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흑기사 (2)
짐승과도 같은 포효를 마친 흑기사가 검을 뻗었다.
용아병이 검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직전과는 달랐다.
흑기사의 검이 용아병의 검을 짓누르듯 밀쳐 냈다.
그 광경을 본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용아병이 흑기사와의 완력 대결에서 밀리고 만 것이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용아병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흑기사는 검을 휘두른 관성을 이용해 오른발을 디딤돌 삼아 한 바퀴 더 몸을 회전했다.
퍼걱! 흑기사의 방패가 용아병의 흉부를 타격했다.
뼈가 부서지는 소음과 함께 녀석의 갈비뼈가 내려앉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흑기사는 수차례 더 용아병의 몸에 방패를 휘둘렀다.
검처럼 날이 서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방패는 방어구라기보다는 거대한 흉기 같았다.
그러나 상대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스켈레톤.
흑기사의 파상적인 공세를 얻어맞던 녀석이 양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벼락처럼 내리쳤다.
콰아앙!
흑기사는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의 팔꿈치와 무릎이 구부러지고, 단단한 지면을 부수며 발이 파고들었다.
“크으윽……!”
흑철의 투구 안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패로 방어하긴 했지만 상당한 충격이 전해진 모양.
그럼에도 기사들은 감히 흑기사를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
자신들의 앞엔 스켈레톤 군단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전투에 어정쩡하게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흑기사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용아병이 흑기사를 걷어찼다.
흑기사는 민첩하게 방패를 틀어 막아 냈지만, 용아병의 가공할 발길질은 그의 몸을 사정없이 바닥을 구르도록 만들었다.
“흐, 흑기사!”
용아병이 포효했다.
시꺼멓게 뚫린 녀석의 눈 안에서 불길한 녹빛 광채가 꿈틀댔다.
녀석과 지근거리에 있던 일반 스켈레톤들의 눈에서도 같은 광채가 뿜어졌다.
따다닥딱딱, 이를 부딪치며 수십 마리의 스켈레톤이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직전까지 자신이 상대하던 기사와 병사를 무시한 채, 놈들은 홀린 듯이 흑기사에게 검을 꽂았다.
그 모습은 마치 최상위 포식자가 먹다 남긴 짐승 찌꺼기에 달려드는 굶주린 하이에나들 같았다.
까드득. 까득. 까드드드득.
흑기사를 중심으로 뼈다귀의 산이 만들어졌다.
이내 흑기사의 모습은 털끝 하나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변이 발생했다.
“저, 저게 뭐야!”
뼈다귀의 산이 활화산처럼 분화했다.
폭발하듯 튀어나오는 것은 용암이 아닌, 부서진 스켈레톤들이었다.
흑기사의 몸이 드러났다.
그는 왼손에 방패 대신 또 다른 검을 쥐고 있었다.
그가 두 자루 검을 휘두를 때마다 스켈레톤들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간혹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검을 휘두를 땐 서너 마리의 스켈레톤이 그야말로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수많은 스켈레톤을 상대하며 흑기사는 오히려 체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부서진 스켈레톤들이 뼈를 맞추고, 재차 흑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흑기사는 더욱 향상된 속도와 완력으로 놈들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저, 저게 무슨……!”
물론 금사자 기사단은 그것이 흑기사가 지닌 ‘휩쓸기’와 ‘학살의 보답’ 스킬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얼마 전, 혈귀로 변한 드워프들의 군체를 쓰러뜨리라는 귀살 시나리오 임무의 완료 보상으로 새로운 스킬을 개화했다.
[ 심판의 외침 ]
[ 언데드를 상대로 공격력과 회복력이 20% 증가합니다. ]
‘그땐 수해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데 쓸모없는 스킬이라 아쉬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심판의 외침은 용아병과 완력 대결을 했을 때, 그 효율이 증명됐다.
게다가 아틸라는 기대하고 있었다.
용아병과 처음 검을 맞부딪쳤을 때.
[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심지어 시나리오 네임은.
[ 메피스토펠레스 ]
메피스토펠레스!
[ 첫 번째 임무 ]
[ 백 마리의 스켈레톤을 쓰러뜨리고, 눈앞의 용아병을 전투불능으로 만든 뒤, 그들을 소환한 2인의 사령술사를 동시에 처치하십시오. ]
[ 주의! ]
[ 2인의 사령술사를 동시에 처치하지 않으면 부활할는지도 모릅니다. ]
또한 이번 임무엔 이전과 다른 특이점이 존재했는데.
[ 임무 완료 시,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완료 보상을 선별합니다. ]
‘선별?’
[ 보상 1: 공격대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 충족됩니다. 이후 플레이어는 공격대 시스템을 가동, 조직할 수 있습니다. ]
하나는 임무를 완료하기 전부터 보상 내용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 보상 2: 환수, 도롱뇽을 같은 세계선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
보상이 하나가 아닌 두 개라는 것.
그런데.
‘뭐야. 같은 세계선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녀석이 하필 도롱뇽이야?’
바토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백 퍼센트 만족스러운 보상은 아니었지만, 아틸라는 기대감을 가졌다.
시스템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보상을 선별한다고 했고, 이것은 돌발 퀘스트 같은 것이 아닌 ‘시나리오’다.
그렇다는 것은 다음 임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며.
또한 차후 임무의 보상은 도롱뇽 외의 다른 동료들과 합류할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고맙다 시스템아. 네가 빌어먹을 메피스토펠레스의 개수작으로부터 날 도와주는구나.’
아틸라는 바토리가 신경 쓰였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전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바토리가 지닌 왼팔의 힘을 노린 적이 있다.
