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흑기사 (1)
도롱뇽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멀거니 서 있었다.
“뭐야 이건.”
주위를 둘러봤다.
키클롭스의 감옥에서 벗어났으니 분명 수해가 보여야 하건만,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도롱뇽은 최근, 지금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빌어먹을. 그런 거냐.”
분명했다.
이곳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만든 환술 세계다.
“과연 고위악마다 이건가. 발키리인지 뭔지 하는 애송이보다 훨씬 더 강력하군.”
슈시아는 물론이고 바토리마저 견디지 못했던 일리시아의 환술.
그것보다 더욱 강력한 환술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특별한 존재.
이 정도의 환술은 그의 정신세계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라? 가만.”
도롱뇽이 코를 킁킁댔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날던 도롱뇽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제 등을 바라봤다.
“어라라라? 언제 날개가 생겼지?”
이곳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땐 존재하지 않던 날개였다.
도롱뇽은 깨달았다.
“그래. 이곳은 환술 세계였지.”
의지가 강인하다면 무엇이든 구현할 수 있는 세상.
실제로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 도롱뇽은 거의 전성기에 가까운 모습으로까지 돌아가지 않았던가.
물론 아틸라의 의지였지만.
“캬캬캬캬! 날개가 생기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내친김에 도롱뇽은 전성기 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강한 의지를 발현했다.
그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전성기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두 발로 서면 아틸라와 비슷한 키높이는 되었다.
“쳇. 이 정도가 한계인가.”
펄럭펄럭 날개를 움직이던 도롱뇽은 머지않아 목표물을 찾았다.
“가만. 녀석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놀랄 수도 있겠군.”
도롱뇽은 몸의 크기를 원래대로 줄였다.
날개도 없앴다.
빼꼼 두 눈만을 내놓은 채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상대가 도롱뇽을 보자마자 반갑게 입을 열었다.
끼아옹!
방방대며 펀치가 달려왔다.
펄쩍 뛰어 도롱뇽을 앞발로 붙잡은 펀치가 그의 얼굴을 마구 핥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 미친 곰탱이 새끼가!”
도롱뇽은 다시금 몸을 부풀려 펀치를 떼어 낼까 생각했지만.
- 도롱뇽아.
- 내 친구 도롱뇽아.
- 나 무서웠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펀치의 눈망울을 보곤 그만두었다.
평소 아틸라가 펀치에게 하던 행동을 떠올린 도롱뇽은 자그만 앞발을 들어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곰탱이 새끼. 그래그래. 이 도롱뇽 님이 왔으니 이제 괜찮다.”
잠시 후 펀치가 물어왔다.
- 내 친구 도롱뇽아.
- 아틸라는?
“글쎄. 야만 미물 녀석이 어디 있는진 나도 몰라.”
- 어째서?
- 넌 날 찾았잖아.
“널 찾은 건 순전히 우연이야. 네가 마침 나와 같은 세계선에 있었기 때문이니까.”
- 세계선?
“음. 이야기하자면 길고, 일단 우린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로 들어왔다. 이곳에선 시간도, 공간도,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움직이지.”
도롱뇽은 펀치의 등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러니까 발 가는 대로 그냥 움직여. 야만 미물 녀석은 기묘한 힘이 있으니 아마 그쪽에서 우릴 찾을 거다.”
- 그럼 여기서.
- 가만히 기다리면 안 돼?
“안 돼.”
- 왜?
“심심하니까.”
- 응 알았어.
펀치가 발을 움직였다.
때로는 걷고 때로는 달렸다.
얼마나 이동한 건지, 얼마큼의 시간이 흐른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동을 계속하던 중 도롱뇽이 외쳤다.
“고, 곰탱이! 잠깐!”
- 왜?
“저쪽이다! 저쪽으로 가!”
- 어디?
“아 그쪽 말고 저쪽……! 아 됐다. 너 내가 변해도 놀라지 말고 가만있어. 알았지?”
도롱뇽이 의지를 발현했다.
그의 몸이 꿀렁꿀렁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 와.
- 내 친구 도롱뇽 커진다.
- 전에도 본 적 있어.
