉은 피를 쏟으며 사망하지 않는다.
도롱뇽이 갸웃하며 말했다.
“단지 그 이유뿐이라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일리시아인지 뭔지 하는 발키리와는 급이 다른 환술가다. 실제처럼 죽어 자빠지는 환술 속 창조물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야.”
“물론 그 정돈 알고 있지.”
“그런데?”
“실험을 해 봤거든.”
아틸라는 주인의 영역 스킬로 도롱뇽을 불러들이기 전, 대륙 곳곳으로 빠른 이동을 해 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의지를 발현해 이동할 수 있는 범위는 아인하르트 왕국의 일부 지역뿐이었다.”
“뭐?”
“게다가 의지의 힘을 거둔 채 두 다리로 직접 움직여도 제한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지.”
“그럴 리가. 난 벌써 이곳에서 한참은 떨어진 ‘불타는 섬’에 숨겨진 보물…… 이 아니라! 아, 아무튼 거기도 다녀왔는데?”
“지금 가 봐라 그럼.”
“엥?”
“지금 가 보라고. 분명 갈 수 없을걸.”
도롱뇽의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안 그래도 보물을 손에 넣자마자 아틸라에게 끌려오는 바람에 마력을 섭취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친히 내게 식사 시간을 주겠다고? 캬캬캬! 멍청한 야만 미물 같으니!’
보물에 담긴 마력을 남김없이 흡수하려면 불타는 섬 중앙을 흐르는 대용암(大鎔巖)의 힘이 필요하다.
도롱뇽은 의지를 발현했다.
‘일단은 몸을 키우고. 그래, 날개도 있어야겠지.’
그런데 되지 않았다.
“엥?”
이번엔 불타는 섬으로 곧장 이동하려 했다.
그것도 되지 않았다.
“에에에엥?”
“거봐라. 쯔쯔.”
도롱뇽은 아틸라가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가 그들이 같은 세계선에 존재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즉 아틸라와 자신은 같은 세계선에 존재했지만, 자신이 펀치를 감각할 수 있던 것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고.
그것을 상쇄할 만한 아틸라의 어떤 ‘특별한 힘’이 자신과 펀치를 이곳으로 불러온 것이라 여겼던 것.
그러나 도롱뇽이 생각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 시나리오의 첫 임무를 완료한 뒤.
[ 보상 2: 환수, 도롱뇽을 같은 세계선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
보상으로 도롱뇽을 자신의 세계선으로 불러들였다.
그 와중에 펀치까지 덩달아 세계선을 넘어오게 된 건 덤.
다시 말해 도롱뇽은 이제 불타는 섬을 포함하던 이전의 세계선에서 벗어났고, 더는 그곳으로 이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 빌어먹을! 이러면 내 계획이……!”
그렇게 두 환수와 조우한 아틸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봤다.
대략적인 것은 짐작이 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바토리의 왼팔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선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녀석은 무슨 이유로 환술도, 그렇다고 현실도 아닌 이런 기묘한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인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파우스트는 서리나무숲이 아닌, 아인하르트 왕국을 침공했다.
물론 파우스트의 능력으로도 서리나무숲의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들이 서리나무숲을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아틸라를 의문에 빠지게 만들었다.
‘놈들은 굳이 아인하르트 왕국을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아틸라는 서리나무숲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원작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어찌 됐든 파우스트가 샤를과 대립 구도를 그리고 있다는 건 아틸라로서는 반가운 일.
‘발키리의 힘을 획득한 슈시아와 서리나무 엘프들을 샤를의 동맹군으로 만들 수 있다면.’
생각보다 쉽게 파우스트를 쓰러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틸라가 지금 서리나무숲을 찾으려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 메피스토펠레스 시나리오가 이어집니다. ]
시나리오 때문이다.
[ 두 번째 임무 ]
[ 서리나무숲을 찾아 그곳의 발키리들을 이끌고, 파우스트의 관조자 ‘루이제’의 구울 군단을 물리치십시오. ]
[ 이 임무엔 특별한 조건이 따릅니다. ]
도롱뇽은 이전에 아틸라와 함께 서리나무숲을 방문한 적이 있다.
녀석의 발달된 후각이라면 서리나무숲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이……!”
“헛소리 그만하고 냄새나 잘 맡아라. 또 정신 교육 당하고 싶지 않으면.”
“지, 지금 맡고 있다! 맡고 있다고!”
그러나 머지않아 아틸라는 더 이상 도롱뇽의 후각에 기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후우……. 아까부터 누가 이렇게 길잡이 숲을 헤집고 다니는가 했더니.”
저만치 수풀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틸라. 너였던 건가.”
기다란 활을 맨 여자 엘프가 엷은 미소를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를 확인한 아틸라도 웃었다.
“오랜만이군. 슈시아.”
* * *
서리나무숲은 이전에 찾았을 때와는 다른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활을 들어라.”
“화살을 매겨라.”
“과녁을 향해 겨누어라.”
아틸라의 시선이 목소리를 좇았다.