물론 그건 진정한 메피스토펠레스라 보기 어려운,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탄생한 놈의 또 다른 자아였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임무를 완료하고 동료들과 합류한다.’
가장 염려가 되는 건 바토리지만 펀치도 그 못지않게 신경 쓰였다.
그리고 둘만큼은 아닐지라도 오토, 카스피, 크누트도 그의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찔렀다.
그러는 동안 아틸라는 백 마리의 스켈레톤을 쓰러뜨렸다.
심판의 외침으로 향상된 회복력은 학살의 보답에도 적용됐고, 그래서 아틸라는 상당히 회복된 체력으로 용아병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조무래기는 이만 꺼져라!”
휘두른 칼질에 스켈레톤들이 일거에 나가떨어졌다.
두 자루 검을 각각 한 손에 든 채로 용아병을 향해 돌진했다.
[ 방어 태세 ]
아틸라는 최대한 빠르게 끝을 보기로 했다.
흑철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틈을 노려 용아병의 몸에 무휼을 꽂았다.
[ 방어구관통(x2) ]
[ 대상의 방어력과 회복력이 20% 감소합니다. ]
아틸라는 다시금 태세를 전환했다.
[ 파괴 태세 ]
방어구관통으로 용아병은 20퍼센트의 방어력이 감소했다.
본래는 돌진으로 추가 방어력 하락을 노렸었지만, 스켈레톤의 왕답게 놈은 돌진 디버프에 저항했다.
‘상관없다.’
자신은 심판의 외침으로 20퍼센트의 공격력 상승을 얻은 상태.
게다가 파괴 태세로 추가로 공격력을 상승시켰다.
보조무기 숙련도 30퍼센트 증가는 덤!
[ 파괴 태세는 시전자의 체력을 초당 2퍼센트씩 감소시킵니다. ]
체력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웃었다.
용아병과 흑기사의 전투를 지켜보던 기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도 흑기사는 놀라운 무력을 선보였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가히 전사신의 강림, 그 자체로 보였다.
흑기사의 두 자루 검이 불꽃처럼 춤을 추었다.
그가 꺼내든 두 번째 검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 기사들은 그것의 형태를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이 눈부신 빛을 내며, 기다랗게 변했다.
이어 용아병의 방패가 반으로 쪼개졌다.
그뿐 아니라 흑기사의 광검(光劍)은 방패를 들었던 용아병의 팔과, 어깨, 가슴을 송두리째 갈라 버렸다.
용아병이 무릎을 꿇었다.
선풍처럼 휘둘린 광검이 용아병의 목을 자르고, 목 안에 내리꽂혔다.
파지짓! 파짓! 파지지짓……!
허물어진 용아병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수없이 쓰러뜨려도 부활을 멈추지 않던 스켈레톤의 왕이 그렇게 전투불능에 빠졌다.
흑기사는 멈추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목표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목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카아아앙!
스켈레톤의 벽이 무너지며 그 안에 숨어있던 흑마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한 그의 목을 흑기사가 붙잡았다.
“컥! 커헉……!”
상대의 목을 움켜쥔 채 흑기사는 방향을 꺾어 달렸다.
시시각각 발생하는 놀라운 광경에 얼이 빠진 기사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흑기사는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안이했군. 파우스트의 개들.”
그의 양손엔 각각 시커먼 두건을 쓴 흑마술사들의 목이 쥐여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서로 붙어 있다니 말이야.”
“크허억……! 네놈……은……!”
“설마……!”
움켜쥔 양손이 흑마술사들을 밀쳐 냈다.
[ 휩쓸기 ]
부릅뜬 눈의 두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 * *
아인하르트의 병영.
“흑기사?”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샤를은 부하의 보고를 들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검은 갑주의 사내가 전장 한 곳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보고하는 자는 금사자의 제3기사단장, 앙드레.
용병단 시절부터 함께하던 자는 아니었지만 실력과 충성심만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사내였다.
“자세히 말해 보라.”
앙드레가 설명을 시작했다.
우연히도 흑기사가 전장에 나타나는 광경을 본 이가 있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흑기사는 그야말로 연기처럼 그 자리에 출현했다고 한다.
이어 흑기사가 스켈레톤 무리를 소거하고, 용아병을 때려눕힌 뒤 두 명의 사령술사를 제거한 것까지의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리고 두 사령술사의 잘린 목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흑기사는 처음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앙드레의 설명을 들은 샤를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연히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이는 아틸라.
그러나 샤를이 아는 아틸라는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지 않았고, 검과 방패를 즐겨 사용하는 전사가 아니었으며, 또한 마법사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신기를 지닌 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검은 갑주라. 그렇다면 혹시.’
아포스톨로스.
샤를이 떠올린 건 그 이름이었다.
‘붉은 눈의 귀공자.’
그와 겨뤄 본 샤를은 알고 있었다.
녀석은 몸에서 검은 기운을 흩뿌렸고,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으며, 신출귀몰하게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녀석. 혹은 또 다른 아포스톨로스일지도.’
샤를은 골치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제롬이 서리나무숲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그는 강력한 팔 하나를 잃었다.
물론 피핀이 선방해 주고는 있다.
그러나 불사체인 언데드를 상대로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이 와중에 피아식별이 확실치 않은 정체불명의 강자까지 등장하다니.
“흑기사는 언데드와 사령술사만을 공격했습니다. 우리의 적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앙드레의 말에 샤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제롬이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시각 제롬은 칼날 산맥 근처에서 에일 듯한 추위와 싸우며 서리나무숲의 진입로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신기루처럼 무언가가 나타났다.
흑빛 갑주를 입은 거구의 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