- 아틸라와 바토리가 사랑싸움할 때.
“캬캬캬! 미친 곰새끼. 니가 사랑을 알아?”
- 알아.
- 수컷과 암컷이.
- 후손을 만들기 위해.
- 육체적인 접촉을.
“시끄럽고. 조금 빠를 거다.”
도롱뇽의 앞발이 펀치의 덜미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긴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을 날기 시작했다.
- 와아 신난다.
- 내가 하늘을 날고 있어.
“내가 나는 거거든!”
- 내 친구 도롱뇽아.
- 저기 숲 좀 봐.
- 내가.
- 아니 우리 엄마가 살던 곳.
“미물 곰새끼. 무슨 숲이 보인다는 거야.”
이곳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
펀치가 보는 세상과 도롱뇽의 세상은 달랐다.
도롱뇽은 눈동자를 움직여 제 눈에 비친 세상을 살폈다.
검은 대지.
들끓는 용암.
저 멀리 화산에서 분출되는 매캐한 연기.
불타는 섬.
- 도롱뇽아.
- 어디로 가는 거야?
“보물 찾으러.”
- 보물?
“이몸이 오래전 숨겨둔 보물 말이야. 앗! 그러고 보니 지난번 서리검처럼 또 꿀꺽하면 안 된다! 알았어?”
- 응.
- 궁금한 게 있어 도롱뇽아.
“곰탱이 새끼. 또 뭐가 궁금한데.”
- 여긴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라면서.
“그래.”
- 근데 어떻게 이 안에 네 보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야?
“어라?”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곳은 환술 속 세계고, 자신의 보물은 실제의 물건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자신의 보물이 가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마, 메피스토펠레스 이 새끼가.’
그러는 사이 도롱뇽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펄럭, 날개를 크게 휘두르며 착지했다.
“아 몰라. 꺼내 보면 알겠지.”
발밑에서 느껴지는 반가운 기운이 그의 의구심을 날려 버렸다.
“흐흐흐. 그럼 어디.”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 도롱뇽이 앞발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시뻘건 용암이 꿈틀대는 그곳에서 휘적휘적 앞발을 놀렸다.
- 으으.
펀치의 눈엔 도롱뇽이 어느 커다란 곰이 싸 놓은 대변을 마구 뒤적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윽고 앞다리에 덕지덕지 대변을 묻힌 도롱뇽이 신묘한 빛을 발하는 어떤 물건을 들어 올렸다.
“캬캬캬캬캬! 이걸 저 불타는 용암에 녹여 흡수하면 내 힘의 5퍼센트! 아니 10퍼센트는 회복될지도 몰라!”
도롱뇽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화산을 보며 깔깔 웃었다.
“기다려라 야만 미물! 그동안의 수모를 내 한꺼번…… 어어? 어어어어어?”
도롱뇽의 날개가 저절로 퍼덕거렸다.
“으아아! 날개가 또 제멋대로!”
도롱뇽은 이 불유쾌한 감각에 대해 알고 있었다.
- 같이 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려는 도롱뇽을 향해 펀치가 몸을 띄웠다.
도롱뇽은 의지를 발현해 조금 전 손에 넣은 보물을 발톱만 하게 축소시켜 감춘 뒤, 아슬아슬 펀치의 덜미를 쥐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으아아아! 이 빌어처먹을 익숙한 느낌은! 야만 미무우우우울!”
* * *
도롱뇽은 펀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린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로 들어왔다. 이곳에선 시간도, 공간도, 바깥세상과는 다르게 움직이지.’
그리고 키클롭스의 감옥에서 탈출한 아틸라는 품 안의 바토리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사라진 건 바토리만이 아니었다.
오토, 카스피, 크누트, 펀치, 도롱뇽까지.
다시 말해 아틸라는 혼자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틸라는 가장 먼저 바토리를 찾으려 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어떤 보험을 들어 놨었고, 그러나 그럼에도 바토리를 찾는 것에 실패했다.
다음으로 아틸라가 시도한 건 펀치와 도롱뇽을 찾는 것이었다.