수십 명의 엘프들이 기다란 활을 들어 저마다의 과녁을 겨누고 있었다.
“쏘아라!”
퉁툿투투퉁! 수십 발의 마력 화살이 과녁을 향해 쏘아졌다.
몇 발은 과녁 정중앙에 맞았고, 몇 발은 가장자리에 맞았으며, 나머진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유는 있었다.
과녁은 마력의 힘으로 움직이고, 거기에 더해 화살을 피해 숨을 줄도 아는 아주 특별한 것들이었다.
“새로운 발키리들인가.”
“그래. 대부분 성년식을 치르기 전의 어린아이들이지. 발키리의 힘을 개화한 뒤 쉴 틈 없이 훈련하고 있다.”
발키리의 새로운 시조가 된 슈시아 세이나자르.
그녀의 몸을 통해 부활한 발키리의 힘은 서리나무의 어린 엘프들 사이에서 주로 발현했다.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이려면 유연한 사고와 신체가 필수적이니까. 아울러 그것이야말로 아이들이 지닌 가장 훌륭한 무기라 할 수 있겠지.”
“아이들이라기엔 상당히 성숙해 보이는데.”
“하하하. 인간과 엘프는 다르니까.”
슈시아를 알아본 어린 발키리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마치 왕이라도 접견한 듯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아틸라는 슈시아가 서리나무숲에서 가지는 존재감을 실감했다.
“슈시아 님!”
“슈시아 님이 오셨어!”
훈련을 맡았던 교관도 슈시아에게 꾸벅 목례를 건넸다.
슈시아에게 달려오려는 아이들을 교관이 저지하려 했지만, 슈시아가 눈짓으로 그것을 막았다.
신나게 달려온 아이들은 외부인인 아틸라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슈시아 님! 지난번에 시연해 주셨던 것 말인데요!”
“맞아요! 한 번만 더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빛내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슈시아는 환히 웃었다.
그녀가 등 뒤의 활을 꺼내들자 아이들이 환호했다.
“슈시아 님의 시연 시간이다!”
“와아아!”
교관에게 형식적인 허락을 구한 슈시아가 자리에 섰다.
활시위를 당겼다.
어린 발키리들과 달리 그녀의 활엔 무려 다섯 개의 마력 화살이 걸려 있었다.
투웅!
동시에 쏘아진 화살들이 생명을 지닌 흰 새처럼 비행하며 다섯 개의 과녁 정중앙에 박혔다.
어린 발키리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조금은 무안한 얼굴로 돌아오는 슈시아에게 아틸라가 말했다.
“상당한 실력이군. 솔직히 조금 놀랐다.”
“네 덕분이지.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까부터 말투가 영 딱딱한데? 어색하니 예전대로 하지그래.”
“음? 영문 모를 말을 하는군. 난 언제나 이런 말투를 사용했지.”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몇 차례 헛기침을 한 슈시아가 화제를 돌렸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잃어버렸다.”
“잃어버려?”
“그래서 찾아야 하지.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 중 하나다.”
슈시아가 헛웃음을 뱉었다.
“네가 찾지 못하는 자를 우린들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냥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던 슈시아가 문득 말했다.
“모습이 많이 변했군.”
“이런저런 일이 있었거든.”
“전의 거대한 도끼는?”
“부러졌다.”
슈시아의 눈이 흑철검과 흑철방패를 바라봤다.
“검과 방패는 드워프 장인의 솜씨인가.”
“그래.”
“플레이트 아머 역시 그런 것 같군. 어떻게, 드워프 왕의 목숨이라도 구해 준 거야?”
슈시아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제서야 예전의 슈시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틸라가 답했다.
“뭐, 비슷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둘은 성에 도달했다.
슈시아를 본 문지기가 다급히 성문을 열었다.
마침 회의실에선 서리왕과 전사장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오. 전사 아틸라.”
발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군 발트 전사장.”
서리왕과 눈빛을 주고받은 발트와 전사장들은 눈치 좋게 자리를 비켰다.
잠시 후 자리엔 서리왕과 슈시아, 그리고 아틸라만이 앉아 있었다.
아틸라가 말했다.
“평화롭군 이곳은. 숲 바깥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비해 말이야.”
“우리가 참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훈계라도 할 셈입니까. 전사 아틸라.”
“그럴 생각은 없소. 아이리스 호어프로스트.”
“이곳을 찾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슈시아와, 그녀의 발키리 부대가 필요하오.”
서리왕의 표정이 변했다.
“그대도 이곳으로 오는 동안 보았겠지요. 발키리들은 미숙합니다. 전쟁에 참여했다간 채 피어나지도 않은 어린 꽃들이 뜯기고, 또 사라지겠지요.”
“모든 발키리가 무사귀환할 수 있을 거란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겠소. 그러나 서리왕, 당신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예상보다도 피해는 적을 것이라 단언하지. 아울러 파우스트를 쓰러뜨리고 돌아온 그들은 더 이상 미숙한 발키리들이 아니게 될 것이오.”
“재밌는 말이로군요. 그대는 무얼 믿고 그리 자신만만할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을 믿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