일리시아의 환술 속에서도 그러했듯, 아틸라에겐 자신의 환수를 추적할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했다.
스킬, 주인의 영역을 시전해도 마찬가지였다.
[ 주인의 영역 ]
[ 환수, 도롱뇽을 강제로 영역 안에 불러들입니다. ]
[ 실패했습니다. ]
[ 환수, 도롱뇽을 찾을 수 없습니다. ]
‘빌어먹을 메피스토펠레스.’
이것으로 아틸라는 확실히 깨달았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생성시킨 이 환술 세계는 즉흥적인 것이 아닌, 상당히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특별한 결계라는 것을.
그리고 아틸라는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선에서 도롱뇽이 펀치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세계는 시공(時空)이 뒤엉켜 있다.’
다시 말해 아틸라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 시점에서, 그의 동료들은 아직 환술 세계에 진입하기 전인지 모른다.
혹은 이미 환술 세계를 경험한 뒤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는 거냐. 메피스토펠레스.’
주위를 둘러봤다.
끝없이 펼쳐진 백색의 공간.
분명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 있지만, 바닥이라 생각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도 없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도 없었다.
물끄러미, 하늘이라 생각되는 것을 올려 보던 아틸라는 불현듯 엄습하는 낯익은 감각에 고개를 내렸다.
그는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베어내고 또 베어 내라!”
“우리의 검 끝에 왕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금사자 기사단이다!”
“오오오오오!”
금사자의 백금빛 갑주가 삐걱거렸다.
본래는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을 검도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었다.
키에엑!
키에에에에엑……!
금사자가 상대하는 것은 망자의 군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놈들은 파우스트의 사령술이 불러온 언데드들이었다.
“이봐!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빛 갑주라니! 어느 용병단 소속이냐!”
기사들의 외침에 아틸라는 문득 시야가 좁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펀치에게 팬티처럼 입혀 놨던 투구.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씌워져 있었다.
“장비를 보아하니 실력깨나 있는 용병단장인 모양이군! 멍청히 서 있지만 말고 검을 휘둘러라!”
아틸라는 헷갈렸다.
이곳이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속 세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아인하르트와 파우스트의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 건지.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으어어어어!”
“저, 저건……!”
오래전 할리가 소환한 적이 있었던 특별한 스켈레톤.
용의 어금니로 만들어졌다는 스켈레톤의 왕.
그것이 지면을 뚫고 몸을 일으켰다.
용아병(龍牙兵)!
“용아병! 용아병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 갑자기!”
아인하르트의 기사들은 이전에도 용아병을 상대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틸라의 시선이 먼 곳을 훑었다.
그는 지척에서 몸을 일으키는 용아병보다 그것을 소환했을 시전자를 찾는 것에 주목했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놈을 찾아내고, 찢어 죽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이 빌어먹을 환술 세계인지, 아닌지에 대해 말이야.”
그의 입가에서 송곳니가 드러났다.
흑철검과 흑철방패를 들었다.
세차게 맞부딪쳤다.
콰앙!
주위의 시선이 아틸라에게로 쏠렸다.
그의 전투 자세를 확인한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흑색으로 빛나는 플레이트 아머.
같은 빛을 뿜는 커다란 검과 방패.
휘날리는 긴 망토.
가공할 열기가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기사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저 무시무시한 스켈레톤의 왕, 용아병의 위압감을 한순간 지워 버릴 정도로.
누군가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흑기사(Dark Knight).”
흑기사가 돌진했다.
자신보다 배 이상 커다란 용아병을 향해 힘차게 몸을 날렸다.
카아앙!
흑기사의 검과 용아병의 검이 부닥쳤다.
흑기사가 한 손으로 휘두른 검은 양손검처럼 커다랬지만 용아병의 검은 더욱 컸다.
용아병의 방패가 흑기사를 가격했다.
그러나 흑기사 역시 마주 방패를 뻗어 그것을 상쇄했다.
지면으로 착지한 흑기사가 전투 함성을 외쳤다.
금사자 기사단의 귀엔 그것이 마치 거대한 흑빛 늑대가 포효하는 것처럼 들렸